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queer, LGBT

#1
며칠 전 오후에 있었던 일. 마침 지지(mp3p)를 듣지 않고 있던 중에, 사무실 밖에서 들려온 대화. (2명의 목소리였다.)
“퀴어문화축제네?”
“이미 지난 건데.”
“아쉬운데.”

#2
어제 저녁 6시 즈음 사무실 밖에서 들려온 말. (3~4명 정도 되는 듯.)
“퀴어? 기묘한, 괴상한, 그런 뜻 아닌가?”
“퀴어가 뭔지는 모르지만 알 것 같아.”
(웃음.)
“모르는데 어떻게 알아?”
“퀴어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퀴어영화하면, 동성애자들이 나오는 영화잖아.”

예전 사무실의 위치는, 공부하거나 숨어 지내기엔 좋은 곳이었다. 수업강의실이 있는 복도와 사무실이나 연구실, 교수실이 있는 복도가 따로 있었고, 그래서 사무실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대학원생들이거나 연구원, 교수들이었다. 학부생이 오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봐야 수업출결 문제로 수업조교를 찾아올 때가 전부였다. 그래서 사무실 문 앞에 붙인 두 장의 포스터와 무지개 깃발이 노출되는 빈도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이번에 이사한 사무실의 위치는 수업강의실이 있는 곳이다. 이 건물 역시 사무실, 연구실, 교수실이 있는 복도와 강의실이 있는 복도가 나눠져 있긴 하지만, 일부 연구실이나 교수실은 수업강의실이 있는 복도에 있고, 여성학과 연구실 및 사무실도 수업강의실이 있는 복도에 있다.

이 공간에 이사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짐 정리가 아니라 문에 두 장의 포스터를 붙이는 것. 지난번과 비슷한 방식으로 포스터를 붙이고 무지개 깃발을 붙이며 좋아했지만, 내심 걱정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지난번엔 그래도 어느 정도 구석진 곳이었다면 이번엔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그래서 수업을 위해 복도를 돌아다니다보면 우연이라도 볼 수 있는 그런 곳이었기에, 소위 말하는 혐오폭력을 살짝 걱정했다. 물론 학교공간이란 점에서 사무실이나 사무실에 거주하는 이들을 향한 혐오범죄가 있으면 얼마나 있으랴 하는 황당한 믿음으로 ‘안심’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슬쩍 걱정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포스터를 붙이며 좋아했던 건, 스스로의 즐거움과 함께, 관련 고민을 하는 이들, 정체화하고 있는 이들이 사무실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이라도 이 포스터를 보면 슬쩍 웃음이 나거나 힘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도 있었기 때문이다(혼자만의 망상일 가능성이 크지만 ;;;).

이런 걱정과 바람을, 사무실에서 같이 지내는 사람에게 얘기했을 때 그는 “페미니스트는 모두 레즈비언이다”란 ‘무식’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다고 지적했다. 그제야 깨달은 이 지적으로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을 페미니스트이자 이성애자로 얘기한 그 사람은, 종종 사람들이 자신에게 “페미니스트는 다 레즈비언 아니냐”고 얘기할 때마다 흥분하면서 그렇지 않음을 역설해야 하는 문제를 얘기하곤 했다. “페미니스트는 다 레즈비언이다”란 말 자체가 가지는 문제는 별도로 하고, 이 얘기를 할 때마다 지나치게 “아님”을 강조하는 그 사람의 반응이 은근슬쩍 레즈비언 혹은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으로 느꼈던 기억이 있다. 이 말이 사무실에서 같이 지내는 사람이 이렇다는 건 아닌데, 그는 “페미니스트는 모두 레즈비언이다”란 말 자체의 문제를 지적하려는 의도에서 이 말을 꺼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지낸지 여러 시간이 지나도 별 반응이 없어서 첨엔 사무실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이런 포스터 자체를 안 보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은지, 루인의 지도교수인, 선생님이 말해주길, 복도를 지나다니면서 포스터를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어제 저녁, 퀴어를 곧 동성애로 간주하는 얘기를 들으며(방음이 안 되기 때문에 문 밖에서 조금만 크게 얘기해도 사무실에선 거의 다 들린다), 곧장 두 가지 반응이 떠올랐다. 한편으론, 당장 문을 열고 나가선, “퀴어가 곧 동성애는 아니거든요. 때에 따라선 전혀 별개일 수도 있거든요!”라고 버럭하고 싶었고-_-;;;, 흐흐, 다른 한 편으론 사람들의 무반응엔 “This Is Queer”라는 구절의 “퀴어”란 말,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Sexual”이란 말 자체를 모를 수도 있겠구나, 였다.

그러고 보면 지렁이 활동을 시작하던 초기, 언론이든 다른 어느 곳이든 트랜스젠더가 무슨 뜻인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와 같은 질문(듣기에 따라선 아무런 고민 없이 작성한 것만 같은 질문)들이 반복될 때마다 살짝 짜증이 나곤 했다. 솔직히 이 정도의 질문은, 인터넷으로 기사검색만 해도 상당수의 질문자들이 요구하는 수준에선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니까. 특히나 언론의 경우엔, “이 만큼 힘들게 살고 있다”를 전시할 것을 요구하지, 질문 자체를 바꾸길 바라진 않는 경향이 있으니까(이건 기자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짜증”이 루인의 어리석음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언론에서 아무리 많은 기사가 나와도, 하리수가 아무리 유명해도, “하리수” 이상을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트랜스젠더란 말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고, 트랜스젠더란 말과 “하리수”를 연결시키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동시에 LGBT나 퀴어가 존재하긴 하지만, 저 너머 어딘가에 존재할 뿐, 내 앞에 있는 사람 혹은 내가 거주하는 공간에 같이 머무는 사람은 아니라는 믿음으로, 포스터의 의미를 모를 수도 있고. 모르겠다. 그나저나, 그럼, “그 글”을 다시 수정해야 할까? ㅠ_ㅠ

트랜스젠더, 성폭력, 그리고 정체성 구성

요즘 정신이 없긴 없나보다. 며칠 전엔 받은 걸 안 받았다고 해서 상대방을 당황하게 했고, 어제는 얼추 일주일 전부터 가겠다고 다짐하고 계획을 세운 공연에 못 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다. 정말 가고 싶었는데… ㅠ_ㅠ

이제 열흘 정도 지난 것 같다. 그때 이후로, 컴퓨터 앞에 앉으면 어김없이 하는 검색어가 있고, 수시로 논문 검색 사이트에서 관련 검색을 하지만, 마땅한 자료를 못 찾고 있다. 자신을 대신할 만한 어떤 글을 찾고 있는데 딱히 몸에 드는 글을 못 찾고 있달까. 그날, 그 전화를 받는 순간, 떠오른 “루인”이라고 불리는 이의 13년 전 경험이나 7년 전 경험을 설명하려고 애쓰면서.

아마 여성학 수업을 듣고,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서 관심이 가장 많이 쏟은 분야는 성폭력이었다. 의도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수업시간에 발표를 하게 되면 선택하는 주제는 성폭력이었고, 기말시험으로 레포트를 제출할 때에도 주제는 성폭력이었다. 무언가를 설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면서도 모른 척 했거나, 정말 모르면서 아는 척 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려나 뭔가를 설명하고 싶었지만, 당시 읽은 자료의 상당수가, 당시 들은 수업의 상당수가 얘기하는 논의들로는 “루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의 경험을 설명할 수 없었던 건 분명했다. 하긴, 그 시절엔 설명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도대체 무얼 고민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지경이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얼추 2년 전부터 트랜스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그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고민의 방향을 모색하면서, 어떤 주제엔 집중했고 어떤 주제는 잊곤 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읽은 글의 상당수는 젠더이론이었고, 혐오범죄와 관련한 글일 때도 여러 혐오 범죄 중 하나로(일종의 사례로), 성폭력이나 구타 등을 얘기했지, 이런 폭력들이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이런 경험들과 트랜스 정체성이 어떤 식으로 상호 작용하는지에 대한 글은 읽은 적이 거의 없었다. 물론 자신이 트랜스라는 걸 말한 후 경험하는 혐오범죄로서 성폭력을 언급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긴 하지만, 거의 모든 글이 성폭력을 혐오범죄의 하나로*만* 다루는 경향들이 있다. 하지만 성폭력 경험을, 트랜스들이, 맥락이 다른 mtf/트랜스여성이나 ftm/트랜스남성들이 그저 혐오범죄로*만* 경험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갑갑했다.

지금까지 읽은 글들을 떠올리고, 새롭게 자료를 검색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폭력은 혐오범죄의 범주로만 설명하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희망을 걸었던, 홀리 데버의 [FTM]이란 책도, 거의 700페이지에 달해 FTM정체성 구성을 이야기 하지만, 성폭력과 관련해서 자세히 다루는 것 같지 않고(확실한 건 아님). 그러니까, 흔히 말하듯, 어릴 때 성폭력 경험이 트랜스젠더가 ‘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주제가 아니라, 트랜스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는 과정에서, 트랜스로 정체화하고 살아하는 과정에서(그래서 호르몬이나 수술을 했을 수도 있고 안 했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경험하는 성폭력은 정체성 구성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 하는 고민이다. 비단 혐오범죄로서의 성폭력 뿐 아니라, 혐오범죄가 아닌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들도. (혐오범죄를 강조하다보니 혐오가 아닌 맥락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은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생긴 걸까.)

거의 처음인 거 같다. 어떤 고민을 시작할 때, 관련 문헌부터 이렇게 악착같이 찾기 시작한 건. 보통은, 어떤 고민을 시작하면 루인의 생애를 통해 한참을 고민한 후에야 문헌을 찾았는데. 이미 관련 논의를 조금이나마 읽었거나, 과거부터 했기 때문일까, 아님 당장 문헌부터 찾을 정도로 뭔가를 갈구하는 걸까. 그래서 한편으론 막막하고 먹먹하다. 흔히 얘기하는 “페미니즘 얘기하는 성폭력 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맥락들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

버지니아 울프, [올란도]

모로코였던가. 카사블랑카와 함께 떠올리면 되니, 맞는 것 같기도 하나. 1970년대 즈음의 미국 트랜스젠더들은 성전환 수술을 하기 위해 모로코로 갔다고 한다. 1950년대와 60년대엔 덴마크로 갔다고 했다. 그래서 그 시절의 “Go to Denmark”(덴마크에 가다)는 성전환수술을 하러 간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덴마크의 법이, 외국인은 덴마크에서 성전환수술을 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바뀌면서, 모로코로 가서 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때 그들은 며칠 정도 입원했을까.

하지만 굳이 미국의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들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상관없다. 지금의 한국에 살고 있는 트랜스들은 태국에 가서 수술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까. 태국영화, [샴]엔 한국의 의학기술이 상당해서 태국에선 고칠 수 없는 병은 한국에 가면 고칠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정작 한국의 재벌들이나, 돈이나 권력이 있는 이들은 미국으로 가던가.) 영화 초반의 공간이 한국이니 이런 식으로 말했을 지도 모르지만(다른 한 편, 한국에 있을 땐 “귀신”이 안 나왔으니까), 적어도 성전환수술에 있어서만은 태국의 기술이 더 뛰어나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한국에서 성전환수술의 “권위자”(혹은 자처하기를 “트랜스젠더들의 아버지”)들이 아무리 수술을 잘 한다고 광고를 해도, 현재로선 태국의 몇몇 병원들이 더 잘 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대충 일주일 정도 입원을 한다고 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란도]를 읽으면서 엄청난 작품이라고 느꼈다. 아는 사람은 대충 내용을 알겠지만, 대략 400년이란 시간을 36살이란 나이로 살아가며,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change of sex”)을 경험한 올란도란 사람의 전기소설이다. 근데 이 소설에서 성을 전환하는 장면이 재밌다. 러시아 공주에게 퇴짜 맞고 앓다가, 올란도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사로 간다. 그곳에서 여러 날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일주일간의 깊은 잠에 빠지고 그 사이에 “여성”으로 바뀐다. 이 장면, 올란도가 살았던 영국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에서, 그것도 일주일간의 잠에서 깨어나자 성이 바뀌어 있는 장면에서, 지금 한국에서 살아가는 트랜스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연이지만, 단지 우연의 일치지만(일주일간의 입원과 일주일간의 잠이라니!), 이 장면에서 만큼은 이 소설을 트랜스젠더 소설로 읽고 싶었다.

물론 울프가 이 소설이 나왔을 즈음, 화제였던 성전환에 대해 몰랐을 리 없다고 상상한다. 울프부부가 세운 출판사에서 프로이트의 책들이 번역되었고, 프로이트와 만난 적도 있다고 하니, 그 심증은 굳어진다. 물론 울프는 전혀 몰랐을 수도 있지만, 성전환수술이 가능하고, 실제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기사로 떠들썩했던 시대에 울프가 산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상상하기도 했다, 어쩌면 울프는 이런 성전환수술과 관련한 정보를 들었던 건 아닐까 하고, 이런 정보가 이 소설을 구성하는데 어떤 영향을 끼친 건 아닐까 하고.

울프가 쓴 작품의 맥락에서 [올란도]를 통해 말하려한 내용은 “양성성”이지만 때로 작품의 맥락을 무시하는 상상은 재밌으니까. “여성”으로 변한 올란도가 “남장”을 하고 다니는 장면도 자주 나오고, 결혼한 파트너 쉘과는, 서로의 성별을 바꿔 부르기도 한다(쉘은 올란도에게 “남성”이라고, 올란도는 쉘에게 “여성”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더구나 소설의 마지막 즈음에 이르면 2,000개 정도의 자아들을 하나로 환원하지 않으면서 불러들이는 멋진 장면도 있고.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게 2000년인가 2001년 즈음이니, 정말 오래 되었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내용들이, 너무도 짜릿하고 흥미로운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소문만큼 그렇게 어려운 작가도 아니고, [올란도]는 그 중에서도 무척 수월하게 읽을 수 있으니, 퀴어와 관련해서 관심 있는 분이라면(이미 레즈비언 소설로도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고) 더더욱, 한 번 정도 읽으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