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문답을 둘러싼

이틀 전 저녁, 타격받은 몸으로 애드키드님 블로그에 갔다가 비밀문답이란 가공할 위력을 지닌 글을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그냥 심드렁했다. 블로거 이름들만 나와 있고, 그냥 루인이 몇 번 나왔구나 정도로 지나치려 했다. 그러며 댓글에 이른 순간, 헉! “댓글(65)”였던가. [Run To 루인]에선 스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할, 한동안 스팸의 집요한 구애공세에도 이루지 못한 댓글수. 부럽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글에서 볼 수 있던 댓글수를 넘어서는 숫자라서 눌렀다. 오오. 가히 뜨거운 반응. 하고 싶진 않지만 질문내용은 알고 싶은 반응에 으흐흐, 어떻게든 질문 내용을 알아내리라는 오기가 발동. 으하하. 그때부터 구글과 트랙백들을 오갔다.

이름만 적은 곳은 바로바로 창을 닫고 뭔가 부연설명을 덧붙인 곳은 무슨 내용일까 추측하고. 그러면서 얼추 10개 정도를 추측했다. 아니, 49번 이후로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52번은 우연히 한 블로거의 부연설명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다보니 시간 잘 가더라고. 후후-_-;;;

문제는 이후 애드키드님 블로그에만 가면 습관적으로 비밀문답을 확인하고 질문을 찾으려고 서핑을 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qcin님께 도움을 청했다. 질문지를 찾기 보다는 다른 블로거들의 답변을 통해 질문을 유추하는 것이 더 재미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흑흑. 그래서 “불쌍한 중생(=루인)을” 구제해 주십사하고 도움을 청했다. 후후. ←이 웃음은 회심의 웃음. 큭큭. (고마워요! ^^)

그러니까 정말 의외의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메일 확인이 아니면 잘 안 가는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오호호. 그러며 추측과 결과를 비교하니, 대충 80%의 확률. 음… 돗자리 펼칠까? 큭큭.

두 개가 완전 빗나갔는데, 18번은 뭘 예상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의외이고 23번은 자음만 잔뜩 적어둔 곳과 나이순이라고 적은 곳이 있어서 어떻게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질문을 알고 나자, 알 것 같다. 나이순이라고 적은 건, 그렇다면 그 블로거들은 한창 성장기에 있는 사람들? 질문과 나이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연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대충 나이와 키가 비례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대답이었다.

대체로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헤헤. 그리고 조만간에 질문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찾은 곳에서, 질문지를 아예 공개로 올렸더라고.

그것이 아플 줄이야

스스로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믿고 있었나보다. 그래서 아프다고 무겁다고 느끼고 있다.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지식자랑 하는 것과 그것을 통해 변태하고 자신의 위치를 이동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여러 번 느꼈고, 그것과 관련해서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럼에도 기말 논문을 쓰며 글의 흐름과 ‘논리’적인 설득력이 있다면, 사람들이 수긍할 것이며 자신의 위치를 바꿀 것이라고 믿었나보다.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나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아닌 척 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란 말은 그렇게 변했나보다.

한 선생님의 혐오 아닌 듯 혐오인 듯한 발화에 아무렇지 않다고 느꼈다. 분명 당시엔 그랬다. 그래서 곧 만나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나보다. 그것이 지금까지 몸을 무겁게 하고 있다. 다시 연락하기가 망설여지고 있다. 글을 통해서 말하고 있던, 비판하고 있던 바로 그 지점으로 선생님은 말을 했었다.

글을 쓴다는 건 무엇일까. 글쓰기 자체를 회의하진 않는다. 목소리를 찾는 유일한 길이기도 한 글을 어떻게 회의할까. 다만 다시 한 번, 지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그것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이동하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다. 매 순간 아프게 겪는 일이다.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선 트랜스나 이반queer를 말하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질문하지는 않는 방식들. 물론 그 선생님은 지식으로 동원하진 않았다. 아픈 건 글로 소통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는 것이고, 더 아픈 건 글로 소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는 사실이다. 몸이 무겁다.

타격

어제 오후 혹은 초저녁 두려운 몸으로 기다리던 성적을 확인하고 타격을 받았다. 기대했던 점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이 성적을 잘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은 다른 맥락에 있는 루인이기에 [Run To 루인]에 글을 쓸 엄두도 안 났다.

농담처럼 혼자서 떠올리는 말 중에 하나는, 부산집에 가서 ‘이성애’혈연가족을 만나면 1초 반갑고 그 후론 스트레스의 연속이란 것. 얼마간의 과장은 있을지 몰라도 그건 사실에 가깝다. 대학입학하고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좋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이성애’혈연가족과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고 부산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대학을 가려고 한 것도 집에서 떠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

예전에 코끼리와 벼룩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스스로 자기 한계를 설정해서 더 이상 뛰어오르지 못하는 몸 아픈 이야기. 그건 루인의 이야기였다. 자기 한계를 설정하기도 전에 이미 결정 되어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Run To 루인]에 오는 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시려나. 혹은 오프라인으로만 아는 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시려나. 어제 친구와 얘기를 나눴을 때, 친구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예상 밖의 상황.

어릴 때부터 ‘이성애’혈연가족과 생활하며 가장 많이들은 말은 “니가?”였다. 후후. “너 같은 게 할 수 있겠니?”의 줄임말. 푸훗. 무얼 하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의 반응. 주변의 누군가의 칭찬이 없으면 잘한다는 얘길 들을 일도 없었다. 고등학생 때, 그나마 수학이 재미있어서 덤으로 수학 성적이 좋았는데, 그것도 수학담당이었던 담임이 자기보다 잘한다는 허풍 섞인 말을 듣고 나서야 “그래, 그나마 수학은 잘 하는구나”란 얘길 들을 수 있었다. (이런 풍경은 한국의 무슨 일이든 외국에서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외국에서 “인정”해야만 그제야 좋아하고 “진짜”로 믿는 모습.)

뭐, 이런 경험들이 별일 아닐 거라고 믿었다. 어느 날 가슴 아픈 깨달음을 겪기 전 까지는. 어느 날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하는 구나, 다른 사람의 말을 공치사로 듣는구나, 하고. 누군가 루인의 어떤 점을 칭찬해주면 그걸 그냥 아는 사이니까 해주는 말이구나, 했다. 낯선 사람이 말하면 그냥 인사치레구나, 했고. 이 깨달음이 아팠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이건 단순히 자존감 없는 취약함의 자기 불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조차도 믿지 못하고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음이었다. 그것이 아팠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선물에 너무 좋으면서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려워한 이유기도 했다.

자학이라면 하루 종일 할 수 있지만 자기자랑이라곤 평생 못할 것 같았던 루인이 자뻑 모드의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이런 깨달음 속에서 다른 식으로 방향을 모색해보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어제 기대했던 성적이 아님을 확인하고 취약한 기반이 무너지는 걸 느끼면서 다시금 되짚고 있다.

사실 그 성적, 기대했던 정도는 아니지만 예상했던 정도이긴 했다. 아니, 예상보다는 잘 나온 것일까. 어쩌면 그동안 경거망동했던 것에 대한 질책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타격에 어찌할지 몰라 우울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런 모색을 했다. 루인이 한참 부족한 건 루인이 더 잘 안다. 그럼에도 루인의 능력보다 더 많은 걸 기대했던 건, 루인은 최고의 칭찬에 안주하는 타입이 아니라 그것에 자극받아 더 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사실 오만할까봐 살짝 낮춰주는 선생님들이 있는데, 그럴 경우 루인은 좀 휘청거리는 편이다. 그럼에도 오만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몸을 타고 돌았다.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도 한참 부족하면서도 오만함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자중모드? 아니다. 더 신나게 놀면 된다. 아직 부족한 지점을 지적 받은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