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이는 무엇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을까

다정이는 규범적 의미에서 무질서하고 엉망진창이며 폴리아모리이며 폭력의 규범성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런 다정이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다정이는 여러 번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한다. 그 중 한 번인가는 다시 시작한다. 다른 경우에는 다시 시작하는데 실패한다. 그리고 다정은 불안할 때마다, 곤란할 때마다 하나 둘 셋을 센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것은 시작할 때 쓰는 구호이기도 하다고 했다. 하지만 다정이는 하나둘셋 구호를 백번은 외쳤다. 다정은 다시 시작했을까? 다시 시작하고픈 다짐이었을까?

이제 너무도 진부한 회귀물의 경우, 다시 시작하는 이들은 아는 자, 질서를 완벽하게 재조정하는 자이다. 미래를 알고 성공의 지름길을 알며 타인의 행동 패턴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아는 미래를 대비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를 활용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를 바꾼다. 타인의 변수는 계산 속에 있거나 통제 가능하다. 다정이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다시 시작한 인생은 이전보다 괜찮을까? 오히려 고통과 최악을 두 번,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다시 시작할게요라는 대사 혹은 간절함은 오히려 불안하며, 리셋의 안정감이나 문제 해소를 위한 외침이기보다 슬픔과 미안함의 중첩으로 읽힌다. 이전의 실패나 엉망진창인 상황을 그대로 혹은 더 나쁜 방향으로 다시 시작한다면, 그건 무엇일까?

여기서 이 연극의 절망적인 희망편이 등장한다. 암울하지 않기 위한 억지의 희망이 아니라 암울함-희망이다. 엉망진창을 되풀이하는 것이 다정의 욕망이라면? 모든 것이 다 망했다는 그 상황이 다정을 추동하는 힘이라면? 그럴 때 다정은 오히려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다정은, 우울증은, 감정적 고통은, 그 끔찍함을 다시 시작할 수/견딜 수 있을까.

그러고보면 다시 시작하는 지점은 또 어디, 어떤 사건이 발생하기 전일까?

너무 많은 기대, 낭독극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진행한 연극 [너무 많은 기대](김연경 작가, 이수림 연출, 이청 & 이효진 배우)를 봤다.

공연은 낭독극이었다. 몇 년 전에도 [에로 그로-경성]이라는 낭독극을 본 경험이 있는데, 잘 하는 낭독극은 종종 경이로울 때가 있다. 주로 의자에 앉아 목소리 톤과 표정으로 연극을 전개하는데 그 표정이 공간을 완전히 다른 장소로 바꿀 때가 있어서다. [에로 그로-경성]도 그랬지만, 이번 공연 [너무 많은 기대]도 그랬다. 배우들의 표정, 목소리 떨림, 톤의 변화를 통해 감정을 전달하고 무대 배경이 변했음을 인지할 수 있게 했다. 그것이 늘 경이로운데 어떻게 표정과 목소리로 공간의 변화를 구현할 수 있을까 싶다. (이청 배우님은 ‘눈물을 흘린다’는 부분에서 진짜 눈물을 흘리셔서 너무 놀랬다.)

물론 내가 가장 앞자리에 앉았기에 더 생생하게 느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에로 그로-경성] 때도 배우들의 표정과 목소리 톤을 통해 공간을 바꿨는데, 그나마 그때는 공연장이 그런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 공간은 카페/술집 같은 곳이라(카페인 줄 알았는데 냉장고에 술이 너무 많아서…) 이번 공연의 달달한 내용과 결이 다른 곳이었다. 그럼에도 공간의 분위기를 표정과 목소리로 구현하고 바꿔낼 수 있다니…

이 공연을 준비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했다.

어쩐지 최근 본 공연은 다 좋다. 남은 연극도 좋을 거란 기대 아니 확신이 있네. 다음은 색자님이다!

연극 후기, 추가 메모

[다정이 병인 양하여]는 계속 떠올리는 연극이지만 아직 어떻게 감상을 말해야 할지 못 정한 연극이기도 하다. 한 번만 볼 게 아니라 더 봐야 했나 싶었고. 그저 오늘 관계자(이렇게 표현해도 괜찮나…)와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나만의 해석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남기는 메모(누군가도 비슷한 고민을 했겠지). 이런 메모가 쌓이면 뭐라도 되겠지.

관객과의대화때 다정의 성적 실천이나 다양한 혼란이 세월호와 연결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설명해주면 좋겠다는 질문이 있었다. 그때 들은 답번은 다정의 슬픔과 미안함이 개인적인 것과 함께 사회적 사건으로 확장되는 장이라고 했었다. (내 기억이 얼마 간의 오류를 야기했을 수도…)

그 순간 나는 두 가지 기묘한 순간을 거쳤는데. 하나는 2014년을 거친 세대에게 세월호는 개연성이나 설명이 필요 없는, 삶의 어떤 순간에도 개연성이 기입되는 장이지 않나 했다. 그것을 사회적 사건으로 경험하든 개인적 사건으로 경함하든 상관없이. 다만, 세월호 10주기 추모를 위한 [2024 셰익스피어 소네트] 공연(?)에 참가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 아무런 연고도 인연도 없는 이들이 10년이 지나도 이렇게 애도하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는 대사가 있었다. 두고두고 곱씹는 말이다. 그 기적은 망각에 저항하는 힘이기도 하겠지만 그 이상의 연대와 용기에 관한 이야기처럼 들렸다.

다시, 다정이의 무대 장치에는 귓속을 보여주는 듯 창밖을 보여주는 듯한 둥근 창문이 있다. 세월호 집회 에피가 나올 때, 나는 그 창문이 선박에 자주 쓰는 창문처럼 보였다. 혹은 잠수함에서 사용하는 창문 같기도 했다. 기묘했고 슬펐고 호흡이 어렵기도 했다. 오늘 관계자에게 여쭈니, 완전히 이런 의도는 아니었다고 하셨지만 그럼에도 정말 잘 만든 무대 장치였고 어쩌면 저 창문이 다정이의 정동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