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엔케 글, 그림. [행복한 폐인의 하루] 이영희 옮김. 서울: 열린책들, 2004.
책방에 이 책이 있다. 얼추 일주일도 더 전에 들어왔는데, 의외로 아무도 안 사갔다. 이 책이 들어온 날, 꽤나 재밌을 거 같아서 살까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만뒀다. 그래도 왠지 재밌을 거 같아 어젠 일을 하면서 이 책을 읽었는데… 아, 정말 재밌다.
몇 년 동안 ‘아무 일도 안 하는 일’을 하며 지내는 하로가 주인공. 하로와 거의 매일 산책을 다니는 단짝 프랑크. 하로와 동거하는 주지. 주지의 단짝 민헨 콜마이어가 주요 등장인물. 번역 책 제목은 “폐인”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용어로는 잉여인간에 가깝다. 스스로를 잉여인간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보내는 찬가. 그리고 무척 즐거운 책. (하지만 모든 가사노동과 경제적 지원은 주지가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 좀 짜증이 나기도.)
아래엔 특히나 인상적인 구절을 골랐는데, 고르는 거 정말 힘들다. 정말이지 모든 대화를 옮기고 싶었으니까.
프랑크: 무슨 일 하니?
하로: 피할 수 있는 한 피하지.
p.27
주지: 빨리 가자. 서둘러.
하로: 걱정 마. 우린, 너무 늦지 않게 적당히 지각할 거야.
p.38
프랑크: 네 책은 어떻게 됐니? 오늘은 얼마나 썼니?
하로: 빈 페이지 하나… 어쩌면 내일은 두 페이지 해낼지 모르지.
p.59
주지: 하로가 미안하다고 그러긴 해.
민헨 콜마이어: 그 문제에 있어서 하로가 하는 건 그것밖에 없지.
p.76
프랑크: 난 무슨 일이든 해야 해.
하로: 넌 빈둥대는 힘이 전처럼 활발하지 못해.
p.84
주지: 또 누워서 빈둥대며 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하로: 그렇지 않아! 난 벌써 한판 실컷 잤어…
p.85
주지: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하로: 그 이상 뭘 더 바라?
p.96
주지: 너, 하루에 [담배] 얼마나 피우니?
민헨 콜마이어: 두 개.
주지: 두 갑?
민헨 콜마이어: 라이터 두 개.
p.101
[무덤 가에서]
프랑크: 우리도 언젠가 여기 묻히겠지…
하로: 죽는 건 그리 나쁜 일이 아닌가 봐.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리 없잖아?
p.172
하로: 시간이란 없어. 시간이 흐른다는 건 은행 직원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야. 이자 때문에…
p.242
하로: 정신이 말똥말똥할 때보다 더 심한 숙취 상태는 없어.
p.267
하로: 오늘 밤에는 우리 집에서 자자.
프랑크: 주지가 날 좋아하니? 내가 가면 좋아해?
하로: 네가 돌아갈 때도 좋아하던 걸…
p.276
카티: 주지는 그래, 행복하대? 그 하로라는 놈은 하는 일 없이 놈팡이 짓만 하잖아?
민헨 콜마이어: 그래도 그 짓은 부지런히 해.
더 인용하고 싶지만, 자칫 저작권에 걸릴까봐 여기서 자제… 하하. ㅡ_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