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정은 지장경에서 그리움이란 단어를 발견하고 울었다고 했다. 보살도 그리움에 울었다고 했던가, 그리움으로 윤회한다고 했던가….
북향인 사무실에서 버틀러를 읽다가 (짝)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하고, 상당히 위로 받았다. 그러며 진이정이 떠올랐다.
만약 무언가를, 발달단계처럼, 어떤 단계로 나눠서 설명해도 괜찮다면, 우울증을 사랑의 “완성”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울증이 자기처벌이 아니라 자기보상의 형태라면, 대상을 상실한 혹은 대상에게 다가가길 포기한/고백하지 않는 사랑의 우울증은 가장 멋진 형태의 “보상”임을 깨달았다. 당신과 내가 합쳐진 상태, 더 이상 당신과 나를 구분할 수 없는 상태. 더 이상 그리워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은 상태…. 하긴, ㄹㄲ은 (“이성애”) 사랑 자체가 우울증이라고 말했지만[물론 이건 전후 맥락을 몽땅 무시하고 쓴 것임].
삶을 이끌어 가는 힘은 그리움인 것 같다고…. 그리움만이 우리를 윤회케 한다고 했던가, 기억이 잘 안 난다. 당신을 그리워하는 힘, 우울증의 윤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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