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구술하기 그리고 역사쓰기

수업 쪽글은 나중에 한 번에 올릴까 했는데요… 오늘까지 잇달은 글 마감과 수업 준비 등으로 정신이 없어서 결국 이번에 또 수업 쪽글로.. 하하..;;;
그리고 댓글 감사히 잘 읽었어요.. 답글은 곧 달게요.. 죄송해요… ㅠㅠㅠ
===
2013.10.15. 화. 15:00-  벤야민의 이야기꾼.
이야기를 구술하기 그리고 역사쓰기
-루인
과거에 있었던 얘길 어떤 사람에게 들려줄 때가 있다. 과거 겪은 사건이나 운동의 역사 같은 것, 내가 참여해서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 혹은 나도 전해들은 어떤 것을 마치 증언처럼 혹은 옛날 얘기처럼 들려줄 때가 있다. 그때의 일을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하려 한다. 마치 그 일을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어느날 그 일을 겪던 당시에 쓴 기록물을 읽는다. 나는 두 가지 다른 사건을 겪은 것만 같다. 활자로 기록된 것과 구술로 회자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활자로 기록된 사건은 그 기록 당시의 감정을 반영한 사건이고, 구술로 지금 애기하는 사건은 회고하거나 회상하는, 기억에 의존하는 사건이자 그 동안(즉 더 많은 시차와 경험)의 역사/시간이 침윤된 사건이다. 그래서 구술하는 이야기는 오래된/널리 회자되는 이야기이자 구술하는 그 찰나에 처음 쓰는 이야기다.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는 것” 그래서 지겹도록 같은 내용을 되풀이하는 것 같아도 구술하는 동안 이야기는 매번 새롭게 조금씩 다르게 구성된다. 이미 구성된 것 혹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할 때의 나의 상태, 상대방의 반응으로 구성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리하여 이야기엔 역사가 있고 시간이 있다.
그렇다고 활자로 기록된 글이 언제나 고정된 의미를 지니는 건 아니다. 벤야민은 이를 다시, 이야기와 정보로 구분한다. 이미 해석/설명되어 도착하는 순간 그 가치를 상실하는, 그리하여 청자나 화자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는 정보와 매 순간 새롭게 해석되는 이야기는 다르다고 벤야민은 얘기한다. 이를테면 벤야민이 이름을 언급한 에드가 앨런 포의 「고자질하는 심장」이 그렇다. 별다른 해설/설명 없이 이야기만 있는 이 단편소설를 독자는 살인범의 죄의식을 다룬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강박증을 다룬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혹은 또 다른 내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매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도 비슷하다. 이 이야기를 독자는 근대 기술 발전의 공포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페미니즘 작품으로 독해할 수도 있고, 동성 성애 관계로, 재생산을 둘러싼 공포로,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로, 채식주의자의 이야기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청자/독자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으로 해석되며 시간이 지나도 그 생명을 생생하게 유지한다. 이것은 정보와 달리 이야기가 청자/독자의 개입을 통해 새로운 텍스트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야기는 읽는 것이 곧 쓰는 것인 찰나에 존재한다. 이야기는 역사성과 함께 바로 지금이라는 시간에 구성된다.
벤야민의 이야기는 활자로 구성되지 못 한, 때론 정보로도 구성되지 못한 타자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힘을 제시한다. 많은 타자의 기록은 단편적 사건으로만 기록되거나 그 시기를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에 의해 구술되고 ‘전설’로 회자된다. 기억 속 사건의 시기는 정확하지 않고 선후 관계도 얘기할 때마다 바뀐다. ‘그럼에도’가 아니라 그리하여 타자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나는 타자의 역사를 내가 겪는 것처럼 상상할 수 있다. 혹은 내가 겪고 있는 일처럼 설레고 또 그 이야기에 기뻐한다/슬퍼한다. 내 몸의 경험과 엮어 ‘나’의 역사로 쓸 수도 있다. 역사쓰기는 상상하기라고, 상상력 없는 역사쓰기는 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나는 구전으로만 회자되는 혹은 단편적 사건으로만 남아있는 타자/나의 이야기를 상상력이란 실과 바늘을 이용해 역사란 형태로 직조한다. 그러니 이야기하기는 역사쓰기다. 비규범적이라고 혹은 주류가 아니란 이유로 늘 은폐되었다고 하면서도 오래 전 타자의 이야기가 지금도 구전될 수 있다는 것, 많은 시간이 지나서라도 다시 들려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이미 정리되어 암기해야 하는 역사가 아니라 오랫동안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 속 타자의 역사, 이야기의 힘인지도 모른다.

상상력과 인문학

요즘 제가 이런저런 일로 바빠 안타깝게도 책 읽을 시간이 거의 없어 지하철 타는 9분 정도 읽는 안타까운 일이. ㅠ_ㅠ
이렇게 쓰면 마치 평소엔 책, 아니 글자라도 읽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켜 문제가 있지만요… 아하하. ㅠㅠ
꼭 평소 공부를 안 하면서 바쁠 때면 바빠서 공부를 못 하겠다고 핑계를 대고 있는 1人이랄까요.. 음하하.;;;
암튼 바빠서 대충 때우는 포스팅이 맞아요… 으하하…;;;

암튼 읽고 있는 김영민의 책에 재밌는 구절이 많더군요.

<상상력은 도약 이다>란 장에선

어쩌면 이 ‘어처구니없이 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기존의 지식을 넘어서 상상을 펼치는 것이야말로 신나고 흥분할 만한 일이고 … 지성의 활동을 보이는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여덟 길동이 팔도에 다니며 호풍환우하는 술법을 행하니 … 팔도가 요란한지라 … “라는 구절을 대하는 우리는 이 사태의 반상식에 그리 괴로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묘한 공명의 희열에 들뜨기까지 한다. 우리는 본래 도약을 위해 준비된 존재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옷이 자연이 아님은 옷을 입는 행위 속에 자명해진다: 옷이 몸을 입는 것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상식은 ‘바람이 제 갈 데로 불 듯이’ 홀로 자존하지 못하고 숙주를 필요로 한다.

<상상력은 떼어진 것을 붙이는 기운(氣運)이다>란 장에선

떼어진 것들에서 붙어 있는 것들로 도약하는 것 – 상상력의 진수는 이러한 능동성 속에 있다.

모든 인간의 경험은 상상력을 통해서 인간적으로 통합된다. 상상력의 ‘붙이는 힘’이 개입되지 못한 세계와 그 경험은 데이타의 무의미한 집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은 그 주체적이고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문학적인 배경을 갖는다. 물론 모든 학문이 인문학은 아니다. 그러나 개들이 하는 학문이 아닌 이상 모든 학문은 – 그 정도에 시비가 있을 수 있겠지만 – 인문학적일 수밖에 없는 조건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문학을 구태여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지적 탐구가 인문학적 색깔[humanistic coloring]을 내장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전제된 조건이다. 안경을 끼기 위해서 안구(眼球)를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구절들이 요즘 고민에 실마리가 되어서 좋달까요… 아하하.

인용 구절 출처 제대로 안 밝혔다고 출판사에서 딴죽 거는 건 좋은데, 그 전에 품절시킨 거 다시 발간부터 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