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로 시작하는 소통/연대

지난주에 쓴 발제문의 일부. 텍스트는 로즈마리 통의 [페미니즘 사상] 중 7장 “복합문화 페미니즘과 전지구적 페미니즘”. 거칠게 요약하면, 복합문화 페미니즘은 젠더뿐만 아니라 인종이나 계급, 성적 지향 등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며, 전지구적 페미니즘은 제 1세계와 제 3세계라는 지역적 격차가 가지는 문제를 동시에 고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구분은, 개인의 정체성은 오직 한 가지로만 구성된다는 가정 하에서만 가능하다. 혹은 자신의 여러 정체성들이 기존의 권력과 갈등하지 않는다는 의미거나.
대한민국국적은 루인이 가진 여러 정체성들 중 하나일 뿐이기에 “붉은 악마”나 월드컵의 집단광기는 루인에게 폭력으로 작동한다. 영화 [청연]의 박경원은 민족, 젠더, 계급 등의 정체성들에 의해 끊임없이 갈등한다. 루인이든 박경원이든 대한민국국적의 정체성이 유일한 정체성이라면 그렇게 갈등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개인의 정체성을 오직 젠더만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젠더 정체성은 무수하게 많은 정체성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복합문화 페미니즘을 각각의 하이픈 페미니즘으로 분류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다.

7장을 읽으며 많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복합문화 페미니즘은 사회의 결속을 해친다”(411쪽)느니 “윤리적 상대주의”의 함축적인 의미는 “‘차이’에 대한 강조로 공통적인 요소들을 하나도 보지 못하게 되어 심지어 의사소통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454쪽)는 식의 해석은 결국 누군가의 기준으로 이야기 하겠다는 욕망의 표현이다. (이런 표현을 들을 때 마다 맑스가 말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란 말을 떠올린다. 도대체 누구를 중심으로 단결하란 말인데. 미국 중산층 백인 ‘남성’ 노동자의 입장으로? 독일 노동자의 입장으로? 오리엔탈리즘을 드러내는 마르크스가 방콕 최하층 노동자의 입장으로 단결하라고 말했을 것 같지는 않다.)

차이의 정치학이 유행하면서 그렇다면 자매애는 없는 것이냐, 운동을 해야 하는데 개인들 이 하나의 소우주처럼 된다면 연대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반론 혹은 반발을 접하곤 한다. 하지만 유사성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차이가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며 이런 차이를 말살하거나 어느 범주에도 들 수 없는 사람은 배제하겠다는 의미이다. (실제 그래왔고 그렇게 하고 있다.)

차이의 정치학에서 차이difference를 말한다는 것은 “우리는 다 다르다”가 아니라 차이를 발명하고 그것이 의미를 가지게끔 하는 ‘관심’difference-권력/해석체계를 문제시 하겠다는 의미이다(루인, 2005, 이랑 블로그에 쓴 글, “차이/관심으로 다시 시작하는 소통과 연대”). 그렇기에 차이를 말하는 순간, 그럼 연대는 불가능하고 자매애는 더 이상 없는 것이냐는 질문은 그 내용 자체를 바꾸어 연대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매애의 내용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한때 페미니즘은 레즈비언을 “맘에 드는 여자를 유인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사냥꾼”으로 간주했기에 당시의 자매애는 이성애 젠더로만 구성했었다. 인종이나 계급 논의가 있기 전에 자매애는 오로지 (두 가지 뿐인) 젠더로만 구성했다. 즉, 당신이 말하는 자매애의 내용은 무엇인지를 되물으며 특정 ‘여성’만을 상상하면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명명하고 자매애를 말하는 것 자체를 문제시 하자는 것이다. 연대 역시 마찬가지다. 연대라는 것은 “우리는 모두 같다”,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해 지지한다는 의미이다. 호주제 폐지에서 이성애 ‘여성’들과 레즈비언 ‘여성’, 게이 ‘남성’들이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은 호주제가 가지는 의미가 모두에게 같았고 같은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 아니라 호주제가 (비록 다른 맥락에서 다른 의미라 해도) 폭력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에 찬성했기에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대를 한다면서 반드시 한 목소리, 같은 내용, 그래서 어떤 반대의견도 용납할 수 없다면 그건 연대가 아니라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횡포다.

그리하여 “복합문화”라는 다중적인 정체성을 말하는 것, “전지구적”이라는 국가/지역의 경계를 말하는 것은 연대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연대 방식에 문제제기 하며 차이를 통해 다시 소통하고 연대를 하자는 것이다.

누구에게 어려운 걸까.

트랜스베스타잇transvestite이란 언어를 듣고 곧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트랜스베스타잇과 크로스드레서cross dresser의 차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트랜스에게 성전환 수술은 기준이 아니며, 트랜스로 정체화하고 있지만 수술 할 의사가 없는 경우도 많다. 트랜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 그전까지 ‘이성애’자였다가 성전환 이후에도 ‘이성애’자인 경우도 있다. 일테면 ‘남성’일 땐 ‘여성’을 좋아하다가 트랜스’여성’일 땐 ‘남성’을 좋아하는 것으로 성전환 후에도 계속해서 같은 성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의미이다. 레즈비언 ‘남성’도 있고 게이 ‘여성’도 있다. 레즈비언이라고 해서 모두가 ‘여성’인 것은 아니며 게이라고 해서 모두가 ‘남성’인 것은 아니다. (아, 물론 게이란 말이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선 ‘동성애’자 모두를 지칭하기도 한다만 이건 여전히 ‘남성’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혐의를 피운다.) 이런 얘기를 하면, 어렵다고 좀 쉽게 말하라는 반응을 접하곤 한다.

일전에도 적었듯이 한국어를 익혀서 동화책 정도만 읽을 수 있는 수준이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글을 욕망한다. 떡 하나 안 줘서 잡아먹고, 빨간 모자 보다 일찍 가서 할머니를 산채로 삼키고, 푸른 수염 몰래 방문을 여니 해골이 가득하고. 동화가 이른바 “청소년 권장도서”보다 더 잔혹하기도 하고, 숨기고 싶은 삶의 측면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동화를 읽고 자랐는데, “청소년 권장도서”니 “세계 명작”이니 하는 소설들엔 이른바 “삶의 추악한 면”이라고 불리는 일을 겪고 충격 받았다는 식의 장면이 나오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동화에서 “세계명작”을 읽을 나이가 되는 순간 동화에서 읽은 내용은 모두 잊어버린다는 얘기야? 그러니 동화를 읽을 수 있는 정도란 건 비하의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욕망이 불가능한 꿈이란 것도 안다. 루인이 쓰는 어떤 언어들은 동화책에서부터 배제되어 때로 죽을 때까지 접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언어이기 때문이다. 혹은 희화화해서 나타나는, 조롱거리로 잊혀지는 장면이거나. 하지만 이런 언어를 알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용이 배배꼬여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언어 혹은 단어만 낯설 뿐이라면 그때부터는 발화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태도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트랜스젠더니 크로스드레서니 하는 언어들을 현학적인 용어 남발로 느끼겠지만 어떤 사람에겐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절실한 언어이다. 트랜스라는 언어를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니 “형이상학”이니 하는 언어와 비슷하게 간주하며 왜 그렇게 어려운 말을 남발하느냐고 말하는 건, 트랜스들의 삶은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개념놀이란 의미이다. (일전에 섹스/젠더/섹슈얼리티의 관계와 관련한 한 강좌에서 강사는 한참을 설명하고선 말을 마치며, 결국은 머리 속에서 가지고 노는 개념놀이죠, 라고 말해서 당황했었다. 강사에겐 이 언어들의 관계가 개념놀이에 불과하겠지만 루인에겐 루인의 삶을 설명하기 위한 절실함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좀더 쉬운 말로 쉽게 설명하라는 요구는, 귀에 거슬리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성찰하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아부하는 언어로 말하라는 태도로 다가온다.

[#M_ +.. | -.. | 트랜스베스타잇과 크로스드레서는 둘 다 이성복장착용자로 번역할 수 있다. 트랜스베스타잇은 이성의 복장을 통해 강한 성적 흥분과 성적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 하는 사람이라면 크로스드레서는 이성의 복장을 입는 것 자체를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구분보다는 트랜스베스타잇이 용어의 태생부터 의료담론에서 병리화하기 위해 만든 언어라면 크로스드레서는 이런 “정신병”/“신경증” 취급하는 의료담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든 언어라는 점이 더 정확한 구분일 것이다.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