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이것저것: 비염, 아키비스트, 계급

ㄱ.
비염이 한 번 터지고 나면 온 몸이 쑤시다. 죽염으로 코세척을 시작한 이후 콧물이 흐른다거나 코막힘 같은 것은 전에 비해 약하지만 온 몸이 힘든 것은 여전하다. 전엔 코에만 모든 것이 몰렸다면 지금은 비염을 견디기 위해 온 몸이 초긴장 상태다 보니 더 쉽게 지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한 이틀은 그냥 드러누워 쉬어야 할 듯한데 그러지도 못 하니 아쉬울 뿐이다.
지난 일요일 비염이 터졌고 아직도 온 몸이 뻐근하다.
ㄴ.
문헌정보학과 출신도 아니고 관련 자격증 같은 것도 없지만 아키비스트로 나 자신을 설명하거나 정체화하는 걸 깨달을 때면, 재밌다. 이게 다 퀴어락 활동의 여파다. 아울러 내가 정말 재밌게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기도 하다. 운동과 활동에 참여하는 많은 방법 중, 아키비스트가 확실히 좋다. 사실, 퀴어락 활동을 하기 전엔 그냥 나 자신의 판단으로 다양한 자료를 수집했던 일이, 지금은 아키비스트 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난 늘, 어딜 가나 퀴어 관련 자료를 수집했고 그것이 지금은 퀴어락 활동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엮이고 있다.
농담처럼 진지하게 말하길, 박사학위 취득하면 퀴어락에 취직할 거다. 지금은 운영위원이고 그때는… 음… 그럼 월급은? 몰라, 어떻게 되겠지, 뭐. 흐.
ㄷ.
박사학위 논문을 쓴 후 취직이 안 될 거라고 미리 단언하는 것은 전공 때문일까, 계급 경험 때문일까? 내가 무슨 논문을 쓰건 그것은 결국 트랜스젠더 이슈를 다룰 것이다. 피상적으로 전혀 다른 이슈를 논한다고 해도 그것은 트랜스젠더 이슈를 말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다. 그리고 한국에서 트랜스젠더 이슈로 논문을 쓴다는 것은 취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기억해보면 어릴 때부터 내가 들은 최고의 직장은 공무원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는데, 안정적 직장이란 점에서였다. 많은 돈은 못 벌어도 안정적이라는 것. 부모님의 빈곤 경험은 안정성을 지향했고, 그 안정성에 걸맞는 행동양식을 지향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종은 공무원이었지 교수나 어떤 연구직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공무원이 싫었다. 직종으로서 공무원이 내 몸에 적합하다고 믿은 적, 단 한 번도 없다. 그리고 나니 내 상상력에 남는 일은…
특별히 많은 돈을 벌 욕심은 없다. 그냥 읽고 싶은 책 살 수 있고, 굶지 않으면서 지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래서 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에도 알바로 생계를 연명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물론 여기엔 다른 이유도 있다. 생계를 이유로 내가 주장하고 싶은 언어를 망설이게 될까봐 두려워서다. 한줌도 안 되는 어떤 안정감을 지키려고 내가 말해야 할 언어를 말하지 못 하게 될까봐 두려워서다. 애당초 기존 학제에 편입될 가능성도 없지만, 이런 두려움이 있다면 그냥 외부에서 움직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나의 이런 고민은 분명 내가 살아온 가족의 계급 경험인데, 나는 왜 늘 이것이 단지 전공 문제일 뿐이라고 상상하는 것일까?

불편해서 안 괜찮아.

01
추석, 서울은 물난리였고, 나는 서울에 없었다. 대신 동거묘들의 안부가 걱정이었다. 잘 살고 있을까?

자연재해도 계급이라고 중얼거렸다. 누구나 알고 있는 얘기다. 폭우의 피해는 반지하에 사는 이들, 상대적으로 가난한 동네 사람들에게 일어났다. 광화문의 배수시설 운운하며 자연재해다, 인재다 논쟁인다. 하지만 배수시설 운운하지 않아도 이미 인재다. 살고 있는 지역, 주거공간의 조건이 계급인 사회에서 이것이 인재가 아니면 뭐가 인재겠는가.

02
가판대에서 정기구독하는 주간지에서 읽은 오래 전 기사. 그 주간지는 복지를 주요 의제로 삼고, 꾸준히 보도하고 있다. 아울러 복지운동을 하는 이들과 대담을 싣기도 했다(몇 달 전 기사다). 복지운동을 한다는 그들은, 예전엔 가족이 복지의 일부를 담당했지만 지금은 가족이 복지를 담당하지 않으니 국가와 제도가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했던가…

“이는 당시만 해도 시장과 가정이 나름대로 복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우선 시장은 일자리를 제공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할머니가 아이를 키우고, 병에 걸린 노인을 며느리가 간호하는 등 가족 내에서 보육·보건 서비스가 제공되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지 않았나. 시장은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가족은 개인화되었다.” http://goo.gl/edJR

속터지는 소리다.

최근엔 복지 확대를 진보를 자처하는 곳의 의제로 삼는 듯하다. 하지만 복지가 정말 진보의 의제일까? 만약 진보의 의제라면, 그 진보를 자처하는 곳에서 가정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하고 의심스럽다. 복지 의제가 만약 다시 한 번 여성 범주에 속하는 이를 억압하고,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비규범적인 존재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면, 이럴 때 복지란 내게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진보를 자처하는 곳의 진보와 내가 상상하는 진보(하지만 난 ‘진보’란 말을 안 좋아한다는..)가 다를 때, ‘다른’ 정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03
확실히 이번 정권의 최대 공적은 특권층, 기득권층의 특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 이전 정권에선 고위공직에 지명할 때, 비리가 있는 사람은 배제했기에 그 비리가 공식적으로 드러날 수 없었다. 고위공직에 지명할 사람의 도덕성 기준이 높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설적으로 특권과 비리를 은폐하며 특권층이 특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운 격이긴 하다. 하지만 이번 정권은 어지간한 비리는 신경도 안 쓰고 지명하다보니, 그동안 은폐된 특권과 비리가 드러났다. 이런 건, 이번 정권이 아니면 결코 못 할 일이다. 이 정권의 최대 업적이라면, 비리척결은 못 해도 비리와 특권 폭로는 했음을 꼽아야 한다. 이번 정권을 겪으며 교훈을 얻었다면, 기득권층이말로 MB 같은 인물에 반대표를 던져야 한다. 아니, 처음부터 MB 같은 인물이 후보에도 못 나오게 해야 한다. 그게 특권층, 기득권층이 사는 길이다.
😛
(갑갑한 건, 현 정권과는 다르다는 국민의정부나 참여정부도 특권층이나 기득권층의 비리와 특권을 제대로 못 다뤘다는 것.)

『흑인 페미니즘 사상』: 매우 짧은 리뷰

인종차별주의와 연관된 공포가 상당히 가시적으로 대상화된 흑인의 몸에 투사된 관념에서 나오는 것인 반면, 동성애공포증에 깔려있는 공포는 누구나 게이나 레즈비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온다. (231)

혐오범죄는 개인을 처벌함으로써 가시적인 동성애의 사례를 만들어내는데, 이러한 사례로 인해 나머지 동성애자들을 벽장 속에 가두어 두는 효과가 발생한다. 게다가, 동성애가 제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인식되자, 동성애를 공적이고 합법화된 공간에서 제거하려는 전략이 의도된다. 동성애자 결혼금지법은 동성애의 “확산”을 멈추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232)

에이즈 담론에서 아프리카, 동물, 표면상 일탈적으로 보이는 섹슈얼리티가 서로 연결된다는 점은 이러한 관념들이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Hammonds 1986; Watney 1990). 폴라 기딩스가 논의한 대로, “믿을 만한 학회지에서도 예컨대 녹색원숭이와 흑인여성을 연결한다거나 에이즈의 기원이 아프리카 성매매여성(흑인여성의 오염된 성기)에게 있다고 추정하려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계속해서 인종차별주의 이데올로기에 취약하다는 것을 드러낸다”(Giddings 1992, 458). (246-247)

그 이후 윌리암스는 포르노그래피가 성관계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이라고 논의한다. 윌리암스는 포르노그래피를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재연하는 “사유관습”이라고 보게 되었다. 윌리암스에게 포르노그래피는

관음증적인 응시주체로 하여금 상상력을 펼치며 관찰대상의 주체성을 말소해버리는 자동감각에 탐닉하게 한다. 온전한 타인과 상호작용하며 듣고 대화하고 상대를 돌보는 대신에 그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낸 감각으로 대체해 버리는 사유습관인 것이다. … 대상은 진압되어 이러한 감각이 투사되는 유순한 “사물”이 된다.(Williams 1995, 123) (249)



패트리샤 힐 콜린스의 책 『흑인 페미니즘 사상』(박미선, 주해연 옮김. 서울: 여이연, 2009)을 읽고 있습니다. 저는 섹슈얼리티와 성정치를 다룬 6장을 가장 좋아해요. 그 중에서도 포르노그래피를 사유습관으로 분석한 윌리암스의 통찰은 매우 매력적이라는. 에헷.

한국에 페미니즘 이론 공부할 때 보통 로즈마리 통의 『페미니즘 사상』을 많이 사용했는데요(요즘도 그런가요?). 저는 콜린스의 책이 훨씬 좋다고 느껴요. 기초입문으로 벨 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을 읽고 콜린스의 책을 읽는다면 무척 좋을 듯. 통의 책은 젠더를 중심으로 여타의 범주를 덧붙이며 설명합니다. 젠더는 이런데 계급에서는 저렇고, 인종이 더해지면 또 다르고 …. 어떤 보편적인 젠더(혹은 ‘여성’)를 가정하고 그 기준에 계급이나 인종을 더하며 다양성을 만드는 식이죠. 사실 많은 이들의 글이 이렇고요. 하지만 콜린스의 책은 덧붙이기 식의 설명이 아니라 뒤섞여 있는 상태에서 설명합니다. 최소한 세 가지 범주, 젠더-인종-계급의 교차점, 그리고 (이성애)섹슈얼리티의 교차점들에서 이들이 서로 얽혀 있음을 매우 잘 분석하고 있습니다. 전 이 책이 다양한 범주의 교차점을 분석하는 글쓰기나 방법론의 역할모델로, 교차점에서 사유하는 방식의 역할모델로 매우 좋다고 판단해요.

불만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 책에서 콜린스는 트랜스젠더를 여러 번 언급합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가 분석 범주는 아닙니다. LGBT를 나열할 때만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트랜스젠더를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요? 반면 흑인 레즈비언 인식론은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는. 하하.

+또 다른 리뷰가 어딘가에 실릴 예정입니다만 … 아하하;;;;;;;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