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친구를 만나 같이 저녁을 먹었다. 박사과정인 친구가 말하길, 학위논문은 조금이라도 젊을 때 쓰는 것이 좋다고 했다. 나이가 들 수록 집중도가 떨어질 수도 있거니와 ‘이 나이 먹도록 나는 뭐했나’라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고 했다. 박사과정을 정말 빨리 끝낸다면 30살 정도에 학위를 취득할 수도 있지만 이런 저런 일을 하다보면 40살 정도에 박사학위를 취득할 때도 많다. 대부분의 학제에서 연구성과는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에 나오기에 학위취득이 늦을 수록 자괴감도 커지기 마련. 그래서 친구와 얘기를 나누던 나는 부끄러운 농담을 했다. “난 이미 세 권이 있는데…” 아하하. ;;;
문학전공(국문이나 영문학은 아님)인 친구의 상황과 나의 상황은 확실히 다르다. 친구는 나를 부러워하지만 나는 그 친구를 부러워한다. 친구는 기초부터 단단하게 다지고 토대를 굳건히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최소 100년 이상, 길게 잡으면 몇 백 년의 역사를 지닌 학제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다. 기존 연구가 워낙 방대하여 최신 이론을 공부하기에 앞서 기존의 연구를 검토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학제에서도 이것을 중시한다고 들었다(석사학위 논문에선 최신 이론을 못 쓰도록 하는 식이다).
나는? 학제 연구로서 트랜스젠더 이론이나 퀴어 이론의 역사는 20-30년 정도다. 그나마 이 역사는 미국의 경우다. 한국은? 학제에서 퀴어 이론이나 트랜스젠더 이론의 역사는 없다. 개별 연구는 있어도 학제 형태, 학회 형태는 없다. 그래서 조금만 알아도 관련 글을 쓸 수 있다. 내가 대표적이다. 난 늘 너무 서둘러 무언가를 출판하고 있다. 나 자신의 기초를 단단하게 다진 후 뭔가를 써도 좋을 텐데, 바닥을 다지기도 전에 출판부터 하고 있다. 사실 한국에서 트랜스젠더 이슈를 전공 삼아 글을 쓰는 사람이 10명만 되었어도 내가 이렇게 글을 쓰지 않았으리라. 내게 기회가 오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늘 부끄럽고 늘 조급하다. 글을 쓸 때마다 부끄럽고, 기존의 글을 서둘러 덮어버리기 위해 조급하다.
나의 상황과 상관없이, 기존의 학제 권위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페미니즘, 퀴어이론, 트랜스젠더이론의 장점이다. 학위라는 자격증으로 능력을 판단하지 않는 것, 이것은 확실히 좋다.
그나저나 가을에 박사과정 지원하려면 논문 주제를 정해야 하는데 무엇으로 하나… 지금까지는 지도교수의 전공과 나의 관심을 버무려, 영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근대적 몸의 형성 과정을 살필 계획이었다. 그런데 학과가 바뀌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차피 논문을 쓸 때면 주제가 많이 변할 테니 그냥 지금 아이디어를 제출할까? ;;;
아.. 그런데 그 전에 등록금부터 구해야 하네. ㅠㅠ 누가 제게 1억 원만 빌려주시면 학위논문의 한 쪽에다 감사의 글 크게 실어드리겠습니다! 후후. ㅠㅠㅠㅠㅠ 아님 다른 요구라도.. 크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