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트랜스 (1부)

다른 사람들이 동의할 거라 예상하지 않으며 납득시킬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지만, 처음부터 가장 걸렸던 부분은, [왕의 남자]는 ‘동성애’ 영화일 수도 있겠지만,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리티에 관한 영화가 아닐까, 였다. 루인에게 공길은 ‘게이 남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트랜스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이것은 이반/퀴어와 트랜스의 “불편”한 관계에서 출발한다.
(1부 끝-_-;;)

채식을 한다는 것+팁

언젠간 육식을 하겠다면 같이 밥 먹으러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날도 오겠지요.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씩은, 성정체성을 커밍아웃한 사람 앞에서 이반queer/트랜스 혐오적인 발언을 농담이나 유머랍시고 하는 것과 육식하는 자리에 같이 있는 것에 별 차이를 못 느낄 때가 있거든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물론, 루인은 같이 밥 먹고 싶을 만큼 유명인도, 대단한 사람도, 매력적인 인간도 아니니 결국 혼자 밥을 먹겠다는 얘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테고, “고립”을 자처하는 걸 수도 있겠지요(채식을 한다는 말에 “사회생활 어떻게 하려고?”란 얘기를 참 많이도 들었거든요). 혼자 밥 먹는 거야 익숙하거니와 좋아하는 일이니 문제될게 없겠죠. 어려운 건,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론, 채식주의를 얘기하는 건, 페미니즘을 얘기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느껴요. 페미니즘이 옳은 건 알겠는데 그래도 페미니즘 세미나를 하거나 활동 하는 건 싫다는 반응과 채식이 좋은 건 알겠지만 실천하기엔… 하며 말을 줄이는 반응은 너무 닮아 있더라고요. 아, 다른 세계관과의 만남엔 이런 머뭇거림이 따르기 마련이죠. 하지만 채식이 좋은 건지, 옳은 건지는 모르겠어요.

누구랑 밥을 먹느냐가 문제이기도 할 거예요. 어떤 모임은 고기를 구워먹는 자리라도 참석하겠지만 어떤 모임은 사찰음식을 하는 곳이라도 참석하기 싫을 테니까요. 하지만 언젠간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육식을 한다면 함께 밥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날이 올 거란 예감이 들어요.

[#M_ +팁.. | -.. | 작년 어떤 자리에서, 채식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어려워 한다는 얘길 들었어요. 당황했어요. 마치 채식을 한다는 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굶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했거든요. 루인은 이런 고민을 별로 안 했었더래요. 뭐, 다른 이유로 단식을 고민했던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아님, 처음부터 비건vegan이란 “완전” 채식을 지향했기에 그런 건 아닐까 해요. (비건이나 과식果食주의자Fruitarian야 말로 “순수”하고 “완전”한 채식주의자란 말은 당혹스러워요.) 그럴 필요가 뭐 있겠어요. 그냥 처음엔 “붉은 고기”를 안 먹고, 고기 없는 생활이 몸에 익으면 생선을 안 먹고, 하는 식으로 조금씩 바꿔 가면 되죠. 뭐, 6개월 정도 채식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고기가 너무 먹고 싶으면, 먹으면 되죠. 스님이 냉면 그릇 바닥에 고기 깔고 먹는다는 “농담”도 있는데요. 그리곤 다음 날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죠. 정치학을 어떻게 이렇게 가볍게 말 할 수 있느냐고 화낼 수도 있겠지만 뭘 그렇게 어렵게 해요. 그냥 몸이 즐거울 수 있는 방향으로 가볍게 하면 되지. 채식을 한다는 건, 몸의 즐거움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에서 출발하는데(어디까지나 루인의 해석) 몸이 즐겁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 말이 채식은 취향이란 의미는 아니예요. 조금씩, 조금씩 몸이 즐거운 방향으로 실천하는 거지, 억지로 해서 괴로울 필요가 없다는 얘기예요. 어차피 채식을 시작하고 관계의 정치학으로 고민한다면, 다시는 육식으로 돌아가기 힘들 거라 믿으니까요._M#]

벨 훅스, 영어공부, 열등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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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bell hooks의 말 중에서:

성차별은 다른 모든 억압의 바탕이기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지배 관례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페미니스트 이론]에서
Sexist oppression is of primary importance not because it is the basis oh all other oppression, but because it is the practice of domination most people experience, whether their role be that of discriminator or discriminated against, exploiter or exploited. -[Feminist Theory]

가부장제 지배를 종식시키는 페미니스트 투쟁은, 그것(가부장적 지배)이 다른 모든 억압 구조의 토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부딪히는 지배 형태이기 때문에 전 세계 여성들과 남성들에게 가장 중요하다. -[말대꾸]에서
Feminist struggle to end patriarchal domination should be of primary importance to women and men globally not because it is the foundation of all other oppressive structures but because it is that form of domination we are most likely to encounter in an ongoing way in everyday life. -[Talking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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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알지만, 루인은 대학을 졸업하고 심지어 대학원 시험에 합격하기까지 한 지금까지도 토플은커녕 토익 한 번 공부한 적이 없다(사실 지금도 토익과 토플이 헷갈린다). 영어 공부라면 치를 떠니 그럴 수밖에.

세대마다 다르고 계층, 지역마다 다르지만 루인이 처음 영어 공부를 시작한 것은 중학교 입학하기 전,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다. 루인의 주변과 비교하면 무난하거나 약간 늦은 시기에 시작한 편이다. 하지만 학원이라면 너무도 싫어하니(학원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만은) 영어는 곧바로 가장 하기 싫은 공부 중 하나가 되었다. 억지로 학원까지 다니면서 배워야 한다는 건, 하고 싶을 때 까지는 아무리 시켜도 하지 않는 루인에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을 뿐이었다. 영어 수업은 한 없이 지루한 시간이었고 영어 시험은 항상 틀린 개수 보다는 맞춘 개수를 세는 것이 더 빨랐다.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6년이 지났다.

그것으로 루인과 영어의 인연은 끝이었다. 아, 물론 대학교에서 교양영어를 듣긴 했지만 수업시간만 대충 때웠기에 공부라고 부르기 조차 민망할 지경.

더 이상 영어와 접할 일이 없어지자, 세상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크크. 그 정도로 싫었다. 토익과 토플 열풍이 엄청났지만 가볍게 외면했다. 아니, 외면한 것이 아니라 루인의 세상에 그런 건 없다고 여겼다. 새로 나온 컴퓨터 프로그램이니?

영어와 친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건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 페미니즘과 놀면서였다. 읽고 싶은 책이 있어 확인하면 어김없이 영어였다. 처음엔, 누군가 번역하겠지 하고 무시했다. 하지만 무시에도 한계가 있고 그 정점에, 벨 훅스가 있었다. 벨 훅스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 쯤 영어랑 친해지고 싶었겠지.

[행복한 페미니즘]을 읽고 다른 책들도 읽고 싶어졌다. 뭐, 당연하게도 없었다. 이때부터 영어와 친하게 지내야지 하는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인의 영어 실력은, …할 말 잃음…이 아니라 말 할 수 없어!-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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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페이지에서 단어를 15개 이상 찾으면 그 책은 자신에게 무리일 수도 있으니 좀더 쉬운 책을 찾아야 한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억지로 하는 공부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너무 읽고 싶어서 하는 것이라면, 다르다. 모르는 단어가 30개가 넘어도 읽는다. 더디더라도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나가는 기쁨이 크니까. 더구나 이럴 때의 영어는 취업이나 성적을 위한 것이 아닌 오직 쾌락을 위한 것이다. 영어 공부를 하겠다는 다짐은 영어와 놀면서 루인이 읽고 싶은 책을 읽겠다는 것이지 토익 점수 몇 점 받아야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어라는 부담이 덜 했다. 놀이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 당시 쓴 글들을 보면 너무도 부끄러운데, 글 속에 필요 이상의 많은 영어 단어들이 등장했다. “재현re-presentation”, “투사projection”하는 식으로 영어단어들이 글 속에 난무했다. 물론 이런 것이 의미를 정확하게 하거나 확장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점은 있다. 그럼에도 루인에겐 한 가지가 더 있는데, 그건 열등감의 표현이었다는 점이다. 강제된 영어를 너무 못하다 보니 그것이 일종의 열등감이 되었고(영어에서 자유롭다고 믿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영어 공부 한다”고 알리고 싶어 했다.

이런 열등감은 굳이 영어가 아니어도 발생한다. 루인이 쓴 글 중에 뭔가 배배꼬인 느낌이 들면서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필히 루인도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려고 애쓰다 나타난 열등감 때문이다. 물론 어렵다, 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가정은 안식처라고 믿고 있거나 그렇게 경험한 사람에게 가정은 노동 공간이며 때로 폭력을 재생산 하는 공간이라는 말은 어려울 수 있다. 이건 세상을 해석하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려움이다. 하지만 어떤 어려움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을 배배꼬아서 아무도 모르게 만들고 그런 지식을 권력으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글은 쉽게 써야하고 그래서 한글을 읽을 수 있고 문장 이해력만 있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그런 글쓰기를 지향하는데, 이때의 쉬움은 후자와 같지 않음이다. 전자에 의한 어려움이라면 그건 어쩔 수 없다. 루인의 열등감은 너무 자주 후자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러니 글이 꼬여있다면 그건 루인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려고 안달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열등감은 또한 루인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 할 수 있게 한 ‘용기’도 이 열등감 덕분이다. 극복하려는 유인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