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 치는 밤에: 퀴어와 채식이 겹치는 순간

어제 잠깐 [Run To 루인]에 들어와 댓글을 확인하다 수인님께서 [폭풍우 치는 밤에]가 채식과 관련할 수 있다는 글을 읽고 즐기고 싶은 자극이 온 몸에 돌았다. 사실 예전부터 볼까 갈등했었다. 일본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 그러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귀찮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어둠의 경로를 뒤적이니 아슬아슬하게 받을 수 있었다. (비디오가 없는 상황에서 확인하지 않고 디비디타이틀을 살 수는 없으니까.) 처음엔 끝까지 볼 계획은 아니었다. 요즘 자꾸만 늦게 자는 상황으로 피로했고 눈이 조금 아팠기 때문. 여이연 강좌도 있어서 오전을 조금만 어영부영 보내도 혼자 놀 시간이 없기 때문에 끝까지 다 즐겨야지 보다는 그냥 앞부분만 조금 즐겨야지, 정도였다. 물론 다 즐겼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만큼만 느낄 수 있다란 말, 그다지 동의하고 싶진 않지만 이 애니메이션을 즐기며, 채식 혹은 음식의 정치와 이반/퀴어queer를 동시에 느꼈다. [웰컴 투 동막골]이 채식과 민족주의, 군사주의를 동시에 그리고 있다면 이 애니메이션은 채식과 퀴어를 동시에 다루고 있는 셈.

루인은 염소인 메이보다 늑대인 가브가 더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느꼈는데, 더 많은 갈등 속에 있는 캐릭터고 자신의 권력을 더 많이 성찰하려고 노력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메이는 자신의 채식이 식물에 대한 폭력임을 별로 성찰하지 않지만 가브는 자신의 육식이 메이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킬지를 계속해서 고민한다. 염소고기를 좋아하는데 친구가 염소인 상황. 힘의 논리에서 강자와 약자로 나누자면 가브가 강자일 수 있지만 더 많은 갈등과 성찰은 가브의 몫이다(이 부분이 흥미롭기도 하다). 이런 갈등은 둘이서 도망치는 장면에서 잘 나오는데, 메이가 잠든 사이 가브는 몰래 들쥐 두 마리를 잡아먹고 돌아온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메이는 불쾌함을 표한다. 자신은 어쨌든 싫다고.

이 부분은 사실 가장 큰 딜레마로 다가왔다. 염소의 채식이, 늑대의 육식이 타고난 것일 때, 그렇다면 염소와 늑대가 서로 불편하지 않게 살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마주치고 어려운 문제다. 비슷한 채식주의자들이 아니면 같이 밥 먹으러 가길 꺼려하듯, 육식 혹은 음식을 정치학이 아닌 취향으로 간주하는 이들과 겪는 고민 혹은 갈등이 이 장면에 함축적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폭풍우 치는 밤에]는 이 이상의 성찰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죽을 테니 너라도 살아라는 식의 빤한 부분이 있어서 슬프지만 식상함을 느꼈달까. 흐흐.

이 애니메이션의 짜릿함은 우정으로 포장한 이 둘의 관계가 퀴어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점이 채식 혹은 음식과 겹치면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오직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관계처럼 여기는 염소와 늑대의 우정이 결국 집단을 떠나 도망을 선택할 때, 이 버디무비는 ‘이성애’ 사회에서 결코 사랑할 수 없기에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퀴어들을 다루는 애니메이션으로 다가왔다. 우정과 애정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다는 점에서, 특히 메이와 가브의 관계는 그 경계에서 짜릿함을 준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특히, 가브와 메이가 눈 덮인 산에 올라 지쳐 죽어가기 직전의 한 장면: 가브는 배가 고파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나고 메이는 자신을 잡아먹고 살아 남으라하고 가브는 자신이 늑대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장면. 이 장면에서 순간적으로 가브를 트랜스로 느꼈다. 자신의 몸에 별다른 불편함을 안 느끼지만 주변의 여건이 자신의 느낌을 갈등과 정신병으로 만들 때, 수술을 선택하기도 하는 트랜스들과 늑대라는 이유로 염소와의 우정/애정을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육식의 허기로 고통스러워 자신이 늑대로 태어났음을 원망하는 가브가 겹치며 다가왔다.

뭐, 결론은 뻔하다. 예상할 수 있는 그 내용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애니메이션은 꽤나 흥미롭고 재밌게 다가온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수인님 고마워요^^)

여름, 더위, 우울

더위가 밀려오면 몸이 느슨해진다. 여름에 태어난 사람은 더위를 잘 견디고 겨울에 태어난 사람은 추위를 잘 견딘다는 말을 들은 흔적이 몸에 있다. 하지만 루인은, 루인의 주변 사람들은 그 반대다. 겨울에 태어난 사람들은 추위에 약하고 여름에 태어난 사람들은 더위에 약하고. 더위에도 약하지만 루인이 경험하는 우울증의 상당 시간은 여름이었다. 지금에야 그 시절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구나, 했던 중학생 시절의 첫 우울증도 여름이었고 대체로 여름이 겨울보다 더 심했던 것 같다.

지난 주 들은 “처음 만나는 정신분석2” 강의 내용 몇 가지를 떠올린다. 연애는 부모와의 관계를 반복하는 것이라는 말, 우울증은 대상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고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한, 그 대상을 상실해서 대상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린 자기 학대에 가깝다는 말.

그렇다면, 루인은 왜 루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겐 루인도 관심이 없고 연애란 감정을 감지할 수 있는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도 관심이 없는 걸까. 이른바 우정이라고 말하는 정도의 감정, 물론 친구들마다 나누는 감정의 정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언제나 그 어느 선을 아슬 하게 타고 노는 경향이 있다. 루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겐 괜히 감정을 줬다가 거절당할까 두려워서 무관심한 걸까. 아니면 루인도 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걸까. 어릴 때 부모와는 어떤 관계를 가진 걸까. 어떤 관계가 이런 식으로 일정 이상의 감정에서 도망치도록 하는 걸까. (하지만 꼭 부모 탓일까. 프로이트는 중산층’이성애'”정상”가족의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런 설명에 따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설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틀 중의 하나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재밌기는 하다.)

혹은, 재미있게도, 각별히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닮아 있다. 한글 자음이니셜은 순서만 조금씩 다를 뿐 완전히 똑같다. 예전에 읽은 한 책에선 유전자의 60% 정도가 개인을 결정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런 것도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걸까. 유전자 모양이 이런 자음처럼 생긴 걸까. 혹은 상실한 후 충분히 애도하지 않아서 루인과 동일시한 그 이름이 아직도 예민한 촉수로 감각하는 걸까.

며칠 전부터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감정이 떨어지면서 우울해하고 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정도인 걸 봐선 아직은 무난하게 견딜 만 한가보다. 하지만 요즘 듣고 있는 여이연 강좌는 “안티고네와 주이상스”고 주디스 버틀러를 하다보니 우울증이 자주 등장한다. 우울증은 대상의 상실로 인해 왜 우울한지 조차 알 수 없는 것. 괜찮은 의사를 소개 받아 약물치료라도 받을까 하는 갈등을 살짝 했다. 하지만 우울증 치료제라는 것은 사실 상 감정을 느낄 수 없게 하는 것. 우울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우울도 기쁨도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게 하는 것. 그렇다면 무엇을 치료하는 것일까? 하긴, 약물로 치료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웃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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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조안 W. 스콧 – 젠더와 정치에 대한 몇 가지 성찰

제목: “젠더와 정치에 대한 몇 가지 성찰” [여성과 사회] 13호
저자: 조안 W 스콧Joan W. Scott (배은경 옮김)
발행처: 서울: 창작과비평사
발행일: 2001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도서링크
그나마 도움이 되는 링크

#루인의 설명
: 스콧의 책 [Gender and the Politics of History]에 실린 글의 마지막 장을 번역한 글. 물론 좋은 번역이 아니라서 읽고 있으면 번역문을 번역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페미니즘에서 기존의 젠더 논의가 젠더 자체를 질문하기 보다는 젠더의 효과만을 논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글이다. 즉,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묻기 보다는 그것은 이미 있다고 두고 “남성과 여성은 어떻게 다른가?”와 같은 질문에 머물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젠더가 어떻게 역사적 과정에서 발명한 개념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꽤나 유용하고 재미있는 글이지만, 여전히 ‘이성애’-양성을 중심에 두고 있는 한계는 분명하다. 스콧은 젠더 자체를 질문하고 싶어 하지만 “남자”로 태어나면 반드시 “남성”이 되어야 하고 “여자”로 태어나면 반드시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기존의 가정 자체를 질문하진 않고 있다. 근대 이후 젠더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의미를 지녔는가 하는 지점을 질문하고 있을 뿐이다. 트랜스/젠더 논의와 많은 접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한계로 작동하는 건 바로 이 지점. 이런 한계는 참고문헌을 확인해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한계가 있긴 하지만 스콧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역사를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마구마구 들 정도로 재미있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