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루이스. 『나는 왜 아버지를 잡아먹었나』. 김석희 옮김. 정신세계사 출판.
01
엥겔스는 100년도 더 전에 가족과 국가의 기원을 밝히려고 애쓴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수렵생활, 주로 과일을 채집해서 먹는 생활에서 목축과 농경으로 생산양식이 변한 것을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로 불렀다. 생산양식의 변화로 남성이 여성을 소유하고, 여성을 이성애 핵가족 제도에 종속시켰다나 뭐라나.
엥겔스 논의는 다양하게 비판받고 있다. 채식주의 맥락에선, ‘엥겔스의 논의는 육식이 채식보다 우월하다는 가치판단에 따른 것이다’로 일갈할 수 있다. 과일이나 곡류를 수집하는 생활에서 가축을 기르고 고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구조를 ‘진보’로 가정하는 것 자체가 채식과 육식에 대한 위계를 드러낸다. 여기에 여성의 성역할과 남성의 성역할을 이미 결정된 것으로 가정하는 건, 한술 더 뜨는 셈이지. 엥겔스의 논의는 그가 살았던 시대가 음식, 여성-남성의 성역할 관계, 젠더와 같은 이슈를 해석하는 방법이 어땠는지를 알려주는 증거로서 유용할 뿐이다.
로이 루이스의 책 『나는 왜 아버지를 잡아먹었나』는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시대는 홍적세. 즉 빙하기로서 20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를 아우르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등장인물들은 홍적세가 끝날 즈음을 살고 있는 이들. 등장인물들은 조금이라도 ‘인류의 진보와 진화’를 앞당기려 애쓰고 있다. 이 소설은, 미하일 일리인의 『인간의 역사』처럼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서 어땠을 거라고 기술하고 있느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역사책들, 역사 소설들은 현재의 입장에서 그들의 행동들이 어떻게 인류 진화/진보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로이 루이스의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류가 어떤 식으로 진보/진화할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소위 진보/진화라는 걸 조금이라도 앞당기려고 애쓴다. 심지어 자신들이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이미 알고 있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활이야.” 아버지는 짤막하게 말했다. “아직 활이 등장할 시대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나는 이걸 시도할 수밖에 없었어.” (228)
다른 여타의 책들이 등장인물들이 현재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면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알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자 이 책의 장르를 무척 흥미롭게 만드는 지점이다. 그렇다고 등장인물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 것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그냥 직관적으로 안다. 읽고 있노라면 뻔뻔한 느낌이라기 보단 능청스럽다. 그래서 재밌다. 심지어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마치 족외혼이 특정 누군가의 시도에 의해,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족외혼뿐만 아니라 불, 창, 동굴벽화 등등 많은 것들에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의 이름이 있다. 이 소설은 1950년대 나왔는데, 당시의 유럽 식민주의 인식을 반영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는 다소 모호하다. 주요등장인물 집단을 우월하고 더 진보한 존재로, 여타의 집단을 열등하게 말하는 장면은 유럽 우월주의를 반영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헷갈린다.
02
이 책이 흥미로운 건, 제목도 한 몫 한다. “나는 왜 아버지를 잡아먹었나”란 구절을 읽으며 프로이트의 부친살해 욕망,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근친‘상간’ 욕망과 금기 등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이것이 이 책의 주요 모티브기도 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긴장 관계 속에서 ‘진화/진보’를 모색하고, 그 과정에서 ‘여성’은 언제나 조력자거나 주변부다. 물론 ‘여성’이 무력한 타자로만 등장하는 건 아니란 점은 분명히 해야겠지만, 한계는 분명하다.
근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다른’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임 대통령과 현재 대통령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아닐까? 아버지를 죽여야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관계. 부친살해에 성공해야만 비로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아들, 그런데도 계속해서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 아들. 실질적인 살해건 상징적인 살해건 살해야 말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최선이란 믿음. 찌질해도 이렇게 찌질할 수 있을까 싶다. 현 정부와 직전 정부 중 누가 더 잘났고 못났고의 문제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친살해 욕망과 아들의 죄의식,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반복하는 구조를 말하고 싶은 거다. 이제 그만 이런 구조의 고리를 끊을 때도 되지 않았나? 이걸 끊지 않으면 어제와 같은 일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