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가 이 자리에 있다고 말하기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퀴어가)”이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란 말과 “이 자리에 있다”란 말의 간극은 매우 크다.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란 말은 존재 가능성은 열어 두지만 실제 존재하고 있는 개인을 다소 모호한 상태로 만든다.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은 없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함께 내포하기 때문이다. 퀴어를 긍정하기 위한 표현이 자칫 퀴어의 존재를 애매하게 만든다. 그래서 난 강의를 할 때면 “이 자리에도 있다”고 말한다. 실제 나 외의 다른 어떤 퀴어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없어도 상관 없다. “이 자리에도 있다”와 같은 단정적 표현은 퀴어를 모니터 너머에만 존재한다고 알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구체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요지는, 그 자리에 나 아닌 퀴어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다. 퀴어를 구체적 개인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이런 나의 전략은 대학생 이상이 있는 자리에선 큰 문제가 없다(라고 믿고 있다).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라면? 글쎄.. 쉽지 않다. 한국 사회에선 퀴어 혐오가 상당하고, 초중고등학교의 왕따 이슈가 심각하다. 트랜스젠더도 아니고 게이도 아니지만 여성스러운 남학생이 있을 경우, 그 아이가 트랜스젠더로 혹은 게이로 왕따 당할 수 있다. 여성스럽지 않은 여학생이 있을 경우, 그 학생이 트랜스젠더 혹은 레즈비언으로 왕따 당할 수도 있다. 가능성은 이것 만이 아니다. 평소 어떤 소문이 돌았다면 나의 말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증거가 될 수 있다. 초중고등학교가 단체 생활을 하는 폐쇄 집단이란 점에서 단정적 발언은 다소 위험하다.
몇 년 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성교육 프로그램을 만든 적 있다(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ㅅ; ).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 초안을 작성하고 공부방에 찾아가 시연도 했다. 그때 만난 초등학생 집단이 꽤나 재밌었다. 한 초등학생 ㄱ은 공공연하게 같은 공부방의 친구에게 좋아한다고 말했고 나중에 결혼하자는 말도 했다. 물론 이런 발언만으로 ㄱ을 레즈비언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ㄱ이 레즈이언이다, 아니다가 쟁점도 아니다. 동성 친구에게 나중에 결혼하자고 말했음에도 ㄱ은 그 집단에서 왕따를 당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ㄱ은 그 집단에서 이른바 짱이었다. 나이도 가장 많았지만 가장 힘있는 구성원이었다.
또 다른 구성원 ㄴ은 좀 달랐다. 그때 나는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ㄴ은 나중에 여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는 모른다. ㄴ이 정확하게 “여자가 되고 싶다”고 했는지 그저 그와 비슷한 어떤 뉘앙스의 말을 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아무려나 ㄴ은 그 집단에서 가장 힘이 없고 나이도 어렸다. 또래의 다른 친구가 있었지만 그들은 ㄴ과 친하게 지내지 않으려 했다.
ㄱ만 있었다면 나는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덜 부담스러웠을 거다. 이 집단에도 퀴어가 있다고. 물론 나는 ㄱ을 의도하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ㄱ의 상황을 알고 있어도 부담은 덜 했을 것 같다. 나의 단정적 발언이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미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사람들이 ㄱ을 레즈비언으로 인식하고 ㄱ의 행동을 해석할 때와 ㄱ을 레즈비언으로 인식하지 않고 ㄱ의 행동을 해석할 때의 효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담이 조금 덜하겠지? 하지만 ㄴ만 있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선 “있다”와 “있을 수 있다”의 뉘앙스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 이런 말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 말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고민해야 한다. “있다”란 말이 ㄴ에게 어떤 식으로건 힘을 줄 수도 있지만 집단의 다른 이들에게 ㄴ을 왕따할 빌미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토요일 어느 청소년 단체 활동가를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그 자리에서 이와 관련한 얘기를 나눴다. 십대에게 어떤 식으로 얘기를 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받았고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지만 그것이 가진 위험성도 함께 얘기했다. 같이 얘기를 나누며 그나마 가능한 대안으로 동성애자 인구 비율 같은 통계를 언급하는 것, 타고난다는 말 같은 걸 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다는 말이 오갔다. 정답은 없다. 평소 매우 비판하던 방식의 접근법이 어떤 상황에선 가장 효과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난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물론 정답은 없다. 그날 감을 믿을 뿐…

이분법을 지양하기: Transsexuals’ Embodiment of Womanhood

mtf/트랜스여성이 여성성을 체화하는 방식을 다룬 논문을 읽었다. 다 읽고 난 느낌, 주디스 버틀러 지못미 -_-;;
D. Schrock, L Reid, and E. M. Boyd가 함께 쓴 논문 “Transsexuals’ Embodiment of Womanhood”(2005)는 mtf가 여성성을 체화하는 방식을 논한다. 그 방식은 크게 3가지 인데 훈련(retraining), 치장/꾸미기(redecorating), 의료적조치(remaking)이다. 각각의 내용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훈련은 자신을 여성으로 설명한 이후, 여성성 규범을 새롭게 배운다. 치장/꾸미기는 옷을 입는 전략, 화장하는 방법 등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트랜스여성은 ‘여성스러운 남성’이 아니라 여성으로 통하기 시작한다. 의료적조치는, 비록 수술이 핵심은 아니라고 해도 호르몬투여 등을 통한 몸 변화가 자신을 긍정하는데 큰 힘을 준다. 이 정도 논의로 끝난다면 읽는데 들인 시간이 아까웠으리라. 너무 뻔한 내용이잖아!
저자는 이 논의를 통해 몸을 변형하고, 꾸미는 과정이 몸이라는 물질적 경험인 동시에 주체성 형성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물질/몸과 주체성은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것이 이 논문의 핵심 의의다. 이 논문의 의의를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버틀러를 위시한 젠더 이론가를 비판한다. 저자에 따르면 버틀러를 비롯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는 언어/담론/문화와 물질/몸을 분리하고 언어 등만 중시하며 물질을 간과한다. 저자는 “예를 들어 버틀러와 비교할 때”, “버틀러의 주장과 달리”란 구절을 통해 버틀러를 수시로 소환하며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고 버틀러 류를 비판한다.
아… 버틀러 어쩔… 내가 버틀러를 지키고 말고 할 뭐도 아니지만… 이 논문을 읽다가 “버틀러 지못미”란 말이 절로 나왔다. 아울러 도대체 저자가 비판/비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가 누군지 궁금했다. 아아.. 이렇게 쓰고도 학술지에 실릴 수 있단 말이냐!
버틀러를 비롯한 젠더/몸 이론가가 주장하는 바는 “물질과 문화가 별개며 문화/담론이 전부”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한도 내에선 그렇다. 사회문화적 해석을 통과하지 않는 물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물질을 인식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해석실천이다. 아울러 물질과 해석/문화란 이분법 자체가 문제며, 이 둘을 끊임없이 분리하고 구분하는 실천 자체를 질문한다.
버틀러를 비판하는 논문을 읽을 때면, 종종 Schrock 등과 같은 방식으로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늘 궁금한데, 어째서 이런 해석이 발생하는 걸까? 이런 해석이 힘을 얻으며 반복재생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버틀러 본인을 비롯하여 적잖은 이들이 이런 해석을 비판하고 있음에도 이분법으로 논의를 수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젠가, Schrock 등이 버틀러를 비판하기 위해 채용한 이론적 배경(현상학)으로 버틀러 식의 주장을 긍정하는 논문을 읽은 적 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Schrock 등의 논문이 버틀러나 포스트모더니즘 관련 논의만 좀 더 흥미롭게 논했어도 꽤나 재밌을 논문인데… 아쉽기도 하다.

잡담: 낫또, 웹툰

01
며칠 전 저녁으로 낫또를 먹었습니다. 이유는 하나. 먹기 간편하다는 말 때문입니다. 낫또를 적당히 간해서 밥에 비벼 쓱쓱 먹으면 된다는 말… 초등학생 시절 엄마님이 없으면 계란후라이와 간장으로 밥을 비벼먹던 일이 떠올랐죠. 낫또가 그렇게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니!
두 개 한 팩을 구입하기 전 이것저것 찾았습니다. 낫또 특유의 미끌미끌한 느낌으로 적응하기 어렵다는 말, 적응하고 나면 중독된다는 말… 예전에 우연한 기회로 낫또를 한 입 먹은 적이 있어 미끌미끌한 느낌은 낯설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이미 한 번 겪었으니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네, 네. 착각이었습니다. 낫또에 같이 들어 있는 간장은 가쓰오부시가 들어가서 간장도 따로 샀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비벼서 김과 같이 먹었는데요… 그냥 열심히 마셨습니다. 밥을 그렇게 후루룩 마시기는 참 오랜 만입니다. ㅠㅠ 먹을만하지만 적응이 안 된달까요. 음식을 버릴 순 없으니 서둘러 마셨습니다. 많지 않은 양인데도 다 먹으려니 까마득하더라고요.
아직 하나 남았는데 차마 다시 먹을 엄두가 안 납니다. 아아.. 어떻게 하나요.. ㅠㅠ 도대체 얼마나 먹어야 중독되는 건가요.. ㅠㅠ 정말 “not 또”인가요.. ㅠㅠ
아무려나 현재로선 낫또 살 가격으로 생두부를 사먹기로 했습니다. 흐흐.
02
혼자 읽기 아쉬운 웹툰이 몇 개 있네요. 정리할 겸 기록을 남깁니다.
김영조. “그리고….. 여름” 다음 만화속세상. http://goo.gl/T5jPF
: 이 만화를 추천하는 이유는 9화에 있습니다. 1화부터 읽다가 ‘난감’하다 싶으면 9화를 먼저 읽으세요. 전 이런 전개가 나올 줄 상상도 못 했습니다.
(스포일러일 수도 있어 글씨를 흰색으로 바꿨으니 마우스로 긁으세요.) 추격하는 조직원이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은 mtf입니다. 주인공이 의도하지 않게 가지고 도망가는 돈을 되찾아(?) 수술을 받으려고 하죠. 전 이런 식으로 트랜스젠더를 작품에 녹이는 방식을 좋아해요.
홍작가. “고양이 장례식” “그때” “오늘의 커피” 다음 만화속세상. http://goo.gl/jo8Gx
: 단편으로 엮은 장편(?)입니다.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어 순서대로 같이 읽어야 합니다. “고양이 장례식”이 연재될 당시, 고양이 이야기라 특히 좋아하며 읽었는데요. “도로시밴드”를 연재할 때부터 홍작가의 그림체를 좋아해서 계속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선 동성애 이슈를 나름 괜찮게 풀어서 좋아합니다.
초. “내 어린 고양이와 늙은 개” 네이버웹툰. http://goo.gl/AvOYM
: 이미 많은 분이 알고 계실 듯합니다. 제목 그대로예요. 참 좋아요. 🙂
03
아직 남아 있는 책 분양.. 반 정도 나갔고, 반 정도 남았습니다. 재밌는 책이 여럿 남아 있어 의외랄까요. 흐. 많이 가져가주세요.. ㅠㅠ –> https://www.runtoruin.com/1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