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성영화제-우피스매니아

음하하.

아침 10시에 있는 수업을 마치고 곧장 사무실에 있는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몸으로 우피스매니아를 구매하러 갔는데, 살 수 있었다!!! 음하하. 이리하여 작년에 이어 올해도 서울여성영화제는 우피스매니아로 본다. (우피스매니아는 6장 가격으로 9장을 구매할 수 있는 티켓.)

원래 계획은 어제, 볼 영화 일정을 짜는 것이었지만 수업 준비에 신경성 위염으로 그럴 수가 없었다. 우피스매니아는 구매했으니 이젠 영화 고르는 일이 남았고, 감독특별전과 이반 관련 영화 몇 편, 그리고 단편 애니메이션 모음 등을 선택하니, 총 10타임(으로 표시하는 건, 10편이라고 하기엔 중단편의 경우 묶어서 상영하기 때문)이 나왔다. 뭐, 작년에도 대충 이런 상황이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이 기회가 아니면 접할 수 없기에 망설이지 않고 모두 선택했다(는 건, 우피스매니아로 9타임 결제와는 별도로 한 타임을 더 결제했다는 의미). 몇 해 전부터 봄이 오면 이 시간만을 기대하니, 좋을 따름이다.

아무튼, 신경성 위염 덕분에 오늘 아침은 굶고 점심은 과자 몇 조각 먹고 저녁에야 삶은 고구마와 귤 몇 개를 먹었다. 그러나 지금도 조금은 부담스러운 상태. 내일이면 괜찮아 지겠지?

정치적 올바름이란 조롱거리

“정치적 올바른”이란 말을 자주 접한다. 어떤 사람은 판단 기준으로 사용하겠지만 루인은 이 말을 조롱의 의미로 사용하는 편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안달하네”로. 물론 루인이라고 “정치적 올바른”이란 강박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지만 이 말을 너무너무 싫어한다.

기본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은 언어가 아니다. “올바름”의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이 말은 성립할 수가 없기에, “사진 촬영 금지”란 팻말 옆에서 사진 찍는 것처럼 언어가 아니라 그냥 무의미한 무엇일 뿐이다. 동시에 “정치적”이란 말과 “올바른”이란 말은 애초 양립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정치적”이란 말 자체가 이미 특정 지향을 내포하고 있는데, 어떻게 “올바를” 수가 있겠느냐고.

“정치적 올바른”의 가장 큰 문제는 그로 인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며 말을 한다면 오직 하나의 목소리 밖에 낼 수 없다는 점이다. 모든 언어는 특정 누군가의 경험을 반영할 뿐이기에 필연적으로 다른 누군가의 경험을 배제한다. [Run To 루인]에도 몇 번 적었듯, 어떤 사람은 시각 경험이 없기에 “보다”는 말이 자신의 경험을 배제하지만, 어떤 사람은 시각이 없으면 자신이 존재하는지 조차 알 수 없기에 “보다”는 경험과 삶을 설명하는데 필수적인 언어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의 경험으로 언어를 구성할까?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선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님, 그 집단에서 최고의 “타자”라도 찾아서 그 사람의 경험과 말을 기준으로 삼을까? 인종, 계급, 집단, 나이, 젠더, 섹슈얼리티, 성적 지향 등등의 경계로 해서 무조건 커밍아웃하게 해선 가장 “타자”를 선정하고 그 사람의 말을 사용할까? 이런 발상 자체도 말이 안 되는 코미디지만, ‘장애’인 ‘이성애’ 흑인 남성과 비’장애’인 이반 백인 여성이 있다면 누가 더 “타자”야? “정치적 올바름”이란 말 자체가 성립 불가능하고 실현 불가능한 판타지일 뿐이다. (앞서 말한, “올바름”의 기준이 없는 건 이래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말이 불편한 이유는, 이 말이 특권을 과시하고 싶어 안달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반queer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이반인권운동을 할까? ‘장애’인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장애’인권운동을 할까? 트랜스는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어서 언어를 모색하고 운동을 할까?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한 행동을 하는 건 결국 그럴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어떤 형태로건 기존의 제도에서 이득을 보고 있음을 과시하는 격이다. 물론 “정치적으로 올바르”려고 하는 사람은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언제 의도를 따졌냐고(모든 “의도”는 선하기 때문에 “의도” 따위엔 흥미 없다). 받아들이는 루인으로선 짜증나고 부아가 치민다고.

그리하여 그냥 자신의 위치에서 말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한국인은 미국 흑인 작가의 작품이나 유럽의 백인 작가의 작품에 대해 비평할 수 없느냐면 그렇지도 안잖아.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선 비평이 불가능하지만 한국인이 미국 흑인 작가의 텍스트를 비평하는 건 다른 지역, 다른 맥락으로 살아온 경험을 통해 ‘다른’ 읽기를 할 수 있기에 비평이 가능하다. 어떤 지점에 대해 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성애’ ‘여성’으로서 읽기, ‘레즈비언’ ‘남성’으로 읽기, 트랜스 이반 ‘장애’인으로 읽기 등등. 관건은 이런 해석을 유일한 해석으로 간주하며 다른 해석을 “틀렸다”고 매도하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 이렇게 읽을 때에야 비로소 대화가 가능하고 다양한 목소리가 가능하다고 몸앓는다. “정치적 올바름”은 본질주의이기에 개개인을 변할 수 없는 존재가 화석화하고 그 사람의 경험을 절대적으로 간주하여 대화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이랑 종이 매체 발간

2006.03.25. 저녁, 이랑의 두 번째 종이매체를 발간했다. 늦은 시간까지 시간이 되는 이랑들이 모여 열심히 인쇄한 종이를 분류하고 스템플러로 찍고 테이프로 붙이고 깔끔하게 정리하고, 이렇게 해서 두 번째 종이책이 나왔다.

작년, 2005년 9월 20일 이후 6개월 만이다. 그때도 종이책이었다. 달라진 점은 판형이 커졌다는 거? 그땐 A4지를 절반으로 접은 모습이었지만, 이번엔 B5로 찍었다. 표지 합해서 총 15장. 인쇄소에 맡길 돈이 없이 직접 프린트하고 호치키스를 직접 찍고, 그 흔적이 보기 안 좋으니 종이테이프로 직접 붙이고. 그렇기에 더욱 애정이 간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루인의 글 중, 사실 별로 안 좋아하는 그래서 싣고 싶지 않은 글이 실리기도 한 것. 어떤 글을 실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적었던 점은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건 이후 매체 발간에서 얘기하고 고쳐가야 할 지점이다. 그래도 매체는 예쁘게 나왔다. 담엔 좀 더 멋진 모습으로 나올 수 있을까.

4명이서 인쇄 작업과 마무리 작업을 끝내고, 사장님♡은 일이 있어 먼저 가서, 셋(쑥, 청연의꿈, 루인)이서 뒷풀이 아닌 뒷풀이 자리를 가졌다. 밤이 늦었고 밥 먹을 곳을 찾다가 마땅찮아 술자리를 가졌다. 뭐, 루인이야 술을 안 마시니 물을 마셨지만. 헤헤.

자리를 파하고 돌아오니 이미 한참 늦은 시간. 수업 준비를 위해 읽을 책이 있었지만 읽기엔 완성한 매체를 다시 들여다보느라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새벽, 속 쓰림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신경성 위염인가 보다. 대학원 수업의 즐거움과는 별도로 텍스트를 읽어야 하는 강박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루인처럼 글 읽는 속도가 느림 사람에겐 두 개의 수업에서 요구하는 읽을거리가 너무 많아요ㅠ_ㅠ) 인쇄하는 중에도 책을 읽었는데, 이렇게 신경을 쓰다보니 결국 신경성 위염으로 위산이 입으로 넘어오는 상황이 되었다. 아침도 저녁도 부담 없는 죽으로 해결했다. 지금도 속이 쓰린 상황이지만 그리 심한 건 아니다. 작년엔 거의 이틀간을 위산이 넘어와서 고생했다지.

아무튼 이젠 내일 제출할 발제문을 써야 한다. 부담 없는 발제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충할 수는 없잖아.

#참, 책 분양은 아마 4월 초 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