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의 어떤 일, 선택과 선택 사이

10년도 더 지난 일. 그때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날 버스에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으로 여겨지는 사람은 나 정도였다. 평소와 다른 귀가였을까?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만 가득한 것 같았던 버스. 창백한 등에 비친 사람들의 검은 얼굴.

나 역시 그 흔한 표정 중 하나로 창밖을 보며 집으로 가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어디 즈음이었을까? 내 앞에 서 있는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나처럼, 시내 한 복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그런 평범한 모습의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 둘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수줍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나중엔 눈을 떼지 못 하고, 주변을 잊은 듯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수줍은 표정들. 그 표정이, 어렸던 나에게도 참 예쁘게 다가왔다.

나는 그 둘보다 먼저 내렸다. 하지만 그 둘을 마치 오늘 저녁 버스에서 본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마치 새로운 궁금증처럼 궁금해 한다, 그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둘은 누구 하나 먼저 내리기 전에 서로의 연락처를 물었을까? 끝내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가슴에 품고 말 없이 내렸을까? 어느 역에서 같이 내려 차라도 같이 마시며 조근조근 얘기를 나눴을까? 아님 그저 버스에서 내리면서 잊어야 하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우연이라고 체념하며 헤어졌을까? 나는 늘 궁금했다, 그 둘의 인연이. 내가 버스에서 내린 이후의 상황이.

그리고 자문한다.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쉽게 답할 수 있다. 나는 아마, 그냥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상대방이 먼저 다가오길 바라지만 내가 먼저 말을 걸 용기는 없어, 그냥 나 자신을 다독이고 체념하며 그냥 내리길 선택하는 그런 삶.

… 돌이켜보면 내 삶은 항상 이런 모습이었다. 결국 내가 먼저 무언가를 할 용기가 없어 밍기적거리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뒷걸음질 치고 마는 삶. 이런 삶이 부정적인 뉘앙스로서의 뒷걸음이라고 믿진 않지만, 그래도 뒷걸음질 친 건 확실하다. 사실이 그러하다. 나는 늘 회피하고 도망치고 머뭇거리다 말았다.

그 둘은, 10년도 더 지난 과거의 그 둘은 어떤 삶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내가 정말 궁금한 건, 그 보다 더 오래 전 그 어느 상황에서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아니, 그렇게까지 멀리 갈 것도 없다. … 난 어쩌면 내가 선택한 적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선택한 적 없는 그런 삶을 꿈꾸며, 그 꿈 속에서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한 해를 살아가기: 회의, 트랜스젠더 운동, 추억하기.

01
어제 오후,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한 통 받고선 오늘 오전에 회의를 하나 잡았다. 가까운 곳이지만 가까이 산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회의를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후, 밥을 먹고 나니 시간이 애매하다. 아카이브 일을 하러 가려니, 도착해서 후치를 꺼내면 알바를 하러 갈 준비를 해야 할 거 같았다. 그래서 그냥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02
玄牝에 있는 물건들 중, 몇 가지를 제외하면 모두 10살은 먹은 거 같다. 玄牝에 있을 때마다 애용하는 음악재생기는 1997년 겨울에 산 거다. 카세트테이프 두 개를 재생할 수 있는 제품으로, 당시 가격은 무려 88,000원. 만 원 정도를 더 주면 반복재생 기능이 있는 제품을 살 수 있었지만, 만 원이 없었다. 그래서 A면이 다 돌아가면 테이프를 꺼내서 B면으로 바꿔야 한다. 얼추 12살인 이 기기. 재밌게도, 음악을 들을 때면 테이프를 재생할 때가 가장 정감있다. 뭔가 포근하다. 이제는 CD로, 아니 CD에서 mp3를 추출해서 mp3p로 듣는 일상이지만, 테이프로 음악을 들을 때면 선명한 느낌은 없어도 따뜻한 느낌은 있다. 이건 모두 추억, 향수 때문이겠지.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감쌀테니, 이건 순전히 나의 추억, 기억, 경험때문이다. 가끔은 길에서 mp3p말고 테이프 재생기를 가지고 다니면 어떨까 하는 감상에 빠지기도 한다. 하하;;

근데 내겐 무려 20년은 된 거 같은 기기가 있다. ‘아하’라고 불렸던 휴대용 테이프 재생기. 처음부터 내건 아니었고, 다른 사람이 사용하던 걸 물려받았다. 테이프를 들으려면 소리가 늘어져서 힘들지만, 라디오를 듣는덴 지장이 없다. 이런 제품을 모르는 사람에게 보여주면 골동품 취급할까? 신기해할까?

03
그래도 오래되기로는 지금 내가 사는 집, 玄牝이 가장 오래되었을 테다. 어쩌면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자려고 누워 있노라면 천장이, 벽이 앓는 소리도 들린다. 아침엔 벽이, 천장이 찌익, 찌직, 쿠웅, 하는 소리를 들으며 깨어나기도 한다. 설마 자고 있는 사이에 무너지는 일은 없겠지? 하하.

04
어느 동네가 유서 깊지 않겠는가. 지금 내가 사는 동네만 역사와 이야기가 가득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내겐 특별하다.

05
내가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한 단체는 이제 형태를 바꿀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런 얘기는 나중에,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쓰기로 하자.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지금은 묻어두기로 하자. 기록은 다 남아 있을 테니까.

아울러 나는 이제 그 단체 소속으로 나를 소개하는 일은 없을 듯하다.

06
아침 회의는 그 단체에서 하고 싶었지만 못 했던 활동과 관련있다. 회의는 올해 사업으로 어떤 일을 기획하고 있는데 같이 회의를 했으면 한다는 거였다. 즉,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데 같이 얘기를 나눴으면 한다고 해서 잡은 회의였다. 프로포절만 선정되면 정말 잘 할 단체고, 나 역시 어떻게든 같이 하겠다고 말하겠지?

기쁜 일이다. 정말로!

07
어쩌면 내가 바랐던 형태로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걸까? 그런데 내가 바란 형태란 건 어떤 거지?

08
용산과 이태원 지역을 중심으로 트랜스젠더의 역사를 홅으면,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가 구분되었던 적은 없는 듯하다. 한 동네 주민으로 살며 서로 돕고 싸우고 친목모임을 꾸리고 욕도 하면서… 그냥 세상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 이곳에도 있(었)다. 이런 역사, 그리고 현재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소위 말하는 정체성이라는 건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정체성이라는 범주 구분이 개인의 경험과 개인들 간의 친밀감을 단절내는 건 아닐는지. 저 사람과 이 사람은 다르다는 식의 구분짓기, 범주를 나눠 설명하는 방식이 결국 ‘경험’과 ‘공동체’를 논쟁과 싸움의 장으로 만드는 건 아닐는지. 간단하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정체성이라는 범주가, 집착할 수록 폭력적으로 변하는 건 확실한지도 모른다.
(오프라인으로도 만나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렇게 말한다음, “아님 말고”라는 말을 덧붙일 거란 걸 알겠지? 흐흐.)

09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건, 그런데 결국 따뜻했거나 아팠거나 어쨌거나 추억으로 각색된다는 의미겠지. 1997년 말에 산 기기도 용산과 이태원의 역사도 모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각색하는 이야기들이다. 어떤 식으로 각색할 것인가? 관건은 이것이지만, 이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아무려나 올해의 나는 또 어떤 일을 하려고 아둥바둥할까? 생활비가 나오는 일, 생활비 정도는 아니지만 공과금에 보탤 수는 있는 정도의 활동비를 주는 일, 이런저런 돈을 주진 않아도 내가 좋아서 일단 하고 보는 일… 아니다. 결국 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들이다. 그리고 상대방은 언제나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려고 애써서 고마울 뿐이고. 위태롭지만, 위태롭다고 광고를 하니 그냥 죽으란 법은 없는지 주변에서도 챙겨준다.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이다.

올해는 또 어떻게 살아갈까?

기록-기억: 2009년 7월 22일을 기억하는 한 방법

대여섯 살 무렵 살던 집에선 석유풍로로 음식을 했다. 풍로를 사용할 때마다, 석유를 채울 때마다 석유 냄새가 진동했다. 그래서일까? “휘발하다”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석유풍로가 같이 떠오른다. 아마, 석유와 휘발유를 헷갈렸기 때문이겠지. 정유소의 냄새는 싫지만 “휘발하다”란 단어는 좋다.
(비슷한 이유로, 사실 “풍로”보단 “곤로”란 말을 더 좋아한다.)

“기억이 휘발하다”라고 쓴다면 명백한 잘못이겠지. 하지만 이 표현을 좋아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형태를 바꿔가는 기억의 속성과 “액체에서 기체로 변하는 작용”이란 휘발의 정의가 닮았기 때문이다. 기억은 ‘왜곡’하지 않는다. 형태를 바꿔갈 뿐이다. ‘왜곡’이란 원본, 절대적인 진실을 가정하는데, 도대체 누구의 기억을 원본으로, 절대적인 진실로 말할 수 있을까? 모두가 “기억”한다는 점에서 “왜곡”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기록은 그 자체로 기억이자 기억의 시작이다.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변화때문에,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기억 간의 간극을 확인하는 일은 즐겁다. 기억이 어떤 식으로 휘발했는지 어림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몇 가지를 기록하기 위해서다.

사사오입보다 더 한 방식으로 미디어관련법이 통과되었음을 기록하자.
이 와중에 대기업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는 금산분리정책 완화 법안도 통과되었음을 기록하자.
경찰이 시위를 진압한다고 테이져건을 쏘아 사람이 맞았다는 사건도 기록하자.
부산에서 폭우로 난리였을 때, 구의회 의원들은 해외관광을 떠났다는 사건도 기록하자.

이 외에도 기록할 일은 무수하다. 시발점으로서, 최소한 이 정도는 선별해서 기록-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