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국적은 루인이 가진 여러 정체성들 중 하나일 뿐이기에 “붉은 악마”나 월드컵의 집단광기는 루인에게 폭력으로 작동한다. 영화 [청연]의 박경원은 민족, 젠더, 계급 등의 정체성들에 의해 끊임없이 갈등한다. 루인이든 박경원이든 대한민국국적의 정체성이 유일한 정체성이라면 그렇게 갈등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개인의 정체성을 오직 젠더만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젠더 정체성은 무수하게 많은 정체성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복합문화 페미니즘을 각각의 하이픈 페미니즘으로 분류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다.
7장을 읽으며 많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복합문화 페미니즘은 사회의 결속을 해친다”(411쪽)느니 “윤리적 상대주의”의 함축적인 의미는 “‘차이’에 대한 강조로 공통적인 요소들을 하나도 보지 못하게 되어 심지어 의사소통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454쪽)는 식의 해석은 결국 누군가의 기준으로 이야기 하겠다는 욕망의 표현이다. (이런 표현을 들을 때 마다 맑스가 말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란 말을 떠올린다. 도대체 누구를 중심으로 단결하란 말인데. 미국 중산층 백인 ‘남성’ 노동자의 입장으로? 독일 노동자의 입장으로? 오리엔탈리즘을 드러내는 마르크스가 방콕 최하층 노동자의 입장으로 단결하라고 말했을 것 같지는 않다.)
차이의 정치학이 유행하면서 그렇다면 자매애는 없는 것이냐, 운동을 해야 하는데 개인들 이 하나의 소우주처럼 된다면 연대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반론 혹은 반발을 접하곤 한다. 하지만 유사성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차이가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며 이런 차이를 말살하거나 어느 범주에도 들 수 없는 사람은 배제하겠다는 의미이다. (실제 그래왔고 그렇게 하고 있다.)
차이의 정치학에서 차이difference를 말한다는 것은 “우리는 다 다르다”가 아니라 차이를 발명하고 그것이 의미를 가지게끔 하는 ‘관심’difference-권력/해석체계를 문제시 하겠다는 의미이다(루인, 2005, 이랑 블로그에 쓴 글, “차이/관심으로 다시 시작하는 소통과 연대”). 그렇기에 차이를 말하는 순간, 그럼 연대는 불가능하고 자매애는 더 이상 없는 것이냐는 질문은 그 내용 자체를 바꾸어 연대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매애의 내용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한때 페미니즘은 레즈비언을 “맘에 드는 여자를 유인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사냥꾼”으로 간주했기에 당시의 자매애는 이성애 젠더로만 구성했었다. 인종이나 계급 논의가 있기 전에 자매애는 오로지 (두 가지 뿐인) 젠더로만 구성했다. 즉, 당신이 말하는 자매애의 내용은 무엇인지를 되물으며 특정 ‘여성’만을 상상하면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명명하고 자매애를 말하는 것 자체를 문제시 하자는 것이다. 연대 역시 마찬가지다. 연대라는 것은 “우리는 모두 같다”,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해 지지한다는 의미이다. 호주제 폐지에서 이성애 ‘여성’들과 레즈비언 ‘여성’, 게이 ‘남성’들이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은 호주제가 가지는 의미가 모두에게 같았고 같은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 아니라 호주제가 (비록 다른 맥락에서 다른 의미라 해도) 폭력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에 찬성했기에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대를 한다면서 반드시 한 목소리, 같은 내용, 그래서 어떤 반대의견도 용납할 수 없다면 그건 연대가 아니라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횡포다.
그리하여 “복합문화”라는 다중적인 정체성을 말하는 것, “전지구적”이라는 국가/지역의 경계를 말하는 것은 연대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연대 방식에 문제제기 하며 차이를 통해 다시 소통하고 연대를 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