요즘 뉴스를 들으며

예전, 어떤 강의시간에 들은 얘기. 당시의 주제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무슨 얘기를 하다가, 이 사례를 자신이 아는 사람은 다르게 분석하더라고 강사는 얘기했다. 그 사람은 그 사례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그 사례와 관련한 사람이 비서울대출신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는 것.

아침저녁으로 라디오로 뉴스를 듣는다. 딱히 뉴스만 듣는 것은 아니고 FM방송을 듣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러다보면 하나의 뉴스가 반복해서 나오는데 요즘의 화제는 김병준 교육부총리다. 사퇴 문제로 뉴스마다 일정 이상의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교수들의 논문 중, 중복기고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 남의 논문 짜깁기 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요약정리하고선 연구비 타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언론에서 떠들고 있는 정도의 기준으로 교수 중에서 장관 후보를 찾는다면 거의 없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 말은 김병준 교육부총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관행”이 얼마나 만연한지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런 기사를 접하며 슬그머니 드는 몸앓이는 이런 반응엔 학벌이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였다. 고졸임에도 대통령이 된 현 정권 이후 정치권에서 학벌과 관련한 “망언”들이 많다. (전여옥씨의 발언이 대표적이겠지만, 상당수의 정치인들이 노무현대통령이라고 안 부르고 “노무현”이라고만 부른다는 점도 이를 잘 보여준다.) 단순히 대학을 나왔다는 점만으로는 안 되고, 이른바 명문대 그 중에서도 서울대 출신이어야만 한다는 것.

그러면서 김병준씨를 검색했더니 비서울대 출신이었다. 비서울대 출신일 뿐만 아니라 비서울지역에 소재한 대학 출신이었다. 문재인씨가 법무부 장관 후보란 말에 정치권에선 역시나 반대한다고 하는데, 검색하니 비서울대 출신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을 다시 읽으면, 김병준 교육부총리의 논문중복게재가 문제가 아니라 이른바 학벌 사회에서 자신들보다 학벌도 안 되면서 자신들보다 “높은/좋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꼬우니까 저렇게 반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예전에 이회창씨가 “고대 나와서도 기자할 수 있나”란 요지의 발언을 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는데, 언론고시란 말이 있을 정도로, 메이저급 언론은 학벌과 밀접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반응들은 학벌”파괴”(말이야 바른 말이지 “파괴”는 무슨. 그저 서열을 무시하는 정도일 뿐)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을 것이 두려워서는 아닐까하는 의심을 한다.

억측과 추측만으로도 기사를 쓰는 상황에서, 루인도 이런 추측성 글을 보탠다. 하지만 정말 의심스러운걸.

곰팡이가 몸을 타면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멍하다. 몸의 한 곳이 풀린 것처럼 멍하다. 쓰고 싶은 글은 많은데 글쓰기를 눌렀다가도 그냥 접는 경우가 많다. 쓰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냥 몸에서만 놀다가 문자로 표현하기도 전에 소멸한다. 아니 마냥 소멸하지는 않고 글을 쓰겠다고 자리에 앉기 직전까진 활발하다가 글을 쓰겠다고 앉으면 소멸하고 다시 접으면 몇 시간 지나 몸을 타고 논다.

[Run To 루인]에도 여러 번 적었지만, 여름을 특히 싫어한다. 여름에 태어나서 여름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어릴 땐, 딱히 여름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딱히 좋아하는 계절도 없었고 싫어하는 계절도 없었다. 하지만 몇 해 전, 또 다시 우울증에 시달리다, 벽에 핀 곰팡이 꽃에 무너지며, 온 몸에 곰팡이 꽃이 피는 환각에 시달리며 여름은 악몽이었다. 락스로 청소하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마냥 무력하게 무너지기만 했다. 그 전 여름엔 냉장고에 들어가는 상상으로 종일을 보내기도 했다. 전기밥솥의 밥은 곰팡이로 가득했지만 그걸 방치하면서도 어쩌지 못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모두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여름이 온다는 건 곰팡이 꽃이 핀다는 의미다.

그나마 작년은 무난하게/무사하게 지나간 것 같다. 하지만 올해 다시 무력하게 보내고 있다. 이번 여름엔 아침을 해먹지 않겠다고, 8월까지는 모든 식사를 (김밥을 중심으로) 사먹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이미 예감한 일인지도 모른다.

헛된 환상 혹은 망상이 우울을 부른다. 아직도 몸에서 곰팡이 꽃이 피는 환각에 시달리곤 한다. 때로 강박적으로 손을 씻는 것도 그렇다. 곰팡이 꽃이 만개한 곳에 불을 붙이면 ‘확’ 하고 일순간에 타오른다. 그렇게 몸에 불을 붙이면 모든 것이 사라질까? 석유 없이도 온 몸에 불을 붙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여름이다. 장마가 지나간 여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앞으로도 종종 글을 쓰지 않고 지나가는 날들이 있겠지만, 쓸 수 있을 때 쓰고 싶다. 이 자락마저 놓으면, 상상하기 싫다. 그저, 우물 저 아래 앉아, 우울해, 라고 외치는 기분이다. 모든 소리는 우울 안에서 맴돌 뿐 어디에도 닿지 않는 걸 알지만 그래도 외치는 기분이다.

하긴. 이러고 나면 좀 괜찮아 진다는 걸 안다.

이젠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겠지….

괴물: 소통, 가족, “엄마”

[괴물] 2006.07.31.월, 오전 09:00 아트레온 2관(3층) B-7

일요일 오후에 볼까 했다. 하지만 주말이면 무려 8,000원씩이나 하는데 그럴 수야 없지. 조조로 즐기는 [괴물]은 ‘괴물’스럽게도 9시 조조임에도 관객수가 상당했다. 웬만한 영화의 오후나 저녁 시간대 관객수가 9시 조조에 몰렸다. 역시 인기가 있다는 의미일까?

우선, 전반적인 느낌은, 만약 한국사회의 특정 맥락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그냥 무난하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종종 놀라는 장면도 있고 합동장례식장에서의 장면은 울다가 웃는 당혹스러운 순간을 맞기도 한다. 정말이지 눈물 흘리며 울고 있는데 바로 그 장면이 깔깔 웃지 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바뀌면 어쩌란 말이냐! 정말이지 당혹스러운 찰라.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서 뭐가 난다는;;;;;;)

사실, 이 영화, 분석하고 싶지 않을 만큼 복잡한 지점을 가지고 있다. 좋게 보려면 마냥 좋게 봐줄 수도 있고 과도하게 읽으면 정말 끔찍하게 읽을 수도 있다는 느낌 때문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 후기는 반드시 분석이어야 할까, 하는 의심도 들지만 그냥 어떤 상념이 몸을 타고 흘렀는지 적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크진 않지만 신경 쓰일 수도 있는 내용이 조금씩 있음. 하지만 영화 관람을 방해할 만한 스포일러는 없을 듯.

# 소통
송강호(강두) 등이 강두의 딸 고아성(현서)이 괴물에게 잡혀갔지만 살아 있다고 말했을 때, 누구도 믿지 않는 장면을 접하며, 기존의 언어와 ‘다른’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느꼈다. 다른 사람의 경험까지도 재단할 수 있는 권위/권력을 가졌다고 믿는 이들-이른바 전문가들이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무시하는가를 이 영화는 드러낸다. 그래서 극비라는 비밀을 강두가 폭로할 때, 강두의 목소리를 저항이 아니라 정신병자의 헛소리로 간주한다.

사실 이 영화는 이런 소통에서 성공하는 건 아니다. 정신병자로서 탈출하고 숨어 지내고 쫓기는 신세지만, 자신들의 언어와 경험을 믿고 달려갈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의 행동은 주이상스라고 할 수도 있다.) 이른바 권력을 가진 자,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자들이 통제한 법을 위반하고 자신들의 믿음을 행한다는 점에서 [안티고네]가 떠오르기도 한다. 법 보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이를 구해야 한다는 믿음이 더 우선하는 모습. ([안티고네]를 이런 식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위해 기존의 법체계에 도전한다는 점에선 역시 닮아 있다.)

소통은 실패하고 이들은 질서를 위협하는 정신병자-지명수배자가 된다. 세균보균자라는 말은 괴물병원균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통제권을 위협하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재해석할 수 있다.

#(새로운)가족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거의 마지막 장면. 현서(고아성)와 같이 숨어 지내던 세진(?)을 구출한 후, 강두(송강호)는 처음엔 현서만 챙기지만 괴물을 죽인 후엔 현서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세진에게 가서 깨운다. 그러며 하는 말: “우리 현서와 같이 있었니?”(조금은 다를 수도 있음;;;)

이 말을 한 후 강두는 세진을 껴안고 가는데, 마지막 장면은 강두와 세진이 가족처럼 지내는 모습이다. 이 장면.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이 장면이 좋았다. 비록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이른바 “정상가족”이라는 환상을 깨는 구성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가족구성을 상상하고 있다. 현서와 같이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유만으로 혈연과는 상관없이 구성하는 가족. 하지만 바로 이런 지점이 꽤나 꺼림칙한 지점이기도 하다.

#’괴물’스런 “엄마”
기사 둘:
“스크린, ‘엄마’가 가고 ‘아빠’가 온다”
“괴물, ‘소시민 아버지들’에 바치는 봉준호의 찬사”

지금부터의 느낌은 “오바”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이 글을 어제 시작했음에도 지금 마무리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의 해석이 과도한 “오버”일 수도 있음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적는 건, 지금은 이런 식의 느낌도 가졌다는 루인의 소소한 메모라고 여기기 때문.

공포영화를 조금이라도 즐긴 사람은 알겠지만 공포의 핵심은 익숙한 것이 낯설게 돌변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한국에서 학교를 소재로 한 공포물이 많은 것도 그렇고 “엄마”가 괴물로 돌변하는 모습을 취하는 것도 그렇다. “어머니”는 성스럽지만 그만큼 억압으로서, 괴기한 모습을 취한다. [괴물]과 놀며 느낀 지점은, 부재하는 “엄마”와 어느 날 낯설게 돌아온 “엄마”, 도망쳤다가 어느 날 돌연변이로 돌아온 “엄마”-괴물의 형상화였다.

불현듯 이런 몸앓이를 한 것은 위에 링크한 두 개의 기사 덕분이다. 영화에서 현서가 태어나자마자 도망친 “엄마”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성과 모성을 경쟁-대립 구도로 쓰는 기사엔 당혹스러웠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처럼 “남자는 약하지만 아버지는 강하다”는 말로 단순하게 치환할 수 있기에 부성과 모성을 경쟁-대립구도로 몰고 가는 것이 웃긴 일일 수도 있다. 작년 한 해 “엄마”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제 “아버지가 회귀”하고 있다는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부성과 모성이, “아빠”와 “엄마”가 동일한 방식으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마지막에 가서야 괴물에게 잡아먹힌 현서와 세진을, 강두는 괴물의 입에서 꺼내는데, 이 모습이 일종의 새로운 출생-죽음을 지나온 새로운 삶으로 다가왔다. 괴물의 입에서 꺼내는 모습은 출산의 장면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강두가 세진을 깨워, 안고 가는 장면에서 현서와 세진의 모습은 겹치며 닮았다고-쌍둥이라고 느꼈다. 사람 얼굴 기억을 잘 못하는 루인으로선 특히 더 심했다. 둘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는 것인지 겹친 것인지 헷갈렸고 순간적으로 쌍둥인가 했다.

이 지점에서 괴물은 현서를 낳자마자 도망친 “엄마”가 돌아온 것으로, 괴물의 죽음은 “모성”도 없으면서 아이가 다 크니까 나타난 “엄마”를 처단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건, 시선을 가진 “여성”은 모두 죽이고, 살인이 추억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그린 전작 [살인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IMF 이후 “아빠, 힘내세요”를 전국민의 응원가처럼 부르고 “여성의 취업이 증가하니까 남성들의 취업이 더욱 힘들다”는 식의 언설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대놓고 이렇게 말하진 않는다 해도 변형한 형태의 언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지금의 상황에서 [괴물]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아버지”의 회귀로 해석하는 것은 정말로 이 영화의 바람인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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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기고 있는 영화라는 느낌이다. 아직도 뭐라 할 수 없는 불편함과 지금까지 적은 것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음을 느끼고 있다. 다시 볼까? 하지만 굳이 또 극장에서 볼 필요가 있을까? 어둠의 경로로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기간에 보는 것보다는 일정 시간을 두고 보는 것이 더 좋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