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분야의 전공자가 극히 적은 상황에서 그 분야를 전공한다는 이유로 전문가라고 부를 수 없다. 아울러 우연히 남들보다 하나 더 아는 것이 있어 이를 말함은 그 정보를 나누려 함이지 그런 언설이 어떤 전문성 혹은 깊이를 담보하지 않는다. 이것은 모두 내게 하는 말이다.
나는 트랜스젠더 이슈를 전공 삼지만 내가 트랜스젠더 이슈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생산하는 글의 90%는 트랜스젠더 이슈거나 트랜스젠더 인식론을 밑절미 삼지만, 난 더 많은 시간을 그저 빈둥거린다. 나는 성실하게 연구하지도 않고 깊이 있게 공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를 소개하며 트랜스젠더 이슈 전문가라는 식으로 얘기할 때, 트랜스젠더 이슈를 연구하고 있다고 소개할 때 어떻게 반응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싶은 기분이 든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소개 언설에 내가 충분히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겐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평가와 타인의 평가가 엇갈릴 때, 많은 경우 타인의 평가를 믿어야 하지만, 이 경우는 나의 평가를 믿어야 한다. 나는 아직도 트랜스젠더 이슈를 꾸준히 연구하지 않았고 충분히 알고 있지도 않다. 나는 트랜스젠더 이슈 중 극히 일부, 오만하게 말해도 1/100,000 정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말까다. 나는 트랜스젠더 이슈를 나보다 더 잘 얘기하고 잘 아는 사람을, 한국에서만도 몇 명은 말할 수 있다. 그들에 비해 내 앎은 비천하여 언제나 부끄러울 뿐이다.
물론 이것은 모두 내가 야기한 잘못이다. 상대가 나를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니다. 서로의 판단 기준이 달라 발생한 문제도 아니다. 내가 과도하게 겉멋에 빠져 있거나 허세를 떨어서 발생한 문제다. 어쭙잖은 지식으로 마치 많은 것을 아는 체 떠들고 다녀서 발생한, 순전히 내가 자초한 문제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이 불편하다. 이 간극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옳다고 믿는 앎을, 고민을 더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난 앞으로도 계속 강하게 떠들고 다닐 것이다. 그것은 내 무지를 확인하는 작업이자 내 목소리를 상대화할 수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앎은 발화를 통해서만 상대화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발화하기 전에 자신의 삶과 앎을 상대화하며 빼어난 성찰을 드러낸다. 난 발화하고 문제를 일으키고서야 비로소 깨닫는, 언제나 뒤늦게 깨닫는 인간이라서 더 많이 더 열심히 떠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가, 내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그래서 어떻게 문제를 일으킬 것인가가 고민이지만, 때론 이 고민 조차도 너무 늦게 찾아와서 사고만 친다.
… 그리고 이 글이 다소 모순적이란 것 안다. 모순적 상황이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일상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