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어떻게 명명할 것인가

관련글:
“루인. 문제적 프레임에 갇힌 글” https://www.runtoruin.com/2291
“이브리. 커뮤니티의 문제” http://goo.gl/xCIJUW
2007년인가. 미국에서 고용차별금지법(ENDA)을 둘러싼 논쟁으로 한창 떠들썩 했다. 논쟁의 요점은, 이 법에 트랜스젠더를 포함하면 법안이 통과될 확률이 떨어지고 트랜스젠더를 제외하고 동성애자만 포함하면 통과가 확실시 되면서 트랜스젠더를 빼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 이슈로 미국 내 LGBT/퀴어 공동체는 떠들썩했다. 동성애자만이라도 차별을 받지 않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며 트랜스젠더는 양보하라는 입장부터 트랜스젠더가 빠진다면 법 자체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니 모두를 포함하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입장까지. 이 논쟁에서 유명한 두 편의 글이 등장한다. 한 편은 자신을 게이로 설명하는 존 아라보시스. 그는 트랜스젠더가 빠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로 GLBT의 역사를 들었다. 운동과 정치학의 역사에서 게이(G)가 가장 먼저 운동을 시작했고 이후에 레즈비언(L)이 운동에 참여했다. 바이 남성 등이 게이 운동에 포함되길 바랐고 그리하여 뒤늦게 바이(B)가 추가되었고 트랜스젠더는 가장 늦게 운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GLBT라고 부른다. 트랜스젠더는 운동에 참여도 늦고 ENDA를 위해 동성애자 단체 및 활동가가 엄청 열심히 했으니 일단 트랜스젠더를 빼고 법을 제정하자. 이것이 아라보시스의 주장이었다. 이 글에 수잔 스트라이커는 매우 유명한 글을 한 편 쓴다. 아라보시스의 역사 인식 및 서술은 백인 중산층 게이 우월주의며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 더 자세한 내용은 http://goo.gl/54tkG 참고.
지금 이 글에서 문제 삼는 지점은 아라보시스의 인식이다. LGBT/퀴어 공동체를 게이/동성애자 공동체로 환원하고 전유하는 인식론을 문제 삼으려고 한다.
이곳에서도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1990년대 등장한 초동회 이후의 역사를 ‘동성애자 인권운동’으로 기술한다면 이것은 명백하게 역사 날조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그 시기를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시작한 시기로 잘못 기술하고 있지만 그 시기는 LGBT/퀴어 인권운동이 본격 등장한 시기다. 그 시기부터 함께 한 활동가 중엔 동성애자도 있었지만 트랜스젠더도 있었고 바이/양성애자도 있었다. 혹은 어느 쪽으로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는 이들도 있었다. 즉 그 시기 운동은 동성애자만 혹은 동성애자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LGBT/퀴어가 함께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니 이 역사를 ‘동성애자 인권운동’으로 명명한다면 다양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 문제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역사 날조’다. 그리고 어떤 역사를 특정 범주, 여기선 동성애자의 역사로 전유하는 것 또한 동성애규범성의 문제다.
동성애자 공동체는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곳은 어떤 공간인가? 혹은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가? 만약 소위 동성애자 공동체에 비동성애-비이성애자가 함께 한다면 그 공동체를 동성애자 공동체로 불러도 괜찮을까? 즉, 다수의 동성애 비트랜스젠더로 추정하는 사람과 소수의 바이 비트랜스젠더, 비/이성애 트랜스젠더가 함께 있다면 그 공동체를 동성애자 공동체로 불러도 괜찮을까? 현재 정서로는 대충 동성애자가 많으니 동성애자 공동체로 부르는 듯하다.
그럼 예를 조금만 바꿔보자. 한국 사회는 이성애규범성, 이성애중심주의가 상당한 사회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를 이성애자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건, 적어도 이곳에 오는 분이라면 동의할 것이다. 한국을 이성애자 사회라고 부르는 순간, 현존하는 무수한 퀴어가 모두 삭제된다. 행여라도 존재한다면 그는 한국인이 아니어야 한다. 이성애자 사회라는 명명은 명백히 잘못된 언설이다. 동성애자 공동체란 언설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등장한 비이성애자 공동체는 동성애자 공동체가 아니라 비이성애자 공동체였고 비이성애자 공동체다. 동성애자 분리주의자들이 따로 모임을 만든 적은 있을지 몰라도 흔히 상상적 형태로 얘기하는 공동체는 언제나 비이성애자 공동체(였)다. 소위 게이의 역사를 알려주는 업소는 mtf 트랜스젠더-바이가 함께한 공간이었고, 레즈비언 공간 역시 바이-트랜스젠더가 늘 함께했다. 다른 말로 역사와 현재를 꼼꼼하게 따졌을 때 소위 동성애자 공동체라는 곳은 없다. ‘여기 이곳이 동성애자 공동체’라고 주장하는 담론이 있을 뿐이다. 동성애중심주의적 공동체는 있을 수 있지만 동성애자 공동체는 거의 없다. 동성애규범적 공동체는 있어도 동성애자 공동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곳은 별로 없다.
역사와 공동체를 명명하는 작업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 어렵다. 그래서 때때로 트랜스젠더 역사, 트랜스젠더 공동체라는 명명을 사용한다. (물론 나는 ‘동성애자 공동체’라는 언설을 사용하는 것과 ‘트랜스젠더 공동체’란 언설을 사용하는 건 그 층위가 다른 문제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명명과 언설이 위험하다는 것은 인식했으면 한다. 이런 위험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정말 이상한 식으로 글이, 인식이 전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절주절: 잠과 음악과 숙면마스크, 허수경, 나의 것이 아닌 글과 앎

01
요즘 음악을 틀어 놓고 잠든다. 잠귀가 밝은 편이지만, 음악 없인 잠들 수가 없어서. 그리고 음악으로 인해 숙면을 취할 수 없다. 악순환.

예전부터 음악을 틀어 놓고 잠들었던 게 아니다. 얼추 열흘 혹은 일주일 전부터 생긴 습관이다. 음악 소리가 들려야 잠들 수 있다. 잠드는 중간에 잠깐 깨었을 때 음악소리조차 없이 침묵만 무겁게 떠돈다면 불쑥 어떤 감정이 튀어 나올까 두려워 한다. 음악소리라도 나를 감싸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이런 기대로 잠든다. 그리고 음악소리는 잠드는 순간에도 나를 일깨운다. 잠들 수도 없고 잠들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게 늘 깨어 있는 상태로 잠들어 있고, 잠들어 있는 상태로 깨어있다.

어제 ㅈ님께 지나가는 말로 요즘 잠을 잘 못 잔다는 얘길 했는데 …. 오늘 ㅈ님께 전해줄 게 있어 잠깐 만난 자리에서, 무려 매우매우 귀여운 숙면마스크를 내게 선물로 주셨다!!! 정말 고마워요! (근데 여기 들어오시려나? ;;; )

02
네 마음은 이미 떠났니?
내 마음아, 너도 진정 가는 거니?
-허수경, 마치 꿈꾸는 것처럼

03
내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면 그건 나의 즐거움도 있지만 이런 나를 지지해주고 독려하는 다른 트랜스젠더들, 퀴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공부는 내게 일종의 즐거움이자 욕망이며, 의무이자 권리다. 그러니 나의 앎은 결코 나 혼자 독점할 수 있는 앎이 아니며 나 혼자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앎이 아니다. 많은 이들의 지지와 격려 속에서 그네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얻는 소중한 자산이다. 이 언어를 팔아 내가 먹고 살고, 글쓴이 자리에 언제나 나의 이름만 들어간다. 하지만 글쓴이 자리의 나머지 여백엔 무수하게 많은 이름들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 모든 문장에 나 아닌, 나인 무수한 이름들이 꿈틀거리며 숨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