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 집중하는 단체

지난 주에 모 단체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참 오랜 만에 하는 강의라 떨렸는데 어떻게 무사히 끝났습니다. 강의 내용은 젠더폭력을 중심으로, 트랜스젠더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의 교차점을 모색하는.. 뭐, 대충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자리는 재밌었고 제 얘기가 끝나고 이어진 토론도 흥미로웠고요.
그 단체는 한국에서 폭력을 전문으로 다루는 몇 안 되는 단체인데요.. 끝나고 모 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한국에서 폭력을 전문으로 다루는 단체와 활동가를 향한 부정적 이미지가 상당하다는 것과 함께, LGBT/퀴어 운동에서도 폭력과 관련한 단체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한국 LGBT/퀴어 운동 및 단체 중에서 폭력에 초점을 맞춘 곳은 없는 듯합니다. 기본적으로 인권을 얘기하고 권리를 얘기합니다. 어떤 곳은 차별과 억압 상황을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자동으로 폭력과 관련한 이슈에 집중할 법도 한데 딱히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이것은 저의 인상일 뿐이라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제 인상이 잘못되었다면 언제든 얘기해주셔요).
이를 테면, 커뮤니티 내부의 성폭력 이슈와 커뮤니티와 상관없이 발생하는 성폭력 이슈가 상당히 중요할 텐데도 이 이슈에 완전히 집중해서 활동하는 곳이 별로 없는 듯합니다(한국레즈비언상담소에서 관련 논의를 진행하고 있긴 하지만…). 성폭력만이 아니라 LGBT/퀴어를 향한 다양한 혐오 폭력이 꽤나 빈번합니다. 그런데 이 이슈에 집중하는 단체가 없다는 건 때때로 신기하기도 합니다. 물론 현재 상황은 한 단체에서 거의 모든 이슈를 담당하고 있죠. 문화사업도 하고 상담사업도 하고 언론모니터링도 하고 연구사업도 하고 때때로 정치로비도 하고… 사실 각 이슈는 별개의 단체에서 집중해서 다뤄도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다 하고 있죠. 심지어 상당히 멋지게 하고 있습니다. LGBT 관련해서 몇 개의 단체가 있고 각 단체마다 운동을 하는 방식이나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이슈를 다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폭력에 집중하는 단체만 따로 생겨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폭력에 집중하는 단체가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협의하여 공동의 단체를 설립하는 과정을 진행할 수도 있겠지요. 이것은 기존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중요한 전략일 수 있습니다. 혹은 처음부터 다른 기획 속에서 다르게 작업할 수도 있고요. 어떤 식이건 폭력 이슈에 집중하는 단체가 있으면 좋겠는데요… 네, 압니다. 이렇게 바람을 품기 시작하면 끝이 없지요. 그럼에도 폭력 이슈에 집중하는 단체가 있으면 좋겠어요. 정말 필요하니까요.

방학인데…

01

방학이면 여유가 있어야 할 텐데… 학기 중일 때보다 더 바쁘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누가 설명 좀 해줬으면 좋겠다. -_-;;
뭐, 설명이 더 무엇 필요하겠어. 긴장이 풀렸고 욕심이 많아서 그렇지. 끄응.
(기존 세미나 두 개에 방학 세미나 하나가 늘었고 또 하나가 더 늘어날 예정..)
02
방학 동안 글을 쓸 계획을 세우며 욕심을 좀 냈는데 그것이 실현할 수 없는 과욕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과감하게 줄이고 줄여 두 개로 정리했는데… 그 두 개도 좀 많다. 하나는 학술지에 투고할 원고고, 다른 하나는… 아직 비밀. 이것은 원고는 아니고 좀 다른 작업인데 극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는 기획. 때가 되면 밝히겠지요(당연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작업입니다). 후후.
아시잖아요? 전 제가 작업한 결과는 열심히 홍보한다는 걸. 으하하 ;;;
03
<여/성이론> 2012년 여름호에 수잔 스트라이커를 소개한 원고가 실렸는데.. PDF로는 아직 안 올라와서 소개를 못 하고 있다는.. 하하. ;;;
원고 어디에도 기록하지 않았지만, 원고 초안을 쓰고 마지막 수정본을 넘기는 과정에 아버지 사고가 있었다. 그 원고를 다시 볼 때마다 몸이 많이 복잡할 것 같다.
04
이미 아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매우 중요한 사이트가 생겼습니다.
트랜스젠더 인권과 관련한 의료적, 법적 정보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를 살펴 보면 만드느라 정말 고생 많았겠다는 느낌이 팍팍 듭니다. 정말 잘 만들었더라고요.
(저도 다른 분이 알려줘서 알았습니다.)
05
퀴어락과 한국퀴어백과사전.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잘 가져갈 수 있을까가 고민.
며칠 전 채윤 님과 얘기를 나누다 농담으로, 박사학위 끝나면 퀴어락에 취직할 거라고 했다. 흐흐흐. 근데 퀴어락은 현재 KSCRC에 속한 팀이고(퀴어락이 분명 별도의 운영 체계를 갖추고 있긴 하지만, 별도의 단체가 아니라 KSCRC가 진행하는 여러 사업 중 하나입니다) 월급을 줄 수 있는 여건은 전혀 아니고.. 더구나 난 이미 운영위원이고 운영위원은 어떤 형식으로 취직할 수 있을까.. 아하하. 그럼에도 퀴어락은 내가 상당한 애착을 갖는 활동이다. 소속을 적어야 할 때면, 어떤 의도가 없는 한(캠프 트랜스에 쓴 소속이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었죠…), 퀴어락을 적을 정도니까. 아카이브 작업이 상당히 매력적이고 아카이브 자체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럼 이 활동을 제 고민과 어떻게 연결하고 더 발전시킬 수 있을까? 나의 고민과 퀴어락이 별도의 기획이란 뜻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조화롭고 더 흥미롭게 만들 수 있을까가 고민이다.
06
이번 주 초, 모 단체 활동가와 얘기를 나누다가… 다시 트랜스젠더 단체를 만든다면 쉼터 중심으로 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블로그에도 몇 번 적었던가? 이태원을 기반으로 상담 및 쉼터에 초점을 맞춘 운동을 해야겠다는 고민.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니, 쉼터를 마련할 건물이 없고, 건물을 마련하고 단체를 운영하고 상근자에게 월급을 줄 돈이 없다는 것. 난제 중 난제다.

한 해를 살아가기: 회의, 트랜스젠더 운동, 추억하기.

01
어제 오후,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한 통 받고선 오늘 오전에 회의를 하나 잡았다. 가까운 곳이지만 가까이 산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회의를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후, 밥을 먹고 나니 시간이 애매하다. 아카이브 일을 하러 가려니, 도착해서 후치를 꺼내면 알바를 하러 갈 준비를 해야 할 거 같았다. 그래서 그냥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02
玄牝에 있는 물건들 중, 몇 가지를 제외하면 모두 10살은 먹은 거 같다. 玄牝에 있을 때마다 애용하는 음악재생기는 1997년 겨울에 산 거다. 카세트테이프 두 개를 재생할 수 있는 제품으로, 당시 가격은 무려 88,000원. 만 원 정도를 더 주면 반복재생 기능이 있는 제품을 살 수 있었지만, 만 원이 없었다. 그래서 A면이 다 돌아가면 테이프를 꺼내서 B면으로 바꿔야 한다. 얼추 12살인 이 기기. 재밌게도, 음악을 들을 때면 테이프를 재생할 때가 가장 정감있다. 뭔가 포근하다. 이제는 CD로, 아니 CD에서 mp3를 추출해서 mp3p로 듣는 일상이지만, 테이프로 음악을 들을 때면 선명한 느낌은 없어도 따뜻한 느낌은 있다. 이건 모두 추억, 향수 때문이겠지.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감쌀테니, 이건 순전히 나의 추억, 기억, 경험때문이다. 가끔은 길에서 mp3p말고 테이프 재생기를 가지고 다니면 어떨까 하는 감상에 빠지기도 한다. 하하;;

근데 내겐 무려 20년은 된 거 같은 기기가 있다. ‘아하’라고 불렸던 휴대용 테이프 재생기. 처음부터 내건 아니었고, 다른 사람이 사용하던 걸 물려받았다. 테이프를 들으려면 소리가 늘어져서 힘들지만, 라디오를 듣는덴 지장이 없다. 이런 제품을 모르는 사람에게 보여주면 골동품 취급할까? 신기해할까?

03
그래도 오래되기로는 지금 내가 사는 집, 玄牝이 가장 오래되었을 테다. 어쩌면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자려고 누워 있노라면 천장이, 벽이 앓는 소리도 들린다. 아침엔 벽이, 천장이 찌익, 찌직, 쿠웅, 하는 소리를 들으며 깨어나기도 한다. 설마 자고 있는 사이에 무너지는 일은 없겠지? 하하.

04
어느 동네가 유서 깊지 않겠는가. 지금 내가 사는 동네만 역사와 이야기가 가득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내겐 특별하다.

05
내가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한 단체는 이제 형태를 바꿀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런 얘기는 나중에,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쓰기로 하자.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지금은 묻어두기로 하자. 기록은 다 남아 있을 테니까.

아울러 나는 이제 그 단체 소속으로 나를 소개하는 일은 없을 듯하다.

06
아침 회의는 그 단체에서 하고 싶었지만 못 했던 활동과 관련있다. 회의는 올해 사업으로 어떤 일을 기획하고 있는데 같이 회의를 했으면 한다는 거였다. 즉,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데 같이 얘기를 나눴으면 한다고 해서 잡은 회의였다. 프로포절만 선정되면 정말 잘 할 단체고, 나 역시 어떻게든 같이 하겠다고 말하겠지?

기쁜 일이다. 정말로!

07
어쩌면 내가 바랐던 형태로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걸까? 그런데 내가 바란 형태란 건 어떤 거지?

08
용산과 이태원 지역을 중심으로 트랜스젠더의 역사를 홅으면,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가 구분되었던 적은 없는 듯하다. 한 동네 주민으로 살며 서로 돕고 싸우고 친목모임을 꾸리고 욕도 하면서… 그냥 세상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 이곳에도 있(었)다. 이런 역사, 그리고 현재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소위 말하는 정체성이라는 건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정체성이라는 범주 구분이 개인의 경험과 개인들 간의 친밀감을 단절내는 건 아닐는지. 저 사람과 이 사람은 다르다는 식의 구분짓기, 범주를 나눠 설명하는 방식이 결국 ‘경험’과 ‘공동체’를 논쟁과 싸움의 장으로 만드는 건 아닐는지. 간단하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정체성이라는 범주가, 집착할 수록 폭력적으로 변하는 건 확실한지도 모른다.
(오프라인으로도 만나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렇게 말한다음, “아님 말고”라는 말을 덧붙일 거란 걸 알겠지? 흐흐.)

09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건, 그런데 결국 따뜻했거나 아팠거나 어쨌거나 추억으로 각색된다는 의미겠지. 1997년 말에 산 기기도 용산과 이태원의 역사도 모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각색하는 이야기들이다. 어떤 식으로 각색할 것인가? 관건은 이것이지만, 이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아무려나 올해의 나는 또 어떤 일을 하려고 아둥바둥할까? 생활비가 나오는 일, 생활비 정도는 아니지만 공과금에 보탤 수는 있는 정도의 활동비를 주는 일, 이런저런 돈을 주진 않아도 내가 좋아서 일단 하고 보는 일… 아니다. 결국 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들이다. 그리고 상대방은 언제나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려고 애써서 고마울 뿐이고. 위태롭지만, 위태롭다고 광고를 하니 그냥 죽으란 법은 없는지 주변에서도 챙겨준다.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이다.

올해는 또 어떻게 살아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