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이태원, 관습

알바가 끝나면 곧장 玄牝으로 돌아가지 않고 카페에서 두어 시간 머문다. 음료를 주문하는 비용이 부담스럽지만 玄牝의 찜통 더위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다. 카페에선 후치랑 놀 수도 있고 글도 읽을 수 있지만 玄牝에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저 더위에 지쳐 널부러질 뿐.

카페에 머물 수 있는 건 저녁에 카페에 머물 정도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알바를 한 결과다. 만약 저녁에 카페에 머물 여유가 없었다면 그냥 玄牝에 갔겠지. 아무튼 이것도 한철. 가을에도 생활비에 여유가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가을이면 玄牝도 그렇게 덥지 않으니까 카페에 머물 이유가 없다. 이렇게 살아가는 걸까? 어떤 시기엔 당장 내일 생활비가 없어 전전긍긍인데 어떤 시기엔 약간의 사치도 가능하다. 그래서 불안하지만 내 삶이 이러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이태원에서 살아가는 트랜스젠더 몇 명을 만나며 재밌는 얘길 많이 듣는다. 이태원에선 별스럽지 않은 경험이 이태원이 아닌 지역에선 생경하다. 몇 해 전 신촌 근처 가게에서 신발을 고를 땐 점원의 끊임없는 간섭에 시달렸다. 그는 나의 취향을, 나의 선택을 간섭했고 통제했다. “손님, 그건 여성용이고 손님은 저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이 말은 내가 구경하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자격을 박탈했다. 이건 한국의 여느 지역에서도 빈번한 관습이다. 그리고 나는 점원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지 않고, 가게를 떠났다. 이태원에서 내가 ‘여성용 운동화’를 고른다면? 점원은 나를 “언니”라고 부르거나, 그렇진 않아도 최소한 간섭은 하지 않는다. 이것은 문화의 문제일까, 자본 아니 돈의 문제일까? 물론 이렇게 분리해서 질문할 수 없다. 이런 저런 요소들이 뒤엉켜 있으니까.

하지만 자본의 문제라고 해도 이태원에서의 태도는 감동이다. 신촌이라고, 동대문이라고 자본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니까. 내가 무얼 팔건 점원은 돈만 벌면 그만일텐데, 점원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간섭하고 통제한다. 가게에선 바로 그들이 젠더규범의 감시자다. 그들은 나의 선택에 개입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들의 개입에 호응하지 않으면, 그들은 나의 행동에 화낸다. 하지만 이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점원의 행동은한국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개인이 타인의 행동을 통제하는 방식을 반복했을 뿐이니까. 그래서 점원들의 입장에선 그들의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행동이 문제고, 골칫거리다. 이런 나의 행동을 골칫거리로 여기더라도 개입하지 않는 태도, 바로 이것이 일종의 ‘감동’이다. 한국이기 때문에 이태원에서 접할 수 있는 태도가 감동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태원은 낯설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이태원은 낭만적인 곳으로 변한다. 이태원이 주거공간인 이들에게 나의 태도는 매우 불편하겠지만, 가끔은 이런 낭만적인 망상이라도 해야 숨통이 트이잖아.

암튼 이태원에서 살아 가고 있는 트랜스젠더들을 만나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을 고민하는 한편, 나의 미래도 상상한다. 10년 뒤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여전히 지금처럼 끔찍할까? 지금보다 더 끔찍한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학교에 속해 있을까? 밤이면 트랜스젠더 클럽에서 알바를 하고 있을까? 아니, 살아 있긴 할까? 글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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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에서 mtf/트랜스여성을 트랜스젠더로 썼다. 일부러 그랬다. 요즘 트랜스젠더와 관련 있는 용어들을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고 있다. 예전에 한 번 쓴 적이 있는데, 만약 다시 쓸 기회가 생긴다면 상당히 다른 내용을 쓸 거 같다.

논문과 단행본?

지난 일요일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는데 ㅈㅎ님에게서 문자가 왔다. 예전에 받은 논문을 읽고 있는데 단행본을 내란 내용이었다. 그냥 예의상 하는 말로 넘겨들었다. 그럴 내용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내 논문에 대한 나의 평가는, 글쓴이의 주장이 없는 발제문이니까. 그래서 그냥 잊었다.

ㅈㅎ님과 같이 하는 프로젝트가 있어, 어제 모처에서 만났다. 근데 논문을 책으로 내라는 얘길 시간이 날 때마다 반복하는 거다. 일요일에 받은 문자를 빈말로 들었기에 조금 놀랐다. 좀 정리를 해서 단행본으로 나오면 여성학 교재로 정말 좋겠다고. 조금만 쉽게 풀어 쓰면 학부와 석사초급과정 교재로 좋겠다는 말과 함께. 논문의 현실과는 별도로, 이 정도의 평가에 황송할 따름이다.

재밌게도, ㅈㅎ님의 얘기를 들으며 내 논문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도대체 내 논문에 무얼 기대한 걸까? 다소 혼란스러웠다. 나의 평가대로 발제문이라면, 발제문 역할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건 아닐는지. 논문을 쓰기 전엔 정희진 선생님의 석사논문수준을 욕망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너무 당연하잖아(『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가 정희진 선생님의 석사논문이다ㅠ_ㅠ). 현재 한국에서 젠더를 논의할 때 많은 경우 트랜스젠더를 배제하거나 책 말미에 덧붙이는 식이 대부분이다. 관련 문헌을 찾거나 접근하기도 쉽지 않는데, 상당수가 외국어거나 이제는 구할 수 없는 자료집이나 보고서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트랜스젠더 이론을 중심으로 젠더 논의를 재배치한 책이 한 권 정도 있다면, 어떤 식으로건 쓸모가 있지 않을까? 『젠더 트러블』을 쓸 것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음을 아는 상황에선 간단한 입문서 정도도 괜찮지 않을까?
(사실 3년 전부터 미국의 트랜스젠더 이론을 정리하는 책이 나온다는 얘기가 있어 굳이 내가 낼 필요가 없는데,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뭐, 이런 고민을 했다. “인세 계약을 하면 일 년에 10만 원 정도의 인세는 들어오지 않겠냐”란 말에 “그럼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의 생활비는 벌 수 있겠어요”라는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흐흐. 근데 정말 준비해볼까?

사실 이 모든 고민과 농담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그건 내 논문을 책으로 낼 출판사가 있을 리 없다는 것. 으하하. 내 논문을 책으로 낼 출판사가 없다는 걸 확신하니 이런 망상도 하는 거다. 크크크. (결국 자학개그;;;)

케슬러와 맥켄나의 『젠더』: 1970년대 젠더 이론을 추적하기

Kessler, Suzanne J. and Wendy McKenna. Gender: An Ethnomethodological Approach. Chicago &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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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계획이라면 지난 달에 다 읽었어야 했다. 중간에 여러 일이 있었지만, 이런 이유는 모두 핑계다. 정말 열심히 읽었다면 열흘이나 늦을 리가 없으니, 그냥 게을러서 늦었다.

책 한 권을 읽고 세 편 정도의 관련 글을 쓴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닐 테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하고 싶은 말이 생기고 쓰고 싶은 글이 생긴다면 ‘좋은 책’이지 않을까? 즉, 어떤 형태로건 독자의 몸을 움직이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책’인 건 분명하다. 다 읽었는데도 할 말이 없고 몸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시간 낭비에 가까우니까. 그렇다면 케슬러와 맥켄나의 책은 어떨까? 세 가지로 구분해서 얘기할 수 있을 거 같다.

페미니즘이건 트랜스젠더이론이건 퀴어이론이건 뭐건 간에, 내게 1970년대는 초기에 해당한다. 이론과 논의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번창했다기 보다는 싹이 트기 시작하는 시기랄까. 좀 더 구체적으로 쓰면, 1950년대 중반 ‘젠더역할’이란 용어를 의학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며 ‘섹스역할’과 구분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 즈음 트랜스젠더 개인(Virginia Charles Prince)과 의학에서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섹스와 젠더 구분을 1960~1970년대 페미니즘에서 적극 받아들였고, 젠더는 페미니즘 논의의 중심이 된다. (논의하는 사람에 따라 1930년대의 마가렛 미드를 섹스-젠더 구분의 시발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나는 1970년대까지의 섹스-젠더 구분 논의는 상당히 단순했다고 이해했다. 앤 오클리(Ann Oakley) 식으로, 섹스는 용기처럼 변하지 않지만 젠더는 용기에 담는 내용물처럼 변할 수 있다는 정도랄까? 혹은 성전환수술의 토대를 닦은 존 머니(John Money)나 로버트 스톨러(Robert Stoller)처럼 섹스가 변할 순 있지만, 지정한 젠더를 강화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정도?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1970년대까지는 섹스-젠더를 분명하게 구분할 뿐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란 이분법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기란 인상이 강했다. 이것이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변한다는 게 내 앎의 전부였다. 그래서일까? 1979년에 처음 나온 케슬러와 맥켄나의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들은 시종일관 이분법을 당연하게 가정하는 이론들을 꼼꼼하게 비판하며 이분법을 가정하지 않는 이론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 책은 내가 알고 있던 1970년대 미국 젠더 논의의 지평을 넓혀줬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흥분했고, 마지막 결론을 기대했다.

한편, 이 책은 당시의 범주인 트랜스섹슈얼을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기로 결정한 이유기도 하다. 트랜스섹슈얼을 다루지 않는 젠더 이론이었다면 나중에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젠더 이론을 다루는 동시에 트랜스섹슈얼의 경험도 다루고 있어 예정보다 일찍 읽었다. 다루는 정도도 한 챕터가 아니라 책 전반에 걸쳐 언급하고, 한 챕터에선 집중해서 분석한다. 그리고 트랜스섹슈얼을 다루는 장면에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케슬러와 맥켄나는 두 영혼의 사람(버다치)은 젠더 이분법을 위반하거나 이분법에 부합하지 않지만 트랜스섹슈얼은 이분법을 강화한다고 비판한다. 성전환수술은 트랜스섹슈얼들이 이분법을 내면화하고 강화하는 실천의 하나란 것이 저자들의 주장 중 하나다. 이런 큰 주장때문에, 수술을 바라지 않고, 자신을 ‘여성’이나 ’남성’이 아니라 트랜스섹슈얼로 설명하는 이들의 경험은 잠깐 언급하고 넘어간다. 다른 부분에선 매우 영민한 저자들이 트랜스섹슈얼을 분석할 땐 왜 이렇게 막힌 걸까 싶어 안타까웠다. 이분법을 강화하느냐 하지 않느냐란 논쟁은 소모적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이분법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를 읽기 전 나는 무척 기대했다. 제목도 “Toward a Theory of Gender”(젠더 이론을 향하여)로, 이분법의 한계에 갖히지 않는 새로운 젠더 이론을 제시할 거란 기대를 부풀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 기대는 금물. 간단하게 요약하면, 젠더를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해서 접근하면 차이는 당연할 수밖에 없기에 이런 구분 자체를 질문하고 이분법을 몸에 익히는 과정 자체를 질문하는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  끝. ㅡ_ㅡ;; 1970년대 후반엔 상당히 새롭웠겠지만, 그리고 지금의 어떤 사람들에겐 이 정도의 논의만으로도 신선할 거 같다(젠더는 양성평등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상당하니까). 하지만 나 혹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들에겐 무척 진부할 따름이다. 아니, 내용이 진부한 게 아니라 나의 기대가 너무 컸는지도 모른다. 난 케슬러와 맥켄나가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읽고 싶었지, 문제제기를 읽고 싶었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논문 한 편으로 써도 충분할 주장을 도대체 왜 책 한 권 분량으로 쓴 거냐고!!”라고 구시렁거렸다. 흐흐.

이 책을 읽던 초기엔 이 책이 무척 흥미진진했다. 다 읽고 나니 어쩐지 허탈하다. ;;;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1970년대 젠더 논의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책이란 점이다. 아울러 버틀러와 같은 이의 주장이 뜬금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활발하게 진행한 이론적 논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어 즐거웠다. 젠더 이론을 다루는 수업이라면 이 책을 읽어도 괜찮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