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보리, 고양이: 어떤 슬픔

ㄱ.
바람이 지금 겪고 있는 어떤 감정적 경계가, 내가 초래한 일이란 점에서 마음 한 곳에 슬픔이 쌓인다. 더 정확하게는 정말 많이 미안하고 안타깝다.
ㄴ.
귀여운 보리를 충분히 더 애정애정하지 못 하고 조심하는 것도 슬프고 또 미안한 일이다. 큰 결정하고 데려왔기에 더 자주, 더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 하고 있다. 바람의 기분도 살펴야 하기에 조심스럽다. 이게 참 미안하고 슬프다.
ㄷ.
슬픔은 시간으로 구성된다. 슬픔엔 시간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난다. 그래서 지금 내가 느끼는 슬픔이 어떤 시간의 흔적인지 종종 궁금하다.
ㄹ.
그나저나 만화책에 따르면, 성묘는 아주 어린 고양이가 혼내거나 싸울 일이 있어도 때리거나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냥 넘어간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그때 본격 싸운다고. 생각해보면 나도, E도 바람의 싸닥션을 맞은 일이 있다. 정말 화나거나 그러면 가차없을 성격이다. 보리가 너무 어려서 지금은 그냥 넘어가는 것일까? 물론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ㅁ.
어떤 신호인지 알 수 없지만 보리가 바람에게 꼬리를 잔뜩 부풀린 모습을 보여주었다. 흠… 향후 바람의 대응은 어떨는지.

바람, 보리, 고양이: 황당한 상황

며칠 간의 보리 사진은 여기서: http://goo.gl/jgPrF3
뭔가 기분이 묘한 어제였다. 그러니까 보리가 아니라 바람이 보리를 피하는 상황이랄까. 도대체 이게 뭐야.
첫 번째.
잠깐 외출할 일이 있어서 집에 나왔다가 뭔가를 빼먹어서 얼른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바람이 캣타워에 없었다. 응? 그리고 불 꺼진 방을 보니 바람과 보리가 묘하게 대치 상태. 그리고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모든 게 멈춘 것만 같은 상태였다. 뭐랄까, 뭔가 묘한 기분이었다. 내가 없을 땐 바람이 그래도 캣타워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이번이 처음인 건지 아직은 확인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이건 어떤 상황일까?
두 번째.
저녁 늦게까지 마루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바람이 캣타워에서 내려와 밥을 먹으려 했다. 최근 같이 지내면서 이런 일이 처음이라(내가 인지하는 수준에서 이제까진 바람에게 밥그릇을 가져다 줘야만 밥을 먹었다) 정말 기뻤다. 그런데 근처 의자에서 자고 있던 보리가 갑자기 일어나선 밥을 먹는 바람에게 다가가 하악질을 했다. 그리고 바람은 놀라 그 자리에서 피했고 다시 밥을 먹지 않았다(나중에 내가 직접 다시 줘야 했다). 아니, 이게 뭐야. 어떤 사람에겐 고양이 나이로 4년이 넘은 바람이 이제 2개월령인 고양이를 무서워 하는 게 웃길 수도 있겠지만 나로선 뭔가 심각한 상황이다. 바람의 날카로운 성격으로 보리오 위화하는 게 아니라 바람의 극소심한 성격이 고작 2개월령 고양이도 무서워하거나 경계하는 것인가.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바람은 신경쇠약에 걸릴 수도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내가 없을 때 알아서 잘 조율하는 것일까.
다른 한편 보리가 식탐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다른 고양이가 밥을 먹지도 못 하게 할 정도의 식탐인 걸까? 이게 다른 여러 고양이와 살다보니 생긴 일시적 현상인지 평생 지속될 현상인지에 따라 좀 골치 아픈 일이 될 수도 있어서 심란하달까.
암튼 한없이 잘 적응하고 있고, 집사의 목에서 자며 집사를 살해할 음모를 꾸미는 것만 같은 보리 고양이는 이제 덜 걱정이고, 바람을 더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끄응, 도대체 이게 뭐야. ;ㅅ;
+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은 둘째를 들인 집사의 일희일비를 목격하고 계십니다.

[고양이] 바람은 당황했고, 보리는 혼났다.

하루하루 변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 변화는 또한 미묘하다.
평소보다 바람을 더 쓰담쓰담하고 더 많은 말을 걸고 있기도 하지만 뭔가 다른 사건이 있었다. 그 중에선 E의 역할도 크다. 낮에 E가 왔고 역할을 나눴다. 바람을 위로할 수 있는 건 나 뿐이고 보리는 낯가림이 적은 편이다. 아울러 E는 보리의 귀여움만 취하겠다고 했기에 역할을 나누기는 쉬웠다. 종일 나는 바람을 위로했고 E는 보리와 놀다가 나중에 보리는 E 곁에서 늘어지게 잠을 잤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사료를 먹지 않던 바람은 오후 즈음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바람이 밥을 먹으려고 캣타워에서 내려온 건 아니다. 내가 바람의 코 앞에 사료를 가져다 주니 그제야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정말 한 숨 돌렸다. 오늘도 밥을 안 먹으면 내일 즈음 병원행이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총 세 번 정도 밥을 먹었고 바람이 직접 밥을 먹으러 내려오건 내려오지 않건 밥을 먹을 의지는 있음을 확인했다. 다행이다.
한편 보리는 엄청난 적응력을 보여주고 있다. 정말이지 돌아다니는 와중에 밥을 먹고, 우다다 엄청나게 뛰어다녔다.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캣초딩의 엄청난 활동량 말이다. 6개월 이상이 될 때까진 정말 미칠 듯이 뛰어다녔지. 지금 보리가 딱 그렇다. 몸이 작아 어디든 갈 수 있기에 정말 어디든 다닌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잘 먹고 열심히 마시고 화장실도 적절히 잘 간다. 적응을 잘 해서 참 다행이다. 하지만 이런 미칠듯한 활동이 재밌는 일을 일으켰다.
저녁 즈음 보리가 잠에서 깨어난 다음, 거실에 마련한 바람의 밥그릇에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바람은 당황한 듯 쳐다봤다. 난 보리를 데리고 방에 있는 밥그릇에 옮긴 다음(바람 같으면 난리났겠지만 보리는 그런 상태에서도 밥을 잘 먹었다) 바람의 밥그릇을 캣타워에 올려줬다. 바람은 아그작아그작 밥을 먹었다. 바람의 밥그릇을 다시 받침대에 올려두고 바람을 쓰다듬하는데, 보리가 방에서 밥을 먹다 말고 밖으로 나와서 다시 바람의 밥그릇에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바람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 표정. 그런데 밥을 다 먹은 보리가 돌아섰고 바람과 눈이 딱 마주쳤을 때, 난 바람이 하악할 줄 알았다. 아니었다. 보리가 먼저 바람에게 하악했고, 바람은 잠시 당황하다가 한 타임 늦게 하악했다. 으하하 크크크크크크.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보리가 또 다시 캣초딩의 활력으로 미칠 듯이 돌아다니자 바람은 그 모습을 구경하기 바빴다. 뭐랄까, 더 이상 경계하기보다는 그냥 뭔가 신기한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표정이랄까. 낮에 E가 와서 보리에게만 신경을 집중한 점과 함께 이런 부분이 경계를 많이 누그러뜨린 느낌이다. 물론 완전히 경계를 늦추진 않았다. 아직 스스로 방에 들어오진 않는다. 보리가 방에 있는 이상, 바람은 스스로 방에 오진 않으려고 한다. 방문 앞에서 나를 부를 뿐. 이것만 어떻게 되면 좋겠지만, 시간은 더 걸리겠지.
다른 한편, 보리의 미칠 듯한 활동이 문제를 일으켰다. E가 만든 국을 데우려고 가스레인지를 사용하고 있는데, 보리가 가스레인지 위로 뛰어올랐다. 나도 바람도 화들짝 놀랐고, 보리는 엄청 혼났다. 이런 건 제대로 혼을 내야 하는 부분이라. 그래서인지 몇 시간 정도 보리는 기죽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말 기가 죽은 건지는 미스테리. 왜냐면 책상에 있다가 바닥에 뛰어내리는 과정에서 다른 물건을 떨어뜨렸음에도 이건 무시하고 그냥 바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더라는. 뛰어내리는 과정에서 다른 물건도 같이 떨어져 소리가 났을 때, 바람이라면 후다닥 어디로 숨었을 텐데.
아무려나 조금씩 변하고 있다. 더디겠지만, 변화가 없는 건 아니다. 다행이다.
+
그나저나 밤에 잠을 잘 때, 보리는 내 몸 위에서 잔다. 이것까지는 좋다. 그 위치가 내 목 근처라는 게 문제일 뿐. 지금은 괜찮은데 몸무게가 늘면…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