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서비스 회사는 국가와 직접 협상할 날이 올까

검색 서비스 회사가 권력이 된다면 국가의 정책도 바꿀 수 있을까? 검색 서비스 회사가 독점적 지위를 가질 때 그 지위가 국가의 권력, 국가의 정책도 바꿀 수 있을까? 혹은 만약 사람들이 자신이 생활에서 직접 겪는 사건이나 주변 사람의 언설보다 검색 결과를 더 신뢰한다면 검색 서비스 회사는 국가와 직접 협상을 할 수 있을까?
한국은 특정 웹사이트에 접속하는 것 자체를 막으며 인터넷을 통제한다면 중국은 여기에 특정 검색 결과는 제외시키도록 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예는 천안문 사태를 검색하면 그 결과가 나오지 않거나 중국 정부에 유리한 결과만 나오는 식이다. 이 조건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중국에서 검색 서비스 사업을 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와 거의 동급이다. 구글은 이 정책에 동의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고 그래서 중국사무실을 철수한 바 있다. 카더라인지 사실인지는 내가 직접 확인하지 않아 확실하지 않지만, 천안문 사태 등을 반복 검색하면 그 결과는 나오지 않아도 정부 당국에서 이를 알고 연락이 온다나 어쨌다나, 뭐 이런 이야기도 있다. 패킷 감청을 하고 있다는 뜻인데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단순히 중국 정부만이 아니라 많은 국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뜻이다).
여기서 내가 집중하고 싶은 부분은 정부가 그 자신이 만든 ‘사실’이 있음에도 이와 다른 내용의 문서가 ‘검색’(!)되는 것을 두려워 한다는 점이다. 왜 정부의 공문서보다, 교과서와 같은 지식보다 검색 결과를 더 두려워하는 것일까? 이것은 중국 정부가 검색 결과, 그리고 ‘내’가 직접 찾은 자료를 주변 사람, 정부 등이 주장하는 자료보다 더 신뢰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단순히 ‘다른 정보’가 알려지길 바라는 수준이 아니라 검색 결과로 찾은 정보가 상당한 힘을 가질 수 있음을 알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영국에서 조사한 자료(http://goo.gl/ytzwcM)에 따르면 18-24세 사이의 77%, 성인의 반 이상이 주변 사람이나 가족의 답변보다 검색 엔진의 답변을 더 신뢰한다. 나 역시 어떤 지식이나 정보는 주변의 설명도 듣지만 검색해서 확인한 다음에야 어느 정도 믿는 경우도 있다. 아울러 “일단 검색해서 확인 좀 하고 SNS를 사용하라”는 말은 인터넷 시대의 중요한 ‘조언’으로 통하기도 한다.
만약 독점적 지위의 검색 서비스 회사(G라고 부르자)가 어떤 국가의 정책을 바꾸기 위해서 검색 결과를 일부 수정한다면 일개 회사는 국가와 직접 협상할 수 있을까? 관광산업으로 재정을 꾸리는 A라는 국가를 가정하자. A의 정책 중엔 G에 크게 불리하진 않지만 유리하지도 않으며, 조금만 개선하면 G의 이윤에 크게 도움이 될 조항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조항은 걸고 넘어지기에 따라 인권이나 환경보호 등의 이슈와도 밀접하다고 가정하자. G는 A에게 해당 조항을 수정할 것을 요청하고 다각도로 로비를 펼치지만 A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G는 검색 결과를 조금 바꾸는데, A에서 일어난 다양한 절도 사건, 관광객이 겪은 불편이나 불만을 검색 결과 상단에 배치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A는 여행하기에 위험한 국가로 인식되고 관광객 유입이 대거 줄어든다. 혹은 여행하기 좋은 나라를 검색한 결과에 A가 빠진다거나 여행하기에 위험한 나라에 A의 사건사고가 노출되는 식이라면? A는 어떤 선택을 할까?
농담 같겠지만 비슷한 일이 있었다. 상황은 다르다. 북유럽의 어디였던가, 일부 뉴스 회사는 구글뉴스가 자사의 뉴스를 링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광고 수입을 얻으니 구글이 자사에 일부를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고소 자체는 황당했다. 웹사이트를 링크하지 말라는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고, 구글뉴스를 통해 해당 뉴스 사이트는 상당한 트래픽과 구글광고 수익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뉴스 회사가 속한 나라에서 소송이 진행되었고 (놀랍게도) 뉴스 회사가 승소했다. 1차 조치로 구글은 해당 뉴스 사이트를 검색에서 제외했다. 배상 문제 등이 있으니 이것은 일어날 수도 있는 조치다. 그리고 뉴스 사이트는 방문자가 폭락했다. 얼마 안 지나 구글과 해당 뉴스 사이트는 잘 합의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합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어쩐지 뉘앙스로는 구글에 결코 불리하지 않은 결과인 듯했다.
내가 가정한 A의 경우와 뉴스 회사는 전혀 다른 경우다. 현재 구글은 상당히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스탯카운터에 따르면 지난 1년 간 구글이 전세계 검색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http://goo.gl/PB3BI3 ) 국가와 협상할 힘을 갖고 있진 않다. 국가와 협상할 힘이 있다고 해도, 아마 앞으로도 더 오래 그렇게 하진 않을 것이다. 자사의 이미지를 위해, 그리고 자사의 이득을 위해. 하지만 언젠가 구글이 정부보다 더 강력한 권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망상이겠지만.
구글 서비스에 종속되어 크롬북도 편하게 잘 쓰는 나는 더 많은 사람이 구글을 감시하길 바란다. 구글의 새로운 서비스를 없애자는 게 아니라 더 투명한 정책과 더 많은 논쟁을 통해 새로운 서비스가 잘 살아나면서도 감시의 끈 또한 지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웹으로, 인터넷으로 더 복잡하게 연결된 지금, 권력을 사유할 때, 혹은 국제 관계를 고민할 때 검색사이트(그리고 SNS)를 제외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국가나 국경과 함께 검색 사이트, 혹은 웹서비스를 또 다른 축에 두고 사유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구체적으론 어떻게? 글쎄..

역사, 혐오, 권력

역사적 기록물을 추적하거나, 역사를 기록한 글을 읽노라면 두 가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하나는 혐오의 역사. 혐오는 지금도 존재하지만 그 시절 어쩌면 저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싶은 혐오 발화를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발화는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니다. 그 심한 발화는 지금도 재생산되고 있는 현재의 것이기도 하다. 혐오는 역사적 사건이고 재생산되는 담론이다.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 발화, 바이를 향한 혐오 발화 모두 역사적 사건이다. 과거의 적나라한 혐오 발화는 지금 이 시기에도 유통되는 내용이다. 또 하나, 역사적 기록물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많은 경우 특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자신의 의견을 출판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의견을 글로 표현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았거나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인종적, 계급적 토대가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지금 시점에서 접할 수 있는 과거의 많은 기록은 이런 정치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과거의 많은 혐오 발화는 출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발화다. 이 발화가 특정 집단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1970대부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트랜스젠더 혐오 발화는 지금까지 물리적 형태로 흔적이 남아 있는 기록물을 쓴 사람의 발화다. 기록물을 남기지 못 한 사람의 의견은 지금 전해지지 않거나 간접적으로 전해질 뿐이다. 그러니 역사를 마주한다는 건 혐오의 역사성과 출판물의 특권/권력을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어려운 일이고 재밌는 일이다.

*
이브리 님의 바이 강의를 듣고 떠오른 단상.

그냥 꿍얼꿍얼: 우리는 모두 똑같은 권리를 갖습니다?

인권과 관련해서 “우리는 모두 똑같은 권리를 갖습니다”란 구절이 있다. 종종, 어쩌면 매우 자주 이 구절을 접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거짓말…”이라고 구시렁거린다. 물론 “거짓말”이란 표현은 불편함을 표현하는 감정이지 정확한/적확한 논평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권리를 갖습니다”란 구절이 이른바 ‘당위’란 건 안다. 현재 상황을 기술하는 구절이 아니라 지향해야 하는 방향성을 기술한 구절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이 내가 혹은 인권 운동이 지향해야 하는 방향인지는 잘 모르겠다. 모두가 똑같은 권리를 가지면 다 된 것인가?
좀 과장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도 모두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 권리는 갖고 있다. 하지만 그 권리를 동일하게 사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다. 당위적 권리가 없어서라기보다 권리와 늘 같이 작용하는 권력 개념을 무시하는 게 문제다. 단적으로 나와 박근혜는 같은 권리를 가진다. 나와 이건희도 같은 권리를 가진다. 하지만 내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와 박근혜나 이건희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의 실천 양상은 다르다. 때로 박근혜와 이건희는 실천하지 말아야 할 일을 권리로 실천한다. 과소권리도 문제지만 과잉/과도한 권리 실천도 문제란 얘기다. 누구의 경험을 기준으로 어떤 권리를 가져야 하는지, 권리를 투명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물어야 한다. 즉 내가 트랜스젠더 정치학을 말하는 것을 표현의 자유로 말하는 것과 대형 교회 목사가 트랜스혐오 발화를 표현의 자유로 말하는 것은 결코 동일한 실천이 아님에도 이를 등가의 행위로 여기는 태도가 문제란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은 권리를 가져선 안 된다. 권력 개념을 탈락한 권리 개념은 정말 공염불일 뿐이다.
…라고 자주 구시렁거린다. 그냥 꿍얼꿍얼, 꽁알꽁알거리는 게 지겨워서 이렇게 메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