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링크: “大法의 성전환자 호적정정 요건“
[양들의 침묵]을 즐기셨나요? 위에 링크한 기사는 읽으셨나요? 뭐, 영화는 안 봤어도 그만이죠. 하지만 그 영화를 이미 즐겼다면, 이 글이 더 재밌다고 느낄지도 모를 일이에요. 그런데, 그 영화를 이미 즐기셨다면 어떻게 즐기셨나요? 어떤 사람은 재밌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무서운 영화는 못 본다면서 안 봤다고 하더라고요. 루인은, 재작년엔가 작년엔가 즐겼더래요. 이 영화를 즐기고픈 계기가 있었거든요.
사람마다 이 영화를 다양하게 해석하겠지만, 루인이 들은 인상적인 해석 3가지(모두 한 사람에게서 전해들은 얘기들이다): 하나, 한 선생님은 이 영화를 엘렉트라 컴플렉스로 읽었다고 했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자신의 욕망이 조디 포스터를 통해 드러난 경우랄까. 특히나 안소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의 손가락이 스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부분이 그런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자극했다고.; 둘, 한 레즈비언은 이 영화를 레즈비언 영화라고 했다. 조디 포스터와 그 동료 사이의 관계가 그려져 있는. 사실 조디 포스터는 레즈비언들이 좋아하는 배우기도. 관련 다큐멘터리가 있을 정도.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런 장면을 찾을 수 있다.; 셋. 한 사람은 지식 윤리학에 대한 영화라고 했다. 지식 윤리학이라고 적으니 쓸데없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아무튼 그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다. 지식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쟁할 수 있는데, 안소니 홉킨스는 자신의 지식을 때로 아주 끔찍하게 사용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좋게만 평가 받거나 홉킨스의 천재성을 칭찬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많은 논쟁거리를 던져준다는 것.
이런 얘기를 듣고서야 그 영화를 즐기고 싶었다. 그전까진 그저 공포영화 정도 이겠거니 했다. 딱히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즐기지도 않으니 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흥미로운 해석이 나올 수 있다면, 한 번 쯤 즐겨도 좋지 않을까 했다(이 문장 자체로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다, 이미 두어 달 전 즈음부터 이와 관련해서 글을 쓰고 싶었지만 미루고 있달까;;). 그래서 즐겼고, 루인에게 이 영화는 어떤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래서 한 동안 저 영화로 다른 사람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주변에 이 영화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대중영화나 흥행영화는 안 본다는 이유로 안 본 사람에서 무서운 영화는 안 본다는 사람, 명절날 텔레비젼에서 방영한-무수한 가위질이 가해졌을 편집으로 봤다는 사람까지. 어찌나 이야기 하고 싶었던지 퀴어 세미나를 할 때, 텍스트로 사용하고 싶었지만, 이 역시 성공하진 않았다.
그럼 루인은 이 영화를 어떻게 읽었냐고? 간단하게 요약하면 트랜스 혐오 영화로 읽었다. 미국 영화에선 세 가지 해선 안 될 코드가 있다고 들었다. 아동학대긍정, ‘동성애’혐오, 인종차별발언이라고. (하지만 최근 개봉했던 [노스 컨츄리]엔 ‘게이’혐오 발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동성애’혐오는 하지 않을지 몰라도, 트랜스들을 향한 엄청난 혐오를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트랜스를 어떤 식으로 인식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 영화는 그래서 정말로 소름끼치는 ‘공포’영화였다.
이 영화를 즐겼다면, 기억하시는지? 범인(고든 혹은 빌)이 트랜스란 사실을. 이건 비밀이 아니다. 영화 중반 즈음부터 단서로 얘기하고 있다. 트랜스가 벌인 살인사건이라고. 트라우마지만 끊임없이 얘기하고 싶었던 이 영화를 한 동안 잊고 있다가 갑자기 떠오른 이유는 위에 링크한 기사를 읽고서다. 기사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신체 외형도 원하는 성에 어울려야 한다.
범법 기록이 없고, 범죄 이용 가능성이 적다는 판단이 정신과 치료로 입증돼야 한다.
란 구절이 나온다. 이 두 구절 모두 신랄하게 비판할 지점이지만(사실 이 기사의 내용 모두가 신랄하게 비판할 지점들이다) 유난히 이 두 구절에서 그 영화가 떠오른 이유는, 범인으로 등장하는 트랜스가 범행을 하는 동기로 “여성”으로서의 신체외형에 어울리지 않고 범법 기록이 있어서 혹은 성격 상 그럴 가능성이 있어서 수술을 거부당했기 때문으로 나온다. 그래서 그런 범죄를 저지른다. 수술이 안 되니 직접 자신을 수술하겠다는 것이다. 성전환 수술을 하는 모든 병원에서 고든(범인)이 성전환 수술을 신청했을 때 거부했다. 신체외형이 “여성”처럼 안 생겼고(도대체 “여성처럼” 생긴 외형은 어떤 외형이야? 그런 것이 있기는 해?) 성격이 난폭하다는 이유에서였다. MTF든 FTM이든 성격이 난폭해선 안 될 이유는 뭐지? 트랜스가 아닌 이들은 성격이 안 난폭해? 혹은 범법기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MTF에게만 적용하는 일이라면 이건 철저하게 ‘이성애’-젠더구조에서 “여성”에게 강요하는 어떤 이미지를 부여한 것일 뿐이지.
트랜스란 존재는 그 자체로 기존의 ‘이성애’-젠더 구조에서 “여성” 혹은 “남성”은 어떨 것이란 환상과 규범/강제가 뒤엉키면서 폭발하는 공간이다. 법적 조건, 의학적 조건 같은 것들은 그 조건에 맞는, 트랜스가 아닌 “여성”/”남성”이 실제로 있기나 한지는 묻지 않으면서 그런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일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분 중에서, “여성” 혹은 “남성”이란 명사를 들었을 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시나요? 만약 어떤 이미지가 있지만 그 이미지를 가지고 사람 많은 곳으로 나가서 그 이미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사람이 몇 이나 되는지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겠죠. 혹, 그런 명사를 들었을 때 아무 이미지가 안 떠오른다 해도 생활 속에서 무심결에 “여자가…”, “남자가…”라는 말을 한 적은 없었는지요.] 영화 [양들의 침묵]은 바로 이 지점에 대한 성찰 없이 트랜스 혐오를 곧 바로 표현하고 있다. 더구나 이 영화가 개봉할 당시는 미국에서도 트랜스들의 운동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던 시기였다. 한국에선 이제야 트랜스 운동이 시작하고 있는 단계다.
사실, 대법원이 법적성별정정을 승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몸이 복잡했다.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성별정정과 관련한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지하지만 반대한다는 루인의 입장처럼, 법/국가를 통한 해결에 반대하는 루인으로선 복잡했다. 좋아하려니 위에 링크한 기사처럼, 법/국가와 의료/국가를 통해 트랜스의 범주가 상당히 좁아지고 그렇다고 성별정정이 필요한 ‘현실’에서 반대할 수도 없는 ‘딜레마’. 성별정정관련 법제화를 반대하는 이유는 법제화를 통해 트랜스 내부의 엄청나게 다양한 범주를 모두 포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정 누군가는 트랜스가 ‘될 수’ 있고 합법적인 몸이 되지만 다른 누군가는 더욱더 “불법의 몸”이 될 수밖에 없다(“불법”이고 때로 “가짜”로 지목될 사람 중엔 루인도 포함한다). 이럴 때 법제화를 지지해야 할까. 지지할 수는 있을까? 현재의 법제화를 트랜스운동단체와 민노당이 같이 작업하고 있지만 법제화 과정에서 타협과 삭제/배제의 과정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작업한다는 걸 느끼고 있는 지점에서 이 “역사적인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비단 이것만이 아니라 모든 운동단체에서 법제화 작업은 배제와 삭제를 염두에 두고 작업한다.)
엉뚱한 결론 같겠지만, 때로 한국에 트랜스운동단체 3개 정도에 연구자가 10명 정도만 있어도 좋겠다는 욕심을 품곤 한다. 많이도 말고 그 정도만 있어도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품는다. 행여나 그런 분은 없겠지만 이곳에 오는 분 중에, 루인이 하는 트랜스로서의 말들이 모든 트랜스를 대표한다거나 유일한 목소리로 여기는 분이 있을까? 트랜스로서 루인의 언어들과 글/말들은 단지 무수하게 많은 트랜스들 중의 하나일 뿐이며, 그것도 수술을 거부한 트랜스들의 목소리 중의 하나일 뿐이다. 수술 혹은 호르몬 투여 중에 있는 트랜스라면 전혀 다른 얘기를 할 것이다. 아, [양들의 침묵]을 다시 즐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