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예전에 활동정리 글을 쓰면서 인권영화제(자세한 건 여기)에 상영할 영화 한 편과 관련한 일을 할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그땐 전화만 한 통 받았기에 자세히 적을 상황은 아니었는데, 루인도 미처 깨닫기 전에 일은 진행 중이었고, 어느 새 루인이 한다고 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자막 감수와 소개하는 글 쓰기.
지난 월요일인가, 영어 자막을 받았고, 수요일 영화 DVD 사본을 받았고, 어제 한글 번역 자막을 받았다. 아무튼 루인이 담당할 영화는 [레오 N이라는 사람 The Person de Leo N](당연히 제목에 주소 링크했음). 5월 20일 일요일 오후 6시 40분과 5월 23일 수요일 오후 1시, 이렇게 두 번 상영한다고 한다. 홈페이지에서 상영일정표를 확인하면 알 수 있듯, 일요일 상영시간에 감독과의 대화가 있다고 나와 있는데, 감독과의 대화가 아니라, 영화 및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대화”의 시간을 루인이 담당하기로 했다. (시간 괜찮은 분은 많이많이 오세요. 🙂)
※방금 확인한 건데, 입장이 무료라고 한다!!! 당연히 선착순 입장이고;;;
02
자막 감수라고 해봐야, 특별할 것은 없었다. 영어로 얼추 읽었기 때문에, 영어와 한글을 대조하면서 검토하는 작업 정도. 번역하신 분이 꼼꼼하고 맥락을 잘 짚으면서도 가독성 있는 문장으로 쓰셔서, 그저 읽기만 해도 될 정도였다. 그저 몇 가지 단어가 걸려서 수정을 요구한 정도.
사실, 몇 가지 갈등 지점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영어 자막엔 트랜스섹슈얼(transsexual)로 나오는 걸, 한글로는 성전환 혹은 성전환자로 번역한 것. 루인의 입장에선 트랜스섹슈얼과 성전환/성전환자는 상당히 다른 의미라서 이런 식으로 번역하기 힘들다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다시 트랜스섹슈얼로 바꿀 수도 없었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라면, 그래서 두 용어들을 번역어 관계로 사용하기 힘들다는 걸 모든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니라면, 어느 쪽이 좋을까를 갈등했다. 동시에 성전환/성전환자란 단어는 주로 의학계나 법조계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이고, 트랜스젠더 공동체에선 트랜스섹슈얼이란 용어보다는 트랜스젠더 혹은 TG/티지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한다면,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을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그냥 성전환자로 가기로 했다. 이유는? 없다. -_-;;; 케케. 이 다큐는 이탈리아에서 찍은 건데, 이탈리아에서의 용어를 둘러싼 논의를 전혀 모른다는 점에서 뭐라고 쉽게 넘겨짚기가 힘들고, 성전환자란 용어를 의학이나 법학에서 사용하는 의미와는 다른 식으로 사용하고픈 고민이 있어서라는 게, 이유라면 이유일 수 있다.
가장 당황했던 단어는 meta-sexuality. 당연히 사전에는 안 나오고, 구글에서도 몇 페이지 검색이 안 되는 단어. 영어자막만 받았을 땐, 어떻게 번역할까 고심하다가, 그냥 메타-섹슈얼리티로 메모했는데, 한글 번역 자막엔 “성초월”로 적혀 있었다. 성초월? meta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성초월이 적절한가로 갈등했지만(성변화, 성너머 등을 고민했는데), “성초월”이 가장 무난할 것 같았다. 그 단어를 읽었을 때, 어쨌거나 의미를 가장 빨리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물론 만족스러운 번역은 아니지만 마땅한 언어가 없는 셈이다.
03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 담당자는 [레오 N이란 사람]과 [Un/going Home] 두 작품 중에서 고민하다가, 이 작품을 골랐다고 했다. [Un/going Home]의 경우, 작년 퀴어문화축제에서 잠깐 본 적이 있는 그 분인 것 같아, 인디포럼으로 상영하는 일요일에 보러 갈 예정인데, 어쨌거나 두 가지 작품을 모두 볼 수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인권영화제 홈페이지엔 이 영화 소개를, 성전환 수술을 한 후 어머니를 찾아간다고만 나와 있는데, 영화를 읽고 나면, 이 정도 소개로는 너무도 부족하다고 중얼거렸다. 뭐, 어차피 볼 사람만 볼 테고, 볼 사람은 볼 테니까 상관없겠지만;;;
다큐를 읽으며 꽤나 흥미롭다고 느꼈던 건, 세 가지 측면에서였다. 우선 데 레오 니콜은 연극배우이기도 하다(연극의 연출자가 “성초월”이란 말을 사용한다).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렇게 만난 누군가가, 젠더를 옷을 골라 입듯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이 다큐는 성전환을 일종의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듯, 계속해서 연극 무대에서 연습하고 옷을 바꿔 입고 가발을 바꿔 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만약 이런 식으로만 구성했다면, 재미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건, 이런 과정을 성전환수술을 준비하고 수술 하는 장면과 교차 편집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연극을 상연하며 무대 뒤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주인공은 “남성”역과 “여성”역을 모두 담당한다) 성기재구성수술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 순간, 젠더를 선택해서 무대 위에서 상연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에 균열을 일으킨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하는 것과 연극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이 교차하며, 젠더를 단순히 무대에서 상연하고 선택하는 것이란 식으로 말할 수는 없는 어떤 지점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레짐작 하고 있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아무래도 성전환수술을 한 후 엄마를 찾아 가는 장면. 전화상으론 항상 싸우고, 엄마는 레오가 찾아오는 걸 두려워 하지만, 정작 찾아 갔을 때의 반응은 다르다. 이 부분의 편집이 꽤나 재미있다. 아, 엄마에게 가는 장면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트랜스젠더의 성전환을 얘기하며 흔히 말하는 이주서사로서의 의미라기보다는 과거와 현재의 자신 및 그 관계들과 소통하는 것으로 다가왔다.
04
하지만, 어제 밤, 이 다큐를 봤을 땐 자막도 없는 영상으로만 봤다는 거-_-;; 내용이야 얼추 다 알고 있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재생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는 건지, 영어 자막조차 안 나와서, 맥락 따라가는데 상당한 에너지를 쏟았다. 그러니 몇 번 더 봐야 할 듯. 그러고 나면, 정작 “감독과의 대화” 시간엔 이 영화를 비판할 지도 모른다는 거 ;;;; 케케.
아무려나, 많은 비판 지점에도 불구하고 [트랜스아메리카]가 꽤나 괜찮은 영화라면, 이 다큐는 [트랜스아메리카]보다 좀 더 괜찮은 것 같다. 물론 다시 확인해야 하고, 나중에 어떻게 말을 바꿀지 알 수 없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