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란하다: 퍼레이드 포기, 수습하기

어제 오후부터 날씨가 장난이 아니다. 비가 오기 전엔 필히 천둥소리가 들리고 어둠과 쌀쌀한 바람이 열어 둔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다. 아, 玄牝 창문 열어두고 왔는데… 으흐흐;;;

퀴어문화축제의 가장 큰 행사의 하나인 퍼레이드 참여를 포기했다. 어제 그렇게 결정했다. 결정하고 잘했다고 느끼고 있다. 이렇게 비 오는 날 퍼레이드 참석이 웬 말이냐. 하지만 참가를 포기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뒷감당 못할 만큼 일을 벌였기에 수습하느라 바쁜 덕분이다. 어제, 한참 갈등하고 있는데, 유령알바를 준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고 월요일 오후에 일을 할 수 있느냐고 하셨고 한다고 했고 퍼레이드 참가 포기를 확정했다. 어쩌겠는가. (포기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드랙을 할 예정이었는데, 마땅한 옷이 없었기 때문이다.-_-;;; 각각으로는 괜찮다고 할 수 있는데 조합을 하면 뭔가 어색한 상황. 푸훗.)

두 편의 기말논문 중, 한 편을 준비 중에 있다. 그 논문 제출 마감 날짜가 먼저기도 하고 루인이 쓰려고 하는 혹은 쓸 예정인 석사논문 주제와 가장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시작할 때 엄청난 욕심을 부렸다. 루인의 평소 속도에 비추어 무리일 만큼의 참고문헌을 준비했고 그렇게 매일 조금씩 참고할 문헌과 그렇지 않을 문헌을 고르는데 일정 시간을 들였다. 그러며 느끼고 있다.

일전에, 한 사람이, 방학 때 읽은 책이 그 다음 학기에 쓰는 리포트의 질을 결정한다고 얘기했던 적이 있다. 그땐 그냥 흘려들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 돌이키면,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낀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참고문헌들은 모두 과거에 읽은 글들이 대부분이다. (당연히 새로 읽고 있고 그때와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선 모두가 처음 읽는 글이기도 하다.) 이번을 위해 처음 읽는 글은 별로 없다. 평소에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란 얘기기도 하다. 과거의 행동이 현재의 어떤 지점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얘기기도 하다. 이렇게 느끼고 있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들은 수업 중에서 별로라고 느낀 수업은 없는 것 같다. 같은 수업을 들은 다른 사람은 수업이 너무 별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루인은 모든 수업이 괜찮았다. 그 수업에 어떤 식으로 참가하느냐의 문제다. 따지고 보면 교수나 강사의 수준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는 수업은 많았다. 그럼에도 그 수업들이 다 괜찮았다고 느끼는 건, 그런 와중에도 배울 내용이 있고 루인이 각각의 수업을 재밌게 참여했기 때문이다. 논문을 쓰는 것도 그렇지만 수업을 통해 교수나 강사가 해줄 수 있는 건 매우 적다고 느낀다.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 루인은 정말 재미있게 들은 수업을 다른 사람은 재미없고 별로라고 말하는 수업이 몇 있는데, 사실 그 수업은 토론 중심인 수업이었고 그래서 토론에 얼마나 참여하느냐가 수업의 ‘질’을 결정했다.

지금 참고하거나 다시 불러들이고 있는 글들은 상당수가 작년부터 읽어 온 글들이다. 그 전에 읽은 글은 이미 루인의 몸과 겹쳐서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호한 상태다. 그나마 작년에 읽은 글을 불러들인 건, 참고문헌 목록에 올릴 책이나 논문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불러들인 논문 중엔 그냥 루인 혼자의 즐거움을 위해 읽은 논문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선, 이미 그 전에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이건 비단 논문이나 수업보고서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른바 수필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얼마만큼 하고 있느냐가, 그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논문 쓰기는 주제를 잡으면 그때부터 관련 글을 찾아서 읽는 것이 아니라 주제를 구성하는 단계, 혹은 그 이전 단계부터 읽은 글을 바탕으로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평소의 고민이 참고문헌을 얼마나 찾을 수 있게 하느냐에 상당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 학부 시절 조발표 준비를 하다보면 이런 경향은 자명한 듯이 나타났다. 주제를 정하고 이틀 뒤에 만났을 때, 10편 이상을 찾아오는 사람, 서너 편 찾아오는 사람, 한 편도 안 찾아 와선 자료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 토론 과정에서 하는 얘기도 이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게 참고문헌을 정하고 정리하고 전체적인 개요에 따라 재배치하다보니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이미 초고를 쓰고 있을 시간이지만 아마 초고는 내일부터 쓸 것 같다. 그리고 월요일 알바. 화요일 수업. 수요일부터 또 한 편의 논문을 시작해야 한다. 다행인 것은 두 번째 논문은 좀 수월할 것 같다. 주제가 ‘쉽다’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논문을 바탕으로 다른 논의를 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평소의 고민과 수업 시간에 읽은 논문을 결합해서 얘기를 만들 예정인 두 번째 논문은, 토대를 이루는 한 편의 논문이 있기 때문이다. 그 논문을 어떻게 가지고 노느냐가 관건이다. 뭐, 어떻게 놀긴 어떻게 놀아, 그냥 신나게 노는 거지. 흐흐.

심란하게도 비가 내리고 천둥소리에 조금 무섭고 바람이 차다. Enigma의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좋다.

그냥

뭔가를 쓰고 싶었는데, 몸이 어딘가로 가버렸다. 그렇다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루인은 누구일까. 하지만 몸은 여럿이라고 고민하고 있다. 하나의 몸과 하나의 정체성만 가지는 것이 아니듯 몸과 몸이 일치하는 것도 아니듯 지금처럼 몸과 몸이 따로 노는 경우도 많다. 흐리다. 그렇다는 얘기다. 갑작스레 비가 내렸고 선선한 바람이 불자 몸은 여럿이로 흩어져서 따로 떠다니고 있다.

넌, 어디로 가고 있니
그러는 넌 어디로 가고 있니?
하지만 네가 가는 곳과 네가 가는 곳이 이렇게 다를 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즐거운 논문을 쓰고 있다. 학기말 논문을 쓰기 위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뭔가를 하고 싶은 얘기들이 있었는데, 그 얘기들이 어딘가로 사라졌고 하고 싶은 말을 잃었고 그래서 방황하고 있다. 넌 어디로 갔니? 그런데 어디서 잘 지내고 있니?

몸 떠난 말과 몸에서 사라진 말과 몸에서 맴돌고 있는 말과… 말과 말이 부딪히고 충돌해서 흩어지면, 이렇게 주절거림만 남나 보다.

“19년 만에 돌아온 슈퍼맨은 게이?”

2006.06.06. 연합뉴스 “19년 만에 돌아온 슈퍼맨은 게이?”

이 기사를 읽고, 개봉하면 챙겨서 읽고 싶어졌다. 푸훗. 예전에, 배트맨과 캣우먼이 이반queer 관계라고 해서, 읽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히히, 슈퍼맨과 같은 종류의 영웅담 영화를 싫어하지만, 이번엔, 개봉하면 즐길까?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