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랑 종이 매체 발간

2006.03.25. 저녁, 이랑의 두 번째 종이매체를 발간했다. 늦은 시간까지 시간이 되는 이랑들이 모여 열심히 인쇄한 종이를 분류하고 스템플러로 찍고 테이프로 붙이고 깔끔하게 정리하고, 이렇게 해서 두 번째 종이책이 나왔다.

작년, 2005년 9월 20일 이후 6개월 만이다. 그때도 종이책이었다. 달라진 점은 판형이 커졌다는 거? 그땐 A4지를 절반으로 접은 모습이었지만, 이번엔 B5로 찍었다. 표지 합해서 총 15장. 인쇄소에 맡길 돈이 없이 직접 프린트하고 호치키스를 직접 찍고, 그 흔적이 보기 안 좋으니 종이테이프로 직접 붙이고. 그렇기에 더욱 애정이 간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루인의 글 중, 사실 별로 안 좋아하는 그래서 싣고 싶지 않은 글이 실리기도 한 것. 어떤 글을 실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적었던 점은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건 이후 매체 발간에서 얘기하고 고쳐가야 할 지점이다. 그래도 매체는 예쁘게 나왔다. 담엔 좀 더 멋진 모습으로 나올 수 있을까.

4명이서 인쇄 작업과 마무리 작업을 끝내고, 사장님♡은 일이 있어 먼저 가서, 셋(쑥, 청연의꿈, 루인)이서 뒷풀이 아닌 뒷풀이 자리를 가졌다. 밤이 늦었고 밥 먹을 곳을 찾다가 마땅찮아 술자리를 가졌다. 뭐, 루인이야 술을 안 마시니 물을 마셨지만. 헤헤.

자리를 파하고 돌아오니 이미 한참 늦은 시간. 수업 준비를 위해 읽을 책이 있었지만 읽기엔 완성한 매체를 다시 들여다보느라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새벽, 속 쓰림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신경성 위염인가 보다. 대학원 수업의 즐거움과는 별도로 텍스트를 읽어야 하는 강박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루인처럼 글 읽는 속도가 느림 사람에겐 두 개의 수업에서 요구하는 읽을거리가 너무 많아요ㅠ_ㅠ) 인쇄하는 중에도 책을 읽었는데, 이렇게 신경을 쓰다보니 결국 신경성 위염으로 위산이 입으로 넘어오는 상황이 되었다. 아침도 저녁도 부담 없는 죽으로 해결했다. 지금도 속이 쓰린 상황이지만 그리 심한 건 아니다. 작년엔 거의 이틀간을 위산이 넘어와서 고생했다지.

아무튼 이젠 내일 제출할 발제문을 써야 한다. 부담 없는 발제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충할 수는 없잖아.

#참, 책 분양은 아마 4월 초 즈음!

“차이에 의한 차별을 반대한다”를 반대한다.

심심찮게 “차이에 의한 차별을 반대 한다”와 같은 글을 읽거나 그런 말을 듣는다. 워낙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어 안달하는 시절이다 보니 이런 말 정도는 해야 마치 자신의 “정치적 진보성”을 과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기도 하다. 꼭 그렇지는 않고 보수적이더라도 이 정도 말은 함으로써 적어도 “폭력”에는 반대하는 양식 있는(“인권” 의식 있는?) 사람이라는 어떤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좀 까칠한 상태구나, 싶다. 글에서 티가 팍팍 난다.)

루인은, 이런 언설 모두에 반대 한다. 이런 언설 모두 “차이에 의한 차별”을 하는 사람과 같은 인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차이에 의한 차별을 반대 한다”와 같은 말들 모두, “차이”나 “다름” 자체를 질문하지 않고 “차이에 의한 차별”을 하거나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인식을 하고 있다. “차이”와 “틀림”이 있다는 전제 자체를 인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차이”와 “다름”을 어떻게 발명하는지, 그것이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지속하고 재생산하는지를 질문하지 않는다. 왜 하필 피부색이 머리카락 색깔이나 눈동자 색깔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는지, 외부성기에 의한 젠더가 왜 이렇게 의미를 가지는지, 왜 안경을 쓴 사람은 “장애인”이라고 부르지 않는지, 등등 왜 하필 그런 “차이”를 발명했는지, 이런 과정에서 누가 이득을 보는지,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가지는지 등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고 기존의 “차이”를 당연시 한다는 점에서 불편하다. 그래서 때로 이런 언설은 자신의 기득권을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착각에 빠지기 위한 언설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하다(물론, 이런 의심은 “누가” 이런 말을 하느냐에 따라 맥락으로 이해할 문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은 언어도 아니지만, 특권화한 언설이라는 점에서 조롱거리일 뿐이다.)

물론 “차이에 의한 차별에 반대 한다”는 말의 효용을 모르는 건 아니다. “장애인”차별, 이반queer차별, 트랜스차별 등, 무수한 차별이 횡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언설과 이런 언설을 통한 정책 변화가 분명 일정 정도의 효과를 가지지만, 기존의 사회제도가 바라는 전제를 그대로 안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고 몸앓는다.

“차이” 자체를 질문하지 “차이”를 전제한 “차별에 반대”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는 모두 똑같은 인간이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이런 언설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언설은 애시 당초 질문 자체를 봉쇄하고 모두를 침묵케 하는 효과를 가진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