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찔림: 복잡다단한 트랜스젠더의 삶을 복잡하게 사유할 수 있는가

내가 쓰는 트랜스젠더는 어떤 트랜스젠더인가? 의료적 조치 경험/선택 여부만으로도 트랜스젠더의 삶은 상당히 다르고 복잡한 양상을 띈다. 하지만 의료 경험만으로 트랜스젠더의 경험을 구분해서 설명하는 건, 출신지역이나 계급, 장애 등으로 겪는 지점을 누락하기 쉽다. 흔히 트랜스젠더에게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의료 조치에 모든 트랜스젠더가 접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것은 상당한 고비용이기에 의료 조치에 참여하기 위해 상당한 다짐을 해야 한다(단순히 의료 조치에 참여해서가 아니라 의료 조치가 야기하는 경제적 부담으로). 의료 조치를 시작한 이후에도 그 비용을 해결하기 위해 여타의 삶을 일정 정도 유예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소수를 제외하면 의료적 조치를 한다는 건 많은 경우 계급 문제다. 이것은 트랜스젠더가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말로 언급하고 끝날 부분이 아니다. 트랜스젠더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는 식으로 언급하는 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트랜스젠더만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트랜스젠더의 계급 이슈를 말한다는 건 경제적 어려움을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계급이란 단순히 경제적 상황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익힌 습관, 몸의 관습이기도 하니까. 이를 테면 나는 식당에서 친절한 서비스에 불편함을 느끼는데 내가 받을 서비스라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부당한 서비스를 받으면 분개하지만(내가 이 모양 이꼴이라고 무시하냐!!) 그럼에도 항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 성격이기도 하지만 내가 살아온 원가족의 계급적 분위기기도 하다. 혹은 나는 어지간해도 병원에 가지 않고 진통제로 해결하는데, 병원은 내가 가기에 부담스러운 곳이란 인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건강검진의 경우, 건강하단 결과가 나오면 괜한 비용이 아깝고, 건강하지 않다는 결과가 나오면 어차피 치료비도 없는데 괜한 걱정만 생겨서 아깝다. 계급은 삶의 양식, 삶의 선택에 있어 많은 지점에서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면 트랜스젠더에게 계급은 어떤 의미일까? 계급은 예시일 뿐이다. 미등록/이주, 장애 등은 트랜스젠더 경험에 복잡한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면 이 복잡함을 어떻게 복잡하게 만들 것인가? 여기서 나는 아무 것도 못 하고 있다. 아는 것이 없고 고민이 없어 그저 막연하고 추상적 트랜스젠더만 말할 뿐이다. 물론 많은 경우엔 내 이야기만 팔고 있지만 추상적 트랜스젠더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반성할 일이다. 반성하기만 할 일이 아니라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 숨바꼭질: 계급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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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영화 <숨바꼭질>을 봤다. 평은 그럭저럭. 범인이 밝혀지기 전까진 재밌었다. 범인이 밝혀진 다음엔 긴장감이 떨어졌고 평이했다. 하지만 이건 취향을 탈 듯.
*어쨌거나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기대한 범인은 트랜스젠더 형상이었다. 주인공이 형의 집에서 여성용 속옷을 발견했을 때, 나는 여성동거인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보다 형이 여장을 하거나 트랜스젠더거나, 대충 그런 가능성을 기대했다. 이럴 때 트랜스젠더 형상을 어떻게 범죄 형상으로 재현하는지 궁금했다. 뭔가 꽤나 재밌거나 한없이 진부하거나, 뭐 그런 가능성을 떠올리면서.
아니었다. 범인은 이웃의 다른 사람이었고 범인을 추리하는 측면에선 그저그런 가능성이었다. 이 찰나, 좀 김이 빠졌다. 그렇다면 형의 방에 깨끗한 여성용 속옷이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다. 범인이 일부러 가져다 두었다고 해도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 범인은 집이 중요하지 집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어떤 혐의를 씌우는 덴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영화에서 주인공이 끝까지 살아야 하는 건 이해한다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부실하게 처리하나, 싶기도 했다. 주인공이 공격 당하기 전까지, 범인은 사람을 죽인 다음 랩 혹은 비닐로 포장했다. 그래서 무기로 죽이진 못 해도 질식사는 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주인공을 공격한 다음엔 그냥 방치했다. 다른 시체와 함께 방에 방치했고, 그 방을 집 안에서 그리고 집 밖에서 열 수 없도록 하지도 않았다. 그냥 깨어나면 쉽게 나올 수 있도록 방치했다. 이전 행동 특징과 연결이 안 된다. 물론 억지로 합리화할 순 있다. 이를 테면 이전 피해자는 제대로 숨겨야 그 집을 차지할 수 있지만, 주인공은 전혀 다른 동네에 살기에 대충 처리해도 된다는 것. 억지로 이해하려면 할 순 있지만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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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영화를 다 보고 아까웠냐면 그렇지 않았다. 꽤나 흥미로운 텍스트다. 집을 가진 자의 공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피해자 혹은 주인공 집단은, 동네를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상당히 넓고 고급스런 집을 소유하고 있으며 카페를 운영하며 경제적으로 윤택하다. 가해자 혹은 범인은 매우 가난한 동네에 살고 있으며 마땅한 집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이 정도면 쉽게 포착할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택 문제가 영화의 배경이다. 어떤 사람은 주택 1,000채를 소유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평생 살만한 집에서 살아보지도 못한다. 현재 한국의 주택공급율은 한 명이 한 채 이상 소유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전세대란이다. 집값 잡는다고 쇼를 한다. 그래, 쇼를 한다. 솔직하게 말해 주택정책을 결정하는 고위 공무원이 한국의 주택 문제를 제대로 처리할 의지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고위 공무원은 어느 정도 괜찮은 자가 주택이 있을 것이며 집값이 오르면 이득이다. 그들이 집값을 안정시키거나 낮춘다는 건 곧 스스로 자신에게 손해를 입히는 정책을 추진함과 같다. 전세대란과 주택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책입안자 및 정책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 자의 계급 이해가 해결할 수 없도록 한다고 의심한다.
안락하고 드넓은 집을 소유한 이들에게, 집이 없어서 작은 집이나마 구매하거나 전세로 살고자 하는 이들이 결코 좋게 보일리 없다. 자신의 집에 무단 점거했다가 월세를 제대로 안 내고 도망갈 수도 있고 집을 망가뜨릴 수도 있는 그런 부정적 존재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 어떤 임대인은 분명 전세 혹은 월세를 줬음에도 임차인의 집에 수시로 들락거리며 집의 상태를 확인한다. 임대인과 임차인은 결코 연대할 수 없다. 임대인에게 임차인은 탐욕스럽고 게으르고 또 공포스러운 존재일 수도 있다. 때때로 언제든 외국으로 이민갈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사는 집단에게 가난한 이들은 그저 공포의 대상이다. 영화는 바로 이 찰나를 다룬다. 계급 간의 갈등이 공포로, 호러로 변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한국에선 계급 간의 이미지가 공포고 호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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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살고 있는 집은 주거 밀집 지역이고 꽤나 깨끗한 편이다. 반면 이전에 살던 이태원의 보광동은 재개발을 앞둔 지역이었다. 도로는 있지만 자동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없고 골목 사이로 또 골목이 있다. 처음 오는 택배기사는 자칫 엉뚱한 곳에서 헤매기 쉽다. 주택의 높낮이가 다 달라서 난 이층집의 이층에 있었는데 바로 옆집 삼층 옥상이 보였다. 하지만 자취를 하며 다양한 동네에 살았고 내겐 꽤나 괜찮은 곳이었다. 가장 괜찮은 동네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상당히 괜찮은 동네였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나로선 감지덕지였다.
이사하는 날, 이사를 돕는 직원분이 내게 말했다. 어떻게 이런 동네에서 살았느냐고. 처음엔 이사를 축하하는 단순한 인사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동네에서 살았느냐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 찰나, 나는 살만하지 않은 공간에 사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사는 지역이 계급을 만드는 찰나일 수도 있다.

영화는 주인공이 사는 동네의 정비된 모습과 주인공의 형, 범인이 사는 동네의 정리되지 않은 모습을 대조한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범인이 사는 지저분한 동네를 혐오스럽고 불결한 형태로 재현한다. 그런 불결하고 지저분한 동네에서, 나는 임대인의 문제만 제외하면 무척 즐겁게 살았다. 다른 말로, 보광동에 살던 시절의 나는, 영화에서 재현하는 계급 혐오 시선의 대상이기도 하다. 범인과 나는 동일한 피사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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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 안전, 거주 공간의 안전은 젠더화되지만 또한 계급화된다. 주인공이 사는 곳엔 주민이 무슨 항의만 해도 경비원, 안전요원 등이 여럿 달려오고 쩔쩔맨다. 곳곳에 CCTV가 있고 CCTV가 비추는 곳을 집안에서 확인할 수도 있다. 아마 경찰도 하루에 몇 번씩 순찰할 것이다. 하지만 범인이 사는 곳은 그렇지 않다. 사고가 나도 이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별로 없고 그냥 사라졌나보다 하고 만다. 가까운 경찰서 역시 없는 듯하다. 어떤 위험 사고가 발생할 때 바로 부를 경비원이나 안전요원도 없다. 계급이 안전을 담보한다.
이태원 일대의 한남동과 보광동은 붙어 있는 지역이고 경찰의 순찰이 잦은 지역이다. 하지만 각 지역을 순찰하는 목적은 다르다고 느낀다. 한남동을 순찰할 땐 거주자의 재산과 안전을 보호할 목적일 것이다. 보광동을 순찰할 땐 위험한 거주민을 감찰할 목적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같은 효과를 낸다고 해도 그 의미와 뉘앙스는 다르다.
영화 도입에, 여성역 인물이 동네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줬다. 이것은 젠더화된 불안이다. 남성역 인물에겐 그럭저럭 살 수 있는 공간이지만 여성역 인물에겐 그럴 수 없다는 뜻에서 그렇다. 하지만 이것은 계급화된 불안이기도 하다. 여성역 인물은, 애인에게 이 동네에서 벗어나 괜찮은 동네에서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얘기한다. 그 말은 안전을 젠더로만 설명할 수 없으며 지역, 계급과 얽혀 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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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 위험을 알려주는 상징으로 외국인 거주자를 등장시키는 장면은 정말 불쾌했다. 외국인 혐오, 외국인 공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찰나다. 많은 외국인이 집값이 싼 곳을 찾다보니 영화가 재현하는 가난한 동네에 머물곤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지나가는 외국인을 통해 동네의 계급과 공포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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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가장 큰 공포는 영화에서 다루는 다양한 공포 요소를 전혀 성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채식, 도살, 폭력성, 페미니즘, 계급

생명을 죽이는 행동이, 동물을 죽이는 행동이 어떤 폭력성의 발현이라는 논리는 정당한 것일까? 이것은 타당한 논리일까? 육식을 하면 사람이 더 폭력적이고 채식을 하면 사람이 선하다는 식의 언설이 있다.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이런 언설은 꽤나 만연하다. 만약 생명을 죽이는 행동이 폭력적 행동이라면 가사노동은 폭력적 실천이란 이상한 논리가 가능해진다. 음식을 만드는 여성 젠더 역할은 폭력적 행위라는 논리도 가능하다. 이런 식의 논리가 가능하다면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은 충돌하는 정치학인가? 하지만 적잖은 페미니스트가 생명 윤리를 이유로 채식을 고민하고 채식주의를 얘기한다.
여성이 생선이나 어류를 구매하고 죽이는 일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강제된 성역할이지 여성의 폭력성을 표현하는 행동은 아니다’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여성이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하는 행동이란 뜻이다. 이런 해석은 정말 여러 가지로 문제다. 여성 중 생선이나 어패류를 좋아해서 직접 요리하는 일은 없다는 걸까? 대행업무라고 해서 책임감이 없다고 단정해도 되는 것일까?
남성성과 폭력성을, 육식 행위와 폭력성을, 생명 살해 행위과 폭력성을 단순하게 등치시켜선 안 되는 찰나다. ‘모순’이나 ‘아이러니’는 등치해선 안 되고 전제가 잘못 된 것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발생한다. 그리고 육식 행위는 폭력적이고 채식을 여성성/여성적 사유로 연결하는 행위는 이원 젠더 규범을 재생산하고 강화할 뿐이다.
도살 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도살 행위는 특정 계급의 역할이다. 조선시대엔 정말 천한 일이고 지금도 도살행위가 우대받거나 사회적으로 권장받는 직업은 아니다. 도살을,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폭력성과 붙인다면, 특정 계급에 대한 혐오, 예를 들어 노동계급은 폭력적이다라는 식의 인식과 곧장 결합되면서 계급 혐오/계급 편견를 재생산한다. 즉 채식 행위에 어떤 윤리, 비폭력성을 붙이거나 육식 행위에 비윤리적이거나 폭력적 속성을 붙이는 행위는 결국 특정 계급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논리에 가깝다. 거대 목축업을 하는 건 거대 자본의 일이긴 하지만, 직접적 도살이 상층 계급의 일은 아니란 점에서 도살, 생명 살해 행위를 폭력적 실천으로 재현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다른 말로 채식을 윤리, 폭력성 등과 연결해서 논하는 행위는 여성 혐오, 계급 혐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순간을 만든다. 그러니 누가, 어떤 인식론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채식에 윤리와 비폭력성을 붙이려 드는지 되물어야 한다. 이런 논리가 어떤 지배 질서, 지배 규범을 재생산하려고 하는지 탐문해야 한다.
#나중에 출판할 글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