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를 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잦은 일도 아니다. 그래서 강의 경험은 늘 낯설고 또 어색하다.
이번 강의는 나름 우여곡절이 있었다. 일주일 전에 땜빵으로 요청 받았다. 기획자는 다급했고 나는 망설였다. 전체 강좌 중 다른 강의 하나를 하기로 했지만 추가로 요청받은 강의는 내키지 않는 주제였다.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하기로 했다.
강의를 준비하며 어려웠다. 주제는 간단했다. 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강좌 전체를 여는 서두 강좌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강좌 기획은 심화강좌인데 기획자는 초급입문용으로 강의를 해달라고 했다. 끄응. 강의 전날, 못 하겠다고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참았다.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제는 ‘섹스/젠더/섹슈얼리티 뒤집어보기’였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여성학 초급 과목에서 개념을 배우는 용어이자, 여성학이나 페미니즘에서 매우 자주 사용하는 용어다. 이 용어를 뒤집어보기를 하자고 했는데, ‘뒤집어보기’를 하려면 초급입문용 강의를 하기 힘들다. 나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아무려나 강의는 재밌게 끝났다. 기획자는 초급입문용으로 준비해달라고 했지만 수강생은 이미 내공이 상당한 분들 뿐이었다. 아쉬운 점도 있다. 섹슈얼리티 얘기는 거의 못 했다. 얘기하기 애매했다. 시간도 부족했고.
섹스와 젠더, 섹슈얼리티는 보통 한 쌍으로 묶이는 편이다. 그래서 같이 살펴볼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하나의 주제로 묶을 수 있는 용어는 섹스와 젠더 뿐이다. 섹스와 젠더는 그 경계가 상당히 모호하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게 요약하자면, 섹스와 젠더는 서로를 분리하려는 주장과 분리할 수 없다는 주장 사이에서 논의를 축적했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를 논하는 과정에서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물론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경계가 매우 모호한 측면이 있고, 역사적으로 혼용한 바 있다. 그럼에도 내게 섹슈얼리티는 별개로 논의를 해야 한다. 섹스와 젠더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 만큼이나 섹스-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어렵고 많은 시간을 요하기 때문이다. 강의를 준비하고 실제 진행하면서 깨달았는데, 섹스-젠더 뒤집어보기는 하나의 강의로 할 수 있지만, 섹스/젠더/섹슈얼리티 뒤집어보기는 하나의 강의로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뭐, 4시간 이상의 강의라면 가능하겠지만, 강의 시간이 두 시간이라면 힘들다.
암튼 하기 싫은 강의였지만 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강의료로 길고양이에게 줄 사료 등을 살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근데 길고양이에게 줄 사료를 선물 받을 거 같다! (자세한 내용은 다른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