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전자팔찌, 야간 통금(?) 따위의 당혹스러움

※이 글의 유일한 독자는 루인이에요. 그러니 이 글이 너무너무 불편한 사람도 있을 거예요.

며칠 전, ps의 집에 갔다가 뉴스를 봤다. 나오는 내용이 모두 성범죄(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전자 팔찌를 채워야 한다느니, 야간엔 결코 집 밖으로 나올 수 없게 해야 한다느니, 신상을 동네 주민들에게 공개해야 한다느니. 이런 뉴스를 접하며 경악했다. 이 무슨 짓거리야.

관련 제출 법안들이 모두 당혹스럽지만, 그 중에서도 신상공개는 더 그렇다. 누군가의 신상을 공개하고 그 사람만 조심하면 괜찮은가, 하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성폭력 범죄자는 특정한 누군가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야간 통금도 마찬가지다. 성폭력 사건은 야간에 갑작스런 충동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 사건의 70% 이상이 집에서 발생하고 상당수가 아는 사람에 의해 발생한다. 늦은 밤, 갑작스런 충동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에 의해 발생한다. ‘이성’을 잃은 행동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행동이다. 하지만 위의 기사들, 논조들, 법안들 모두 성폭력과 성폭력범죄자를 특정하고 ‘이상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어서 불편하고 경악스럽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데이트 성폭력, 아내 성폭력과 같은 경우는 언제나 비가시화 되고 말도 안 되는 일이 된다.
법안 제출하는 사람들, 기본 상식도 없는 거야? 지방선거가 다가오니까 일단 생색내기 법안이라도 내려는 거야? (화학적 거세 운운은 코미디며 성폭력만큼이나 폭력적인 인식이다.)

[#M_ +.. | -.. | 거세 운운하는 건, ‘남성’의 성기 중심으로 성폭력 사건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담론은 여전히 “부녀자의 정조” 운운하는 현재의 성폭력특별법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젠더 중심적인 내용으로 성폭력 범죄를 감소시키거나 인식을 전환하는데 별다른 효과가 없다고 몸앓는다._M#]

이렇게 얘기하면, 불편하거나 당황할 사람이 많겠지만, 루인은 성폭력 범죄자 처벌은 몇 십 년의 징역 등의 중형이 아니라 교화라고 몸앓는다. 감옥에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담 등을 통한 감수성의 변화이다.

중학교 때,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은 일을 겪은 후, 그 사람을 죽이고 싶었고 바보 같았던 루인을 저주했고 몇 번 자살을 시도하거나 그런 상태에 시달렸다. 이후, 페미니즘과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주제는 성폭력/특별법 관련이었다. 이렇게 원치 않았음에도 소논문이나 조모임 주제로 쓰거나 맡은 건 성폭력/특별법이었다. 회피하려했던, 너무도 싫었던 주제였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다루었고 그러며 깨달은 건, 루인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 중 하나는 가해자를 고소했을 때, 어떻게 판결이 나든, 나중에 복수하러 오는 것은 아닐까, 였다. 고소 여부와 상관없이 가해자가 또 다시 루인을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였다. 이렇게 언어를 모색하며, 성폭력특별법을 더 강화해서 형벌을 가중한다거나 할 문제가 아니라 성폭력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와 함께 가해자의 인식 변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성의 당연한 권리를 누가 범죄로 만들었냐”, “재수가 없어서(잡혔다)”라는 식의 인식이 만연한 이상, 형벌이 아무리 무거워도 별 소용이 없을 거라 몸앓는다. 더구나 이런 무거운 형벌로 인해, 석방된 후 가해자나 가해자의 가족들이 찾아와 복수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어야 한다면 무거운 형벌이 무슨 소용 있겠냐고. 또한 성폭력에 대한 주변의 인식이 변하지 않고 2차 가해가 일상처럼 행해진다면 법안을 더 만든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더 무서운 건, 1차 가해가 아니라 2차 가해라는 말처럼, 피해 경험자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로 재현하고, 평생 치유할 수 없는 ‘환자’로 간주하는 사회적인 인식-2차 가해를 당연시 하는 분위기 또한 1차 가해 만큼 혹은 그 보다 더 심각한 범죄이다.

그래서 루인이 몸앓았던 건, 좀 달랐다. (노다 마사아키의 [전쟁과 인간]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이건, 루인이 기본적으로 법을 믿지 않고 없을수록 좋다고 믿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구속이 아니라 교화를 통해 가해자가 자신의 가해/폭력을 깨닫고 결국엔 반성폭력 운동가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구속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구속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것이다. 감옥에서 오히려 더 많은 범죄를 배운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구속이라는 법에 의한 처벌이 얼마나 소용이 있겠느냐고. 그것보다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감수성을 성찰하고 자신의 가해가 어떤 폭력인지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일본에는 2차 세계 대전 참전군인들 중에 반전/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반해, 한국엔 월남전 참전군인들 중에 반전/평화운동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오히려 월남전 참전을 사과하려 하면 “참전용사의 명예/인권을 침해했다”며 집회를 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해자의 폭력을 깨닫기는 어렵다. (일전에 [부시의 정신분석]에 관해 쓰며 루인은 가해자의 심리/정신분석에 관심이 많다고 했는데 이런 맥락에서이다.) 성폭력 가해자 역시 마찬가지다. 가해자가 자신의 폭력을 깨닫고 반성폭력운동가가 되는 방향으로 바꿀 수는 없는 걸까. 가해자 뿐 아니라, 가해자를 지지하거나 최소한 묵인하는 사회적인 인식이 동시에 변해야 하는 일이다. 한 친구는 이런 바람이 지나치다고 했지만 국가나 법이 아니라 감수성의 변화를 통한 운동이 더 좋다고 믿는 루인으로선 지금 나오는 기사나 법안들이 불안하고 불편하다.

#가해자의 인권?
성폭력 가해자에 대해 얘기를 하면 쉽게 가해자의 인권을 얘기한다. 절도범이나 길거리에서 난대 없이 폭력을 휘두른 사람 등에겐 이런 얘기가 별로 없지만 성폭력/가정폭력 등에 있어서만은 가해자의 인권 얘기가 나오고 이런 말이 설득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성폭력/가정폭력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가해자의 인권 문제를 말하자면, 당연히 가해자에게도 인권은 있다. 하지만 이때의 인권은 수사 과정에서 부당한 증언을 하지 않을 권리, 고문 받지 않을 권리이지 피해 경험자를 침묵하게 할 권리는 아니다. 가해자의 인권이 피해 경험자를 침묵하게끔 하는 것이라면 그건 인권/권리가 아니라 권력 횡포(폭력)이다.

군대에서 단합하는 방법…?

우선 “최전방 병영서도 `꼭지점 댄스'”기사부터.
특히 재미있는 건 “부대 측은 “꼭지점 댄스는 누구나 따라하기 쉽고 재미있어 이등병부터 부대장까지 하나로 묶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는 말.
여러 날 전엔 군부대 내에서 붕어빵을 파는데 “붕어빵이 대화를 잇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해 선.후임병 간 장벽이 자연스럽게 허물어져 정이 넘치는 병영분위기를 만들고 있다“는 내용을 읽은 적도 있다.

이런 기사들을 읽을 때 마다 느끼는 건, 여전히 군대는 위계질서가 만연하구나, 이다. 도대체 붕어빵으로, 꼭지점 댄스로 장벽이 허물어지고 정이 넘치게 될 리가 없잖아. 얼마나 군대내 폭력이 만연하면 이런 기사를 통해서라도 아닌 척하려는지 안쓰러울 따름이다.

퀴어 오디세이/혐오증/담배연기

어제, 며칠 전 [Run To 루인]에도 쓴, 한국독립영화협회와 카페 ‘빵’에서 함께하는, 2006 퀴어 오디세이에 갔다 왔다. 상영작은 다섯 편. 단편들이었다. [Why not community], [탐폰설명서], [나와 인형놀이], [이반검열], [동백아가씨](영화 [동백꽃] 중의 한 편).

특히 인상적인 작품은 [나와 인형놀이]와 [이반검열].

[나와 인형놀이]는 트랜스와 ‘게이’ 정체성을 가진 이의 이야기. 영화 초반엔 어릴 때, 엄마 옷을 입거나 화장을 하고 인형을 가지고 노는 등, ‘남성’ 에게 요구하는 모습과는 다른, 그래서 흔히 트랜스로 불리는 정체성을 보여주더니 십대가 되면 게이로 나온다. 트랜스 얘기구나 하고 좋다 말았다-_-;; 그렇다고 게이 ‘남성’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정체성 속에서의 혼란스러움을 혼란스럽게 그려서 좋았지만, 살짝 지루했다. 지루함은, 끝났구나, 했는데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였다. (담배연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반검열]은 다큐멘터리라 누군가의 더빙 나레이션이 있을 줄 알았는데, 자원자(이반 청소녀)가 직접 캠코드를 가지고 다니면서 찍고, 자신의 얘기를 하는 방식이었다(일종의 자기 기록이라고 해야 할까). 단 한마디도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모든 말이 아팠다. 이른바 “불량”이라고 재단하는 술, 담배를 하는 청소녀들도 친구와 함께 있다고 해서 뭐라고 안 하는데, 이반이라는 이유로 친구와 함께 있지도 못하게 하고 얘기도 못 나누게 하는 교사들의 혐오증에 소름끼쳤다. 주변에 감시인을 두고 조금만 수상쩍은 행동만 해도 고자질로 인해 교무실에 불려가고,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 중 자주 가는 친구의 집에도 교사가 찾아와선 같이 못 있게 한단다. [이반검열]은 두 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두 번째 편에 나오는 인터뷰에서, 어깨만 부딪혀도 “(레즈와 부딪혀서) 어깨 썩는다”는 말을 들었다는 얘기를 보며 짜부라지는 느낌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함께 있는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야?

혐오증이 가시화되면서 이반queer에 대한 혐오증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 같았다. 차라리 이반이 비가시화 되었을 때가 더 편했는지도 모른다는 몸앓이를 한다. 바보 같은 말이지만 이반, ‘동성애’와 같은 말 자체를 모르던 시기에도 이반은 많았지만 그땐 그냥 친구간의 애정표현으로 간주되었다. 문제는 여전히 있다. 그땐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그냥 친구사이일 뿐이라거나, 한때의 경험일 뿐이라는 식으로 완전히 무시했다면 지금은 더러운 “벌레” 보듯이 대한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어쩌면 이런 반응은 가시화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반 혐오에 의한 범죄가 무수하잖은가. 화장실 앞에서 ‘여자’친구의 가방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이성애’ ‘남성’이 “호모”라고 구타, 살인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건 그만큼 비’이성애’자들이 드러나 있다는 얘기기도 하다. 한국이라고 길거리에서 구타당하고 살인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여자’들끼리 팔짱을 끼고,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이 아직은 한국에서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지지만 언젠간 이런 행동들이 레즈비언으로 간주하고 욕설과 폭력의 원인이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이런 상황이다. 신고해봐야 경찰들에 의해 더 심한 대우를 받을 것을 알기에 그냥 침묵하고 있을 뿐. (군대 내 ‘남성’간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가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말하면 징계없이 제대할 수 있음에도 “죽어도 동성애자라고 말 하기 싫다”며 징계를 받는 현상은 이와 연장선 상에 있는 일이다.)

온 몸이 복잡했다. 아팠고.

#
아픔은 조금 다른 곳에서도 왔다. 담배연기 때문. 카페 ‘빵’은 담배를 필 수 있는 곳인데 루인은 담배 연기와 냄새를 무지무지 싫어한다. 그로인해 영화를 상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아팠다. 집중도는 떨어지고 슬슬 스트레스가 몰려와서, “제발 담배 좀 꺼져요~”, 라고 외치고 싶은 상황이었다. 나중엔 ([이반검열]이 시작할 즈음)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고 매스꺼웠다.

이렇게 적으면, 뭘 그렇게 까지겠느냐고, “오바”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누군가가 루인을 놀린다고 했던 말, “완두콩 공주”처럼 진짜 그렇다-_-;;

[#M_ 완두콩 공주?.. | 크크.. |
서양 동화 중에, 침대 받침대에 완두콩 하나 두고, 매트리스를 일곱 개나 깔았는데 배겨서 잠들지 못했다는 어떤 ‘여성’에 관한 얘기.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음;;;_M#]

루인의 예민함은 특히, 소리다. 그래서 조금만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도 신경이 곤두선다고 할까. 컴퓨터 소리/소음도 거슬려서 못 견디는 편이니까. 일이 있어서 컴퓨터를 켜놓고 잠들면 밤새 잠을 설친다. 크큭. 이런 이유로 담배연기로 가득한 곳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퀴어 영화가 아니었다면 중간에 그냥 나왔을 지도 몰랐다. ‘빵’ 커뮤니티를 찾아가서 금연으로 하면 안 되냐고 말해볼까? 매달 영화제를 한다는데 가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