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2013 겨울아카데미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어제 강좌는 발제가 있어서 이를 대비해서 정리한 글입니다.
Keith Vincent, 風間孝, 河口和也 세 명이 1997년에 출판한 <게이 스터디즈>는, 무려 16년 전에 나왔음에도 여전히 유효한 성찰이 있습니다. 정식 출판되면 좋겠지만 힘들겠죠? 제목이 <게이 스터디즈>여서 동성애 얘긴가 했는데 게이 남성을 중심으로 한 논의였습니다. 그래서 발제문을 정리할 땐 비이성애-트랜스젠더 맥락으로 좀 바꿨습니다. 그렇게 독해해도 큰 무리가 없겠다 싶어서요. 아울러 뒷부분은 쓰다가 말았는데 아카 얘기는 제가 담당하지 않은 장에서 더 자세히 다뤄 생략했다지요… ;;;
*발제에 오탈자 및 비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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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6.수. 19:00- KSCRC 퀴어아카데미 [강좌4] 퀴어문화: 일본 <게이 스터디즈> 함께 읽기
-제2부 제3장 “클로젯의 공간과 커밍아웃의 실천” 발제 by 루인
*게이 남성 중심으로 논하는데, 그냥 비이성애-트랜스젠더 맥락으로 다시 쓴 부분이 있습니다.*
이 장에서 저자의 핵심 주장은 커밍아웃의 정치적 함의다. 커밍아웃은 단순히 나를 드러내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이성애규범성, 이성애적 구조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저자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 “우리들이 클로짓에서 커밍아웃할 때, 내보여지는 것은 우리들의 ‘동성애’가 아니다. 드러나는 것은 이성애가 지배하는 사회의 억압구조다. 동성애를 마치 소름끼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이 억압구조다.” 모든 사람을 당연히 이성애자로 인식하는 사회, 아무 말 없으면 당연히 이성애자일 것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침묵은 이성애자로 통용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이성애자로 통하겠다는 기획이 있는가와는 상관없다. 이성애가 기본값이기에 나는 이성애자로 통한다. 이런 사회 구조에서 커밍아웃은 ‘나는 트랜스젠더다’ 그리고/혹은 ‘나는 바이다’, ‘나는 동성애자다’처럼 내가 누구인가만 밝히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이성애자-비트랜스젠더라고 인식하는 사회 구조에 내가 적절히 포착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 즉 이 세상은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드러내는 작업이며, 비이성애-트랜스젠더를 적절히 인식할 수 없도록 하는 억압 구조가 있음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커밍아웃의 이런 효과는 정체성이 본질적, 타고난 것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사회문화적 의미를 체득하고 바꿔나가는 작업임을 알려준다. 비이성애-트랜스젠더를 정당화하는 가장 흔한 작업은 ‘나는 원래 그렇게 태어났다’란 발화다. 이 발언은, ‘그렇게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란 식의 ‘관용’을 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언설은 비이성애-트랜스젠더가 겪는 사회적 억압을 설명하지 않는다. 모든 개인을 탈정치적 개인, 그리하여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개인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비이성애자, 트랜스젠더는 ‘나는 원래 이렇게 태어났다’란 말을 왜 해야 하는가? 원래 그렇다는데 왜? 하지만 이런 식이라고 해도, 커밍아웃은 “주체 형성 과정”이다. 즉, “클로짓에 있었던” 상황에서 “한 번 커밍아웃한다면 더 이상 같은 그가 아니다.” 커밍아웃은 나를 바꾸는 과정이다. 나만 바꾸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도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는 상태로 바꾼다. 비록 상대방이 수시로 혹은 실시간으로 나의 커밍아웃을 망각한다고 해도,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와 사람은 나의 커밍아웃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망각이란 실천을 통해 되돌아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전 상태로 되돌리려는 노력 중 하나가 “그런 사적인 부분을 끌고 나와서 소란을 일으키는가”와 같은 반응이다. 비이성애-트랜스젠더 범주를 드러내는 발언이 사적 영역을 공적 영역에 끌어왔다는 반응은 공사이분법을 편안하고 자연질서로 여기는 태도다. 즉, 세상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있으며 공적 영역에선 회사 업무나 사업과 같은 일을 얘기해야 하고 섹슈얼리티 이슈는 사적 영역에서 다뤄야 한다는 태도가 예의처럼 인식된다. 이런 사회에서 커밍아웃은 공공 영역에선 하면 안 되는 사적 이야기를 한 것과 같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비이성애자, 트랜스젠더를 은폐하는 대표적 언설이다. 이런 언설은 이성애자-비트랜스젠더 정체성이 공사 이분법으로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인식인 반면, 비이성애자-트랜스젠더 정체성은 존재 자체로 사적인 것, 저자의 표현으로는 이들 “정체성은 모든 부분이 섹스와 동일시되는 까닭에, 정체성 전체가 이 프라이버시로 덮혀 버리는 것”과 같다. 비이성애-트랜스젠더는 존재 자체로 사적 존재다. 공적 영역에 등장하면 안 되는 것이다. 커밍아웃 자체가 이런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적 질서의 위반이다. 그러니 비이성애자-트랜스젠더의 커밍아웃은 바로 이런 구조를 드러내는 실천과 같다.
그리고 커밍아웃은 이성애가 그 자체로 클로젯 상태란 점을 밝힌다. 비이성애 실천이 가시화되기 전까지 이성애는 사유할 필요가 없는 범주로 인식된다. 아니, 인식 조차 안 된다. 이성애는 그냥 인간 조건으로 공기와 같다. 하지만 비이성애자-트랜스젠더의 커밍아웃은 이 조건을 자연질서가 아니라 사회 구조로 만든다. 동시에 모든 이성애자를 클로젯으로 만드는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발휘한다. 아울러 이성애의 규범성, 이성애의 정상성은 비이성애-트랜스젠더의 비규범성을 통해서만 설명된다. 그러니 “이성애자의 정체성은 동성애자에 의존하고 있다.” 이성애는 그 자체로 존립하지 않는다. 자신을 규범으로 만들 대항 범주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이성애와 비이성애가 대등한 짝이 아니란 뜻이다. 이성애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비이성애는 명료하게 커밍아웃하거나 표현될 때에만 존재한다. 커밍아웃하지 않는 모든 인간은 이성애자며 “정상”으로 인식된다. 이런 점에서, 국어사전에 동성애, 양성애, 혹은 트랜스젠더는 등재되어도 이성애는 등재되지 않는다. 이성애는 “모든 언어의 배후의 뉘앙스를 조종하는, 모든 언어를 사용할 때의 대조건”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반복해서 얘기하고 있듯, 클로짓과 커밍아웃은 단순히 나 혼자만의 일회적 실천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변화와 함께 사회의 변화, 사회의 은폐된 억압 구조를 드러내는 실천이다. 저자는 이를 구체적으로 두 가지 사례로 설명한다. 하나는 미시마 유키오가 동성애자라는 점이 문학평론에서 은폐되는 점이다. 문학평론가 노구치는 미시마 유키오가 동성애자였음이 공공연한 사실임에도 “언급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시마에게 동성애는 문학적 실존이었음에도 언급을 피하고자 한다. 이런 발언에 저자는 공공연한 사실이 어떻게 사적일 수 있느냐고 되묻는다. 이것은 동성애 범주가 그 개인의 모든 삶, 모든 능력, 그리하여 존재 자체를 판단하는 색안경으로 작동함을 드러낸다. 이것은 예의를 가정한 동성애 은폐 기능, 동성애 혐오 발화다. 그리고 “클로짓에서 커밍아웃해서 나오는 것은 …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개념을, 다시 말해 사회의 개념 그 자체를 다시 만들라고 위협”하는 것과 같다.
또 다른 유명한 사건은 ‘부중 청년의 집’ 사건이다. ‘행동하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모임(아카)’는 1990년 2월, 커밍아웃을 한 후 1박 합숙을 위해 ‘부중 청년의 집’을 이용했다. 그날 밤 시설의 다른 구성원이 아카 회원을 괴롭혔다. 아카는 청년의집 소장에게 이 사건에 대응할 것을 요구했지만 “도민의 합의를 얻지 않은 동성애자의 시설이용은 앞으로 거절한다”는 답을 들었다. 아카는 동경도를 상대로 제소했고 재판과정에서 평등한 대우가 야기하는 차별이 드러났다. … 뒤에서 자세하게.
요약하면 커밍아웃이 비이성애자-트랜스젠더의 주체 형성 과정일 뿐만 아니라 이성애규범적 사회 구조를 드러내고 저항의 가능성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