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글을 시작하는 건, 어제 강의가 준 복잡한 감정들 때문이다. 한 편으론 너무너무 좋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아팠기 때문이다. 이 아픔도 복잡하다.
우선, 좋았던 일들. 사실 대체로 좋았기에 뭐가 두드러지게 더 좋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부러웠던 건,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 ‘레즈비언’이 쓴 ‘레즈비언’ 학위 논문이 있다는 것, 등등. 무엇보다 의견이 일치하든 안 하든 커뮤니티를 꾸리고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너무도. 그 부러움은 박통이, 트랜스젠더는 아직 커뮤니티가 없다는 말을 듣고 더 심해졌다. 아직 커뮤니티를 만들만큼 사람이 없는 걸까? 아니다. 사람은 많다. 커뮤니티를 만드는 건 사람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커뮤니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카페(인터넷 카페 말고)는 있다. ‘레즈비언’ 커뮤니티인 예전의 끼리끼리(지금의 한국레즈비언상담소)도 4명인가로 시작했다고 알고 있다. 사람 수가 문제가 아니다. 계기의 문제이지.
1970년대 있었던 택시운전사면서 ‘레즈비언’들의 모임에서 트랜스가 있었다는 얘기는 놀라운 정보. 왜냐면 ‘레즈비언’ 단체/활동가들이 그 모임을 설명할 때면 항상 ‘레즈비언’ 모임이었다고만 쓰지 트랜스가 있었다는 얘긴 안 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해석에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은 루인의 바보 같음이 드러난 순간이기도.
지겨움의 문제도 몸에 팍팍 와 닿는 얘기였다. ‘레즈비언’ 관련 글을 청탁 받을 때면 종종 “레즈비언의 이중 억압”을 쓰게 될 때가 있다고 한다. 사실, 쓰는 사람의 입장에선 ‘지겹다.’ 다른 할 얘기 얼마나 많은데, 언젯적 논의를 지금 또 청탁 하냐고. (제발 직접 찾아서 공부 좀 하라고!!!) 그런데 아는 사람(‘이성애’자)이 그 글을 읽고, 아직도 “이중 억압”과 관련한 글을 쓰느냐고, 지겹다고 말했다고 한다. 발끈. 물론 글을 쓰는 당사자도 ‘지겹지만’ 당사자의 지겨움과 그 말을 듣는 사람의 지겨움은 다른 내용이다. (루인의 경우) 세미나를 할 때면, 몇 주 전 혹은 바로 전 주에 한 얘기를 다시 할 때가 있다. 트랜스나 이반queer 얘기일 때, 특히 그렇다. 가장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용어얘기만 몇 번인가를 말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모른다.’ 하지만 지겨워한다. 며칠 전, 석사학위 논문을 트랜스/젠더/섹슈얼리티/이반으로 할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하지만 용어 설명으로 글을 시작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국내에 트랜스젠더/성전환자 관련 학위 논문은 두 편 혹은 세 편 가량(제목 검색으론 더 나오지만 루인의 기준으로는 두 세 편정도). 하지만 이 논문들 모두 트랜스젠더란 무엇인가, 원인은, 등등의 ‘지겨운’ 얘기로 시작하고 있다. 사실 더 놀라운 건, 논문 제목은 분명 트랜스젠더인데 참고문헌에 트랜스 이론 논문이나 책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 거의 유일한 트랜스젠더 참고문헌은 김비의 책과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트랜스관련 설명글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해야 하는 거, 지겹지만 동시에 안 할 수도 없다. 혼자 있을 때조차 젠더를 경험하거니와 몇 년 혹은 몇 십 년을 반복해서 얘기해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또 같은 얘기 안 할 수가 있겠느냐고. 그래서 상대방의 “지겹다”는 얘기는 분노를 일게 한다. 당사자의 ‘지겨움’과 주변 사람들의 지겨움은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아픔은 복잡하게 찾아왔다.
얘기를 하는 와중에, 자기혐오 얘기를 했다. 한 20년은 “레즈비언”으로 살았다고 추측하는데, 그럼에도 ‘레즈비언’들이 미팅을 할 예정이란 식의 얘기는 못 듣는다는 말, 아직도 (루인식으로 표현하면) 자기혐오가 있다는 말에 아팠다. 루인 역시 자기혐오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커밍아웃을 했음에도 트랜스 얘길 할 때면 많이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특히 전공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는 얘기가 나올 때면, 더 심해진다. 이런 지점들이 있다(이 지점은 [메종 드 히미코]에서 끝내주게 그리고 있다). 이른바 “호모포비아”와는 다른 자기혐오. 그 혐오를 매일 같이 경험하고 있기에 아프게 다가왔다.
이와는 다른 아픔이 있었다. 이른바 ‘레즈비언’ 페미니즘과 트랜스 사이의 갈등. 아니 갈등이라기보다는 몇몇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이 보여준 트랜스 혐오 발언들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겠지. 본인은 트랜스포비아가 아니라고 했지만 루인은 의심하고 있다. 박통은 한채윤씨를 제외하면 한국 ‘레즈비언’ 중 자기보다 트랜스젠더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MTF든 FTM이든 트랜스들과 상담을 자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상담을 자주 하고 잘 하는 것과 포비아가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본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양성애나 트랜스젠더를 “침입자”로 간주하는 마지막 발언은 아팠다. 불편했다. 그러며 기대한다. 나중에 박통이 바라는 공동체를 꾸리고 루인이 석사학위 논문을 트랜스/젠더로 쓰고, 어떻게 트랜스 커뮤니티가 생겼을 때, 신나는 논쟁이 생기길.
이런 바람이 헛되리라 몸앓지 않는다. 박통은 한국에선 ‘레즈비언’과 트랜스젠더 사이의 갈등이 없고 그건 미국에서의 일이라고 했지만, 루인은 어제 바로 그런 말을 하는 자리에서 갈등을 느꼈다. 한국에 ‘레즈비언’과 트랜스 사이의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트랜스들의 커뮤니티가 ‘부족’하기에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대체로 즐거운 자리였다. 단, 여성철학을 공부한다는 질문자, 매우 싫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자기 멋대로 재단하는 권력이라니. 자기가 바라는 식으로 짜 맞추려는 폭력이라니. 그 사람은 너무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