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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 어린 시절, 기억을 경험하기
비가 주르륵 내린다. 아침에 인터넷으로 기사를 훑다가 읽은, 기상청에서 장마 대신 우기란 명칭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떠오른다. 정말 이젠 햇볕 쨍쨍하게 내리쬐는 그런 여름은 없어지는 걸까? 책에서나 읽던 그런 우기를 준비해야 하는 날이 온 걸까?
며칠 전, 어느 가게에 들렀다가 라디오에서 재밌는 얘기가 나왔다. 뭐, 익숙한 얘긴데, 요약하자면, 요즘 초등학생들은 학원이다 과외다 해서 너무 바빠 시간이 없다는데, DJ는 어릴 때 학교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가방을 내팽겨 치고 밖으로 놀러 갔다는 얘기. 자신의 이런 기억과 다른 요즘 아이들은 나중에 어린 시절을 어떤 식으로 기억할지 염려하는 듯한 뉘앙스.
이 얘기를 듣자 옛날 생각이 났다. 현재의 기억 속에서 초등학생시절 다닌 학원이라곤 얼추 2년 정도의 서예학원(이른바 글씨를 교정하려는 목적이었으나, 애초 목적은 간데없고 그저 한자에 친숙해지는 정도로 끝났다 -_-;; 흐흐) 정도랄까. 그 외에 딱히 다닌 학원은 없었다. 학교에서 내준 숙제만 하면 놀러 다녀도 상관없고(숙제는 또 어찌나 하기 싫던지). 지금의 언어로 얘기하면, 영어는 중학교 들어가야 공부하는 거지, 초등학생 때 미리 배우는 게 아니었다. 초등학생 시절 영어를 얼마나 몰랐냐면, 한글로 쓴 “메리 크리스마스”나 “해피 뉴 이어”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체 카드에 적었고 그 뜻은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알았다. 무슨 호기였는지, 6학년 땐 “메리 크리스마스”를 영어스펠링으로 쓰겠다고 맞은편에 앉은 이에게 어떻게 적는지 물었다가,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어 결국 한글로 썼던 기억도 있다. 크크크 ;;; 시험공부는 시험 전날부터 준비하는 거라고 여겼고, 때론 시험공부가 싫어서 시험 친다는 얘길 안 하고 전날까지 놀다가 걸려서 엄청 혼난 적도 있고. 중학생 때에야 비로소 학원이란 곳엘 가긴 했지만, 사실상 놀러 가는 곳이었고, 그나마 학원을 한 군데만 다녔는데, 그럼에도 공부할 게 너무 많다고 궁시렁거리곤 했다. 고등학생 때야 학원엘 안 갔고.
이런 루인의 경험이, 지역적인(그리고 학군이 없었음에도 학군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거란 건, 당시 나온 소설들을 나중에 읽고서야 알았달까. 한국 고3들의 생활을 찍은 미국 프로그램의 제목이 “Believe or Not”(믿거나 말거나)이라며 한국 입시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말들은 많았지만, 적어도 루인에겐 “그래, 우리 이렇게 힘들게 생활해”가 아니라 “진짜 믿거나 말거나 잖아”였달까. 그런 프로그램 속의 입시생활은 루인과 꽤나 동떨어진 얘기였고, 입시학원에 다니는 이들도 이런 얘길 드러내고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공부하는 걸 숨기는 게 아니라, 루인이 다니던 중고등학고에선 학원에 다니는 일이 드물었다는 의미. (아닌가? 루인만 안 다니고 다들 조용히 다녔나? -_-;;)
언제 출간되었는지 모르겠지만, ps가 읽었던 책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와 같은 책을 물려받아 읽으면서도, 감정은 좀 미묘했다. 루인이라고 성적 스트레스를 안 받은 건 아니지만, 학원과 과외와 같은 경험에 있어선 이질감을 느꼈달까. 하지만, 이런 기억들이, 학원 안 다녀도 대학은 갈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루인이 다닌 학교들은 입시학원에 안 다니는 이들이 상당수였을 뿐, 비슷한 시기에 사교육비가 얼마라느니 하는 얘기들, 학교에선 자고 학원에서 공부한다는 식의 얘기들은 언제나 주요뉴스였다.
이에 반해 요즘 초등학생들에겐, 학원엘 안 가면 놀 사람이 없어서 가야하고, 학원 한 두 곳이 아니라 대여섯 곳에 다니는 것이 기본처럼 여겨지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식의 기사들이 특정 계급의 경험을 반영한다고 의심하지만(대여섯 곳의 학원에서 많게는 10곳의 학원에 다닌다는 식의 얘기는 그렇게 많은 학원에 다니고 사교육 시장이 엄청나단 걸 의미하는 동시에, 그 정도의 학원에 다닐 수 있는 계급/계층이란 걸 동시에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혹은 학부모들)이 이런 기사를 접하며 조바심을 내고 그래서 어떻게든 학원에 보내려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명절을 빌미로 만나는 먼 친척들 중에, 초등학교나 유치원에 입학할 정도의 나이인 아이가 있는 이들은, 항상 이런 사교육과 관련한 걱정을 토로하고. 약간 다른 맥락에서, 루인의 부모님은 루인이 어학연수는커녕 토익/토플학원에 한 번 안 간 걸로 꽤나 불안해 하셨다. 학원에 가야 영어 실력이 향상 된다는 건 부모님도 안 믿었지만, 어쨌거나 학원에 등록해야지만 요즘 추세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부모님이 안심할 수 있는, 일종의 보증수표였던 셈이다. 지금의 초등학생들이 불행하다 혹은 노는 방법을 잊었다고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학원을 중심으로 어린 시절을 경험한 아이들은 나중에 어린 시절을 어떤 식으로 기억할지 궁금할 따름이다. 컴퓨터 게임만 할 줄 아는 아이들이 안타깝다면서 밖에서 뛰놀게 했다는 얘기, 아이들을 밖에서 뛰놀게 했더니 자식들이 좋아하더라는 얘기들 모두, 결국, 그렇게 논 ‘어른들’의 욕망을 반영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우니까. 그런 욕망으로 아이들을 통제하고 조정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우니까. 아이들에게 “잃어버린 동심”을 투사하고 싶은 건 아닌지, 아이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박제해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어린 시절을 만들고 싶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우니까. 학원과 컴퓨터 게임으로 10대를 보낸 이들은 20대에 10대를 어떤 식으로 기억하고 경험할까.
날씨도 마찬가지다. 한 달 가량의 장마와 그 후의 후덥지근하고 뜨거운 햇볕으로 기억하는 여름을 어쩌면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지도 모른다. 여름의 따가운 햇살이나 봄/가을과 같은 날씨는 외국에 나가야 경험할 수 있을 뿐, 이젠 우기와 건기로, 여름과 겨울로 계절이 변할 테고, 계절과 관련한 얘기들도 사계절이 아니라 우기/건기, 여름/겨울로 변하겠지.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따뜻할 테고. 어쨌거나 사계절을 경험했다고 기억하는 루인의 계절 기억과, 사계절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의 계절 기억은 어떻게 다를까. 이렇게 다르게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이 궁금하다. 한국의 특성으로 사계절로 꼽은 책들도 그 내용을 수정할 테고, 식물들을 비롯한 생태계도 서서히 변하겠지. 아마 10년 정도 지나면, 한국의 사계절을 묘사한 ‘과거’의 소설들은 다른 기후대에 있는 외국의 소설만큼이나 이국적이고 이질적이겠지. 그리고 루인 역시 10년 정도 지나면 사계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거나 그저 아련한 옛날로 기억하겠지. 그때 만약 지금 이 글을 읽는다면, 낯설까? 기묘할까? 애늙은이 같은 글이라고 피식 웃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