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공주: 우울증

#
프로이트가 말하는 리비도는 좁게는 성적 에너지로 말할 수 있지만 감정 작용을 비롯하여 몸에서 작용하는 모든 에너지로 설명할 수도 있다. 누군가와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상대에게 리비도를 투자하는데 이는 거의 매순간 상대방을 떠올리고 감정 노동을 하는 등의 자신의 에너지를 상대에게 투자하는 것을 의미한다. (리비도 투자라고 하면 뭔가 어렵게 느껴지지만 이렇게 풀면 사실 별거 아니다. 지식을 권력화하는 전형이 이렇게 쉬운 걸 어렵게 만드는 것.) 하지만 상대와 헤어지고 나면, 상대에게 투자한 리비도 에너지를 회수하는데, 여기서 애도와 우울증으로 나눈다.

애도(슬픔으로 번역하기도 한다)는 상대에게 투자한 에너지를 회수하고 충분히 슬퍼함으로서 다시 새로운 관계를 엮어 갈 수 있는 방식이다. 이제는 남이라는 걸 깨닫고 상대에게 투자한 에너지를 모두 거두어들인다. 다만 이런 분리의 과정, 상대에게 투자한 에너지를 거두어들이는 과정의 고통이 슬픔으로 드러난다.

우울증은 헤어진 것까진 애도와 비슷하지만 이후의 과정이 다르다. 우울증은 상대에게 투자하는 에너지를 완전히 회수하지 못하고 상대와 자신을 완전히 분리하지 못함으로서 상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상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자신의 자아는 초자아가 되고 상대는 자아가 됨으로서 초자아가 자아를 억압하고 비난하거나 괴롭히는 것이 우울증이다. 이 과정에서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비난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림으로서 우울증은 치유하기 힘들다. 이유 없는 우울은 이런 식으로 설명이 가능할 듯.

이상은 지난 2006여이연여름강좌 중 “처음 만나는 정신분석2”에서 배운 내용을 루인 식으로 해석한 것. 그러니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

#
그런 날이 있다. 펑펑 울고 싶고 엉엉 울면서 무언가 막힌 것을 풀고 싶은 날. 그런 날 대체로 영화를 선택하지만 성공적이었던 날은 별로 없었다.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보며 한참을 울었던 흔적이 몸에 있고 만화 및 애니메니션 [별의 목소리]를 즐기며 그러곤 한다([별의 목소리]는 언젠가 글을 쓰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

[오로라 공주]를 즐기며, 극장이 아니라 어두운 사무실에(나스타샤는 아프니까 사무실 컴퓨터로…) 혼자 앉아 즐기길 잘했다고 느낀다. 너무 울어서, 극장에서 봤으면 민망할 뻔 했다. 우는 것 자체가 민망한 게 아니라 우는 소리가 주변 사람들의 관람을 방해할 수 있음이 민망한 것. 수습할 시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울기엔 혼자가 좋다.

#
프로이트(와 주디스 버틀러)의 우울증으로 이 글을 시작한 건, [오로라 공주] 영화를 즐긴 이유가, 그 강좌의 “우울증”시간에 이 영화를 분석했기 때문이다. (여이연에서 정신분석 관련 새 책을 기획 중인데 그 책에 이 글도 실릴 것 같다.) 정순정(엄정화 분)이 오민아의 목소리를 내는 장면들이 있는데, 이 장면이 충분히 애도할 수 없어 오민아와 정순정이 우울증으로 동일시한 모습이란 것. 죽은 오민아의 영혼이 정순정의 몸에 들어온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상실한 대상과 동일시한 정순정의 우울증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 강좌의 해석이었다.

하지만 읽기에 따라선 ‘레즈비언’ 관계로도 읽을 수 있다고 느꼈다. 정순정과 오민아의 관계를 단순히 “모녀”관계로만 제한하지 않는다면. 물론 이는 둘의 젠더를 특정한 방식으로 한정한다는 전제에서만 성립 가능하지만. 이런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모성”에서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을 무시하기 때문. 오히려 “모성”이란 환상을 통해 ‘레즈비언’ 관계를 살짝 숨기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듯.

그렇다면 어쨌거나 ‘이성애’ 결혼을 했다가 이혼한 정순정의 우울증은 바로 ‘레즈비언’ 욕망을 억압해서 발생한 우울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억압한 욕망(대상)으로 인해 우울증이 발생할 때, ‘이성애’ “여성”가 억압하는 것은 ‘레즈비언’적 욕망이고 ‘레즈비언’의 억압은 ‘이성애’다. 그래서 진정한 ‘레즈비언’은 우울증 ‘이성애’자고 진정한 ‘이성애’자는 우울증 ‘레즈비언’이다. 이건 버틀러의 설명 방식인데, 버틀러가 ‘레즈비언’이기에 이런 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양성애’나 S/M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 버틀러의 한계다. 트랜스로서 이런 설명을 살짝 비틀면, 트랜스/젠더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의 우울증이야 말로 자신의 트랜스 욕망을 억누르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사회에서 “남성”(혹은 “여성”)이고 싶은데 “여성”(혹은 “남성”)으로 자랐기에 발생한 우울증이라고.

#
또 즐길 수 있을까? 글쎄… 걱정이 앞선다.

“여성”은 트랜스/퀴어 공포(혐오)가 덜하다고?

몇 해전 한 인터넷 클럽에서 읽은 글. 그 클럽의 주인은 “여성”들에 비해 “남성”들이 퀴어(나 트랜스) 공포가 더 심하고 “여성”들은 공포가 별로 없다는 글을 썼었다. 그 글에 한 “남성”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답글을 달자, 글쓴이는 참 드물다면서 놀라고 반가운 반응을 표했다. 당시 루인은 뭐라 할 수 없게 복잡했지만 그냥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빈약한 언어는 뭐라고 할 수 없게 한다.

페미니즘 혹은 여성학 관련 모임 혹은 수업을 매개로한 어떤 자리에서 들은 말. “여성”이 “호모포비아”가 덜한 건, “같은 약자, 타자로서의 감수성 때문이다”란 말을 했었다. 고개는 주억거렸지만 글쎄… 수긍하기 힘들었다.

루인의 편견이겠지만, 그러고 보면 공포에 따른 혐오범죄의 가해자 상당수는 “남성”인 것 ‘같다’. 혹은 그렇게 재현한다. 몇몇 영화를 떠올려도 그렇고 인터넷 등 신문 기사를 통해서도 그런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독 “남성”이 트랜스/이반queer 공포가 더하다는 의미일까?

어제, 여이연 강좌를 마치고 玄牝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맞은편에 앉은 커플의 반응. “여성”젠더처럼 드랙한 사람을 “여성”으로, “남성”젠더처럼 드랙한 사람을 “남성”으로 가정한다면, 멸시의 눈빛은 “여성”에게 있었고 “남성”은 그렇지 않았다. 왜 문제인지 모르는 표정이었을까, 그냥 쿨하고 싶은 표정이었을까, 선망의 표정이었을까, 알 수 없지만 루인이 느낄 수 있을 만큼 드러나게 공포의 혐오를 표하진 않았다.

‘이성애’가족구조에서 자신의 젠더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성을 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엄마”이며 “아빠”에겐 가장 늦게 알린다는 말을 자주 접한다. 그렇다면 “엄마”-“여성”이 트랜스/퀴어들을 향한 혐오가 덜한 걸까. 이런 반응을 단순히 성별 혹은 양성체계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몇 주 전 PD수첩에서 방영한 “나를 정정해달라 -트랜스젠더의 성결정권”을 보면, 호적정정을 신청하기 위한 자리에 “엄마”는 절대 동의하지 않아 나타나지도 않지만 “아빠”는 도장을 가지고 나온다. 이렇게 부모 중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가는 그 사람의 성별이 아니라 일종에 친밀도 혹은 더 자주 얘기를 나눈 관계와 좀 더 관련 있다고 여긴다. 지금의 사회에선 “여성”들이 양육에 더 많은 책임을 강요받는다는 점에서 자식들과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거나 관계를 엮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 뿐이다.

루인의 경험으론 이런 공포에 따른 혐오 반응은 성별/양성에 별 상관없다고 느낀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루인의 몸속에, 몸을 아래위로 훑으면서 공포/혐오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은 이른바 “여성”젠더로 드랙한 이들이다. 이른바 아저씨들은 차라리 심드렁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아예 관심이 없었긴 하지만 별로 그러진 않았다.

“여성”이 “남성”보다 공포와 혐오가 더 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물리적인 폭력과 욕설로 표현하거나 눈빛과 표정으로 표현하는 등의 방식의 차이지 성별에 따라 더하고 덜하다는 식으로 구분할 순 없다. 페미니스트라고 혐오나 공포가 없는 것이 아니고(때로 더 심하고) 마초라고 더 심한 것이 아니다(미국 흑인공동체에서의 경우, 특히 힙합 음악을 듣고 있으면 혐오발화를 상당히 심하게 해서 흑인”남성”들은 혐오가 더 심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가장 절친한 친구 중에 퀴어나 트랜스가 있는 경우도 많다. 어떤 신부는 자신이 ‘동성애’자면서도 설교시간 금지 발화를 하기도 한다).

최근 일련의 경험들에, 예전에 그 클럽에서 읽은 글이 떠올랐다.

성은 젠더, 이름은 트랜스: 여이연 트랜스젠더 강좌

많이 기다렸고 아쉬움이 남는다.

작년 여름 처음으로 여이연 강좌를 들으러 갔을 때, 몇 개의 강좌를 선택하며, 가장 듣고 싶었던 강좌는 “페미니즘이론 2: 젠더gender“였다. 페미니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루인의 경험을 언어로 모색하며 당시 한창 관련 논의를 찾고 있던 와중에 이 강좌를 찾았으니 너무도 기뻤다. 하지만 사람 수가 적어 폐강했었다. 그렇게 아쉬움을 남기며 다른 방향을 모색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은 차라리 잘 된 것일까.

그해 여름이 끝나고 가을, 혼자서 트랜스/젠더 관련 논문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미 지난 시간이었고 겪지 않은 일이기에 뭐라고 하기 힘들지만, 어쩌면 그때 혼자서 시작한 것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 강좌를 들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때 강좌를 듣지 않았고 그래서 언어가 더욱 절실했기에 좀 더 일찍 시작할 수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두 개의 젠더 강좌를 들었다. 지난 6월 말에 있은, “성별 문제, 그 이후”와 이번에 들은 “성은 젠더, 이름은 트랜스”. 이번 강좌를 들으며 어쩌면 작년이 아니라 이번에 들은 것이 더 좋았음을 느꼈는데 그건 1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민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 이미 두 편의 논문을 쓴 상태란 점, 그리고 마냥 새로운 이야기만 들은 건 아니란 점이다. (그리고 그 논문들을 두 분 모두에게 드렸고 코멘트를 받았거나 받을 예정이란 점은 정말 중요한 일!)

강좌를 듣는다는 건 아예 처음 듣는 걸 배우는 즐거움도 있지만 고민하고 있는 주제를 들으며 더욱더 자극 받는 즐거움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미미하나마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고 있는 걸 배울 때 그 즐거움은 배가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 두 개의 강좌가 그랬다. 특히 어제로 끝난 트랜스/젠더 강좌는 아쉬움으로 가득했는데 강좌 내용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다른 강좌들이 5일인데 반해 이 강좌는 3일이란 점 때문이다. 3일이란 아쉬움. 더 많이 듣고 싶고 하루라도 더 듣고 싶은 아쉬움이 남았다.

강좌를 들으며 도움이 되었다면 아직 잘 모르는 부분에 자극을 받았다는 점이랄 수 있겠다. 강좌를 들었다고 ‘알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느낀다. 알 수 있다고 하기 보다는 더 배우고 싶고 알고 싶은 자극을 받는 것이라고 느낀다. 지금까지 산만하게 알던 내용들을 정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앎들 사이에 좀더 수월하게 건널 수 있는 돌을 놓는 것이랄까. 물론 지금까지 모른다고 느꼈던 지점들을 배울 수도 있지만 루인의 경우엔 대체로 이런 편이다. 아예 새로운 걸 배운다고 하기 보다는 흩어진 상태로 몸에 있는 흔적들을 모아서 엮어가는 자극을 받는 것. 이번 강좌는 그런 자극 이상을 받았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사실, 말하기 어렵다. 이렇게 빨리 말할 수 있는 지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오랜 시간 몸에 남아 자극으로 변한다는 점,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