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에서 외장형 저장장치로

지난 주말 학교에서 노트북을 빌려 玄牝에서 잠시 사용했다. 하지만 잠깐 사용하다가 관뒀는데 불편함 때문이다. 그냥 좀 더 피곤한 느낌이랄까. 뭐 요즘 농담처럼, CD 드라이버 필요 없으니 50만 원대 100기가 용량의 노트북이면 딱 좋겠다고 말하곤 있지만 그다지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 어차피 논문을 쓸 때까지, 아니 논문 초고도 볼펜으로 쓸 상황에서 노트북이 얼마나 필요한지도 의문.

여기서 남은 선택은 두 가지 정도인데, 하나는 나스타샤를 고치는 것. 다행히 두 개의 드라이브로 나눈 상태라 파일 손실은 적을 것 같다. 얼마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긴 하지만.

다른 선택은 외장형 HDD와 외장형 RW. RW는 노트북을 사도 어차피 사야하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외장형 HDD는 300G의 가격이 루인이 상상했던 것보다 싸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셈이다. 만약 둘 다를 구매한다면 노트북이 필요 없는 셈.

그러니까 문제는, 외장형 HDD와 RW가 쓸만한가 이다. 당장 살 예정은 아니지만(몇 달 걸릴지 모른다는 얘기다 ㅡ_ㅡ;;;) 몇 해 전엔 비추였던 흔적이 몸에 있어서 쉽게 결정을 못하고 있다. 어떡할까나. 역시나 병원에 가는 것이 최고일까.

[책]남자도 여자도 아닌 히즈라

제목: 남자도 여자도 아닌 히즈라 Neither Man Nor Woman: The Hijras of India
저자: 세레나 난다 Serena Nanda /김경학 옮김
발행처: 서울: 한계레신문사
발행일: 1998년 09월 04일

교보의 책 소개(출처는 여기):
여장을 하고 여성처럼 행동하는 남성들로 구성된 인도의 종교적 색채를 띤 공동체인 히즈라를 설명한 책. 4명의 히즈라의 인생사를 소개하여 히즈라 집단에 가 입하게 된 동기, 집단의 사회와 문화적 규범과 가족관계 등을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조명했다.

#루인의 설명
대개 “여성”과 “남성”이 전부가 아니라는 설명을 할 때, 주로 드는 예(!)가 트랜스/젠더, 사방지, 간성(흔히 “양성구유”란 표현을 쓰는데 상당히 문제가 많은 표현이다), 인도의 히즈라 등이다. 이들 존재는 젠더 다양성을 위한 도구로서 환원하는 지식의 수단이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설명 방식 자체를 바꾸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 자리엔 없겠지만 동성애 문제도 있죠”란 말처럼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끌어들이지만 언제나 자신의 주변엔 없는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존재들이다.
물론 “그들”은 당신 바로 옆에 있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지식의 도구로 주로 소환하는 히즈라에 대해 쓴 인류학적 보고서이다. 물론 저자 역시 히즈라들을 대상화하는 경향에 불편함을 안겨준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고느낀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 책을 분류한 루인의 방식. 루인은 이 책을 “트랜스”로 분류했지만 이 책을 이런 식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히즈라는 엄연히 트랜스/젠더와 다르다. 트랜스 자체가 미국 등의 서구에서 발생한 의미이고 한국에서 트랜스를 소비하는 이미지 또한 다른데 히즈라를 트랜스로 분류한다는 건, 폭력적인 만행이다. 그렇다고 젠더나 퀴어(이반)로 분류하기도 애매에서 ‘임시적 분류’란 측면에서 그냥 두기로 한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다양한 젠더 정체성의 하나로 상상할 순 있어도 히즈라를 트랜스/젠더로 환원해서 설명해선 안 된다는 점.
이런 점을 유의한다면, 이 책은 또 다른 상상력을 줄 수도 있을 듯.

오로라 공주: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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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말하는 리비도는 좁게는 성적 에너지로 말할 수 있지만 감정 작용을 비롯하여 몸에서 작용하는 모든 에너지로 설명할 수도 있다. 누군가와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상대에게 리비도를 투자하는데 이는 거의 매순간 상대방을 떠올리고 감정 노동을 하는 등의 자신의 에너지를 상대에게 투자하는 것을 의미한다. (리비도 투자라고 하면 뭔가 어렵게 느껴지지만 이렇게 풀면 사실 별거 아니다. 지식을 권력화하는 전형이 이렇게 쉬운 걸 어렵게 만드는 것.) 하지만 상대와 헤어지고 나면, 상대에게 투자한 리비도 에너지를 회수하는데, 여기서 애도와 우울증으로 나눈다.

애도(슬픔으로 번역하기도 한다)는 상대에게 투자한 에너지를 회수하고 충분히 슬퍼함으로서 다시 새로운 관계를 엮어 갈 수 있는 방식이다. 이제는 남이라는 걸 깨닫고 상대에게 투자한 에너지를 모두 거두어들인다. 다만 이런 분리의 과정, 상대에게 투자한 에너지를 거두어들이는 과정의 고통이 슬픔으로 드러난다.

우울증은 헤어진 것까진 애도와 비슷하지만 이후의 과정이 다르다. 우울증은 상대에게 투자하는 에너지를 완전히 회수하지 못하고 상대와 자신을 완전히 분리하지 못함으로서 상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상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자신의 자아는 초자아가 되고 상대는 자아가 됨으로서 초자아가 자아를 억압하고 비난하거나 괴롭히는 것이 우울증이다. 이 과정에서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비난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림으로서 우울증은 치유하기 힘들다. 이유 없는 우울은 이런 식으로 설명이 가능할 듯.

이상은 지난 2006여이연여름강좌 중 “처음 만나는 정신분석2”에서 배운 내용을 루인 식으로 해석한 것. 그러니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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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다. 펑펑 울고 싶고 엉엉 울면서 무언가 막힌 것을 풀고 싶은 날. 그런 날 대체로 영화를 선택하지만 성공적이었던 날은 별로 없었다.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보며 한참을 울었던 흔적이 몸에 있고 만화 및 애니메니션 [별의 목소리]를 즐기며 그러곤 한다([별의 목소리]는 언젠가 글을 쓰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

[오로라 공주]를 즐기며, 극장이 아니라 어두운 사무실에(나스타샤는 아프니까 사무실 컴퓨터로…) 혼자 앉아 즐기길 잘했다고 느낀다. 너무 울어서, 극장에서 봤으면 민망할 뻔 했다. 우는 것 자체가 민망한 게 아니라 우는 소리가 주변 사람들의 관람을 방해할 수 있음이 민망한 것. 수습할 시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울기엔 혼자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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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주디스 버틀러)의 우울증으로 이 글을 시작한 건, [오로라 공주] 영화를 즐긴 이유가, 그 강좌의 “우울증”시간에 이 영화를 분석했기 때문이다. (여이연에서 정신분석 관련 새 책을 기획 중인데 그 책에 이 글도 실릴 것 같다.) 정순정(엄정화 분)이 오민아의 목소리를 내는 장면들이 있는데, 이 장면이 충분히 애도할 수 없어 오민아와 정순정이 우울증으로 동일시한 모습이란 것. 죽은 오민아의 영혼이 정순정의 몸에 들어온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상실한 대상과 동일시한 정순정의 우울증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 강좌의 해석이었다.

하지만 읽기에 따라선 ‘레즈비언’ 관계로도 읽을 수 있다고 느꼈다. 정순정과 오민아의 관계를 단순히 “모녀”관계로만 제한하지 않는다면. 물론 이는 둘의 젠더를 특정한 방식으로 한정한다는 전제에서만 성립 가능하지만. 이런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모성”에서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을 무시하기 때문. 오히려 “모성”이란 환상을 통해 ‘레즈비언’ 관계를 살짝 숨기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듯.

그렇다면 어쨌거나 ‘이성애’ 결혼을 했다가 이혼한 정순정의 우울증은 바로 ‘레즈비언’ 욕망을 억압해서 발생한 우울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억압한 욕망(대상)으로 인해 우울증이 발생할 때, ‘이성애’ “여성”가 억압하는 것은 ‘레즈비언’적 욕망이고 ‘레즈비언’의 억압은 ‘이성애’다. 그래서 진정한 ‘레즈비언’은 우울증 ‘이성애’자고 진정한 ‘이성애’자는 우울증 ‘레즈비언’이다. 이건 버틀러의 설명 방식인데, 버틀러가 ‘레즈비언’이기에 이런 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양성애’나 S/M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 버틀러의 한계다. 트랜스로서 이런 설명을 살짝 비틀면, 트랜스/젠더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의 우울증이야 말로 자신의 트랜스 욕망을 억누르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사회에서 “남성”(혹은 “여성”)이고 싶은데 “여성”(혹은 “남성”)으로 자랐기에 발생한 우울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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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즐길 수 있을까? 글쎄…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