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살아가기: 회의, 트랜스젠더 운동, 추억하기.

01
어제 오후,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한 통 받고선 오늘 오전에 회의를 하나 잡았다. 가까운 곳이지만 가까이 산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회의를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후, 밥을 먹고 나니 시간이 애매하다. 아카이브 일을 하러 가려니, 도착해서 후치를 꺼내면 알바를 하러 갈 준비를 해야 할 거 같았다. 그래서 그냥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02
玄牝에 있는 물건들 중, 몇 가지를 제외하면 모두 10살은 먹은 거 같다. 玄牝에 있을 때마다 애용하는 음악재생기는 1997년 겨울에 산 거다. 카세트테이프 두 개를 재생할 수 있는 제품으로, 당시 가격은 무려 88,000원. 만 원 정도를 더 주면 반복재생 기능이 있는 제품을 살 수 있었지만, 만 원이 없었다. 그래서 A면이 다 돌아가면 테이프를 꺼내서 B면으로 바꿔야 한다. 얼추 12살인 이 기기. 재밌게도, 음악을 들을 때면 테이프를 재생할 때가 가장 정감있다. 뭔가 포근하다. 이제는 CD로, 아니 CD에서 mp3를 추출해서 mp3p로 듣는 일상이지만, 테이프로 음악을 들을 때면 선명한 느낌은 없어도 따뜻한 느낌은 있다. 이건 모두 추억, 향수 때문이겠지.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감쌀테니, 이건 순전히 나의 추억, 기억, 경험때문이다. 가끔은 길에서 mp3p말고 테이프 재생기를 가지고 다니면 어떨까 하는 감상에 빠지기도 한다. 하하;;

근데 내겐 무려 20년은 된 거 같은 기기가 있다. ‘아하’라고 불렸던 휴대용 테이프 재생기. 처음부터 내건 아니었고, 다른 사람이 사용하던 걸 물려받았다. 테이프를 들으려면 소리가 늘어져서 힘들지만, 라디오를 듣는덴 지장이 없다. 이런 제품을 모르는 사람에게 보여주면 골동품 취급할까? 신기해할까?

03
그래도 오래되기로는 지금 내가 사는 집, 玄牝이 가장 오래되었을 테다. 어쩌면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자려고 누워 있노라면 천장이, 벽이 앓는 소리도 들린다. 아침엔 벽이, 천장이 찌익, 찌직, 쿠웅, 하는 소리를 들으며 깨어나기도 한다. 설마 자고 있는 사이에 무너지는 일은 없겠지? 하하.

04
어느 동네가 유서 깊지 않겠는가. 지금 내가 사는 동네만 역사와 이야기가 가득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내겐 특별하다.

05
내가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한 단체는 이제 형태를 바꿀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런 얘기는 나중에,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쓰기로 하자.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지금은 묻어두기로 하자. 기록은 다 남아 있을 테니까.

아울러 나는 이제 그 단체 소속으로 나를 소개하는 일은 없을 듯하다.

06
아침 회의는 그 단체에서 하고 싶었지만 못 했던 활동과 관련있다. 회의는 올해 사업으로 어떤 일을 기획하고 있는데 같이 회의를 했으면 한다는 거였다. 즉,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데 같이 얘기를 나눴으면 한다고 해서 잡은 회의였다. 프로포절만 선정되면 정말 잘 할 단체고, 나 역시 어떻게든 같이 하겠다고 말하겠지?

기쁜 일이다. 정말로!

07
어쩌면 내가 바랐던 형태로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걸까? 그런데 내가 바란 형태란 건 어떤 거지?

08
용산과 이태원 지역을 중심으로 트랜스젠더의 역사를 홅으면,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가 구분되었던 적은 없는 듯하다. 한 동네 주민으로 살며 서로 돕고 싸우고 친목모임을 꾸리고 욕도 하면서… 그냥 세상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 이곳에도 있(었)다. 이런 역사, 그리고 현재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소위 말하는 정체성이라는 건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정체성이라는 범주 구분이 개인의 경험과 개인들 간의 친밀감을 단절내는 건 아닐는지. 저 사람과 이 사람은 다르다는 식의 구분짓기, 범주를 나눠 설명하는 방식이 결국 ‘경험’과 ‘공동체’를 논쟁과 싸움의 장으로 만드는 건 아닐는지. 간단하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정체성이라는 범주가, 집착할 수록 폭력적으로 변하는 건 확실한지도 모른다.
(오프라인으로도 만나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렇게 말한다음, “아님 말고”라는 말을 덧붙일 거란 걸 알겠지? 흐흐.)

09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건, 그런데 결국 따뜻했거나 아팠거나 어쨌거나 추억으로 각색된다는 의미겠지. 1997년 말에 산 기기도 용산과 이태원의 역사도 모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각색하는 이야기들이다. 어떤 식으로 각색할 것인가? 관건은 이것이지만, 이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아무려나 올해의 나는 또 어떤 일을 하려고 아둥바둥할까? 생활비가 나오는 일, 생활비 정도는 아니지만 공과금에 보탤 수는 있는 정도의 활동비를 주는 일, 이런저런 돈을 주진 않아도 내가 좋아서 일단 하고 보는 일… 아니다. 결국 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들이다. 그리고 상대방은 언제나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려고 애써서 고마울 뿐이고. 위태롭지만, 위태롭다고 광고를 하니 그냥 죽으란 법은 없는지 주변에서도 챙겨준다.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이다.

올해는 또 어떻게 살아갈까?

[영화] 밀양: 비밀스런 햇살(서사, 지역어-동일시)

[밀양] 2007.06.14.18:45, 아트레온 9관 11층 D-10

01
언젠가 누군가가 루인에게 그랬다, 걸음 좀 똑바로 걸으라고.

영화 초반, 흔들리는 카메라. 카메라를 따라 흔들리는 영상. 앞으로 걸어가는 영상. 곧 이어, 이신애(전도연 분)의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모습. 이제 막 도착한 밀양에서 피아노 학원 전단지를 붙이러 돌아다닐 때의 비틀거리는 걸음. 이 걸음이 등장하는 순간, 이신애와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팔에 붉은 꽃이 피었다. “이신애를 위한 철야기도”를 한다는 장소에 돌을 던지고 돌아온 신애는 얼음을 준비해서 대접에 담고, 사과를 준비해서 거실에 앉아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깎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씹으며 먹는 모습. 그러다 목이 막힌다는 듯한 표정. 종종 루인도 음식을 먹는데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경험을 한다. 그런 순간이었을까. 그러다 카메라는 손으로 향했던가. 팔에 붉은 꽃이 피어나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영화 속에서 종종 불편했던 부분들은 이 장면 하나로 그냥 지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신애는 무얼 먹은 걸까. …둘 다였을까.

마지막, 머리를 자르는 장면. 미장원을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와서 거울을 보며 직접 머리를 자르는 장면. 서늘하게 빛나는 햇살이 가위 날에서 더 눈부시고. 가위소리가 서걱서걱 들렸다. 거울에 비친 목의 모습. 가위로 머리를 자르는 와중에 목을 자를 것만 같았다. 서걱서걱, 서늘한 가위질 소리 사이로 목에서 붉은 꽃이 필 것만 같았다.

…이 세 장면만 기억난다. 만약 영화를 부분만 잘라서 얘기할 수 있다면, 이 세 장면 때문에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되리라 싶다.

02
만약 이 영화 감상문을 어제 밤에 썼다면 01에서 끝났으리라. 영화관을 나서며 이 노래를 들으며 멍하니 걸었다. 추천하고 싶은 만큼이나 추천하기 꺼려지는 영화라고, 지금에야 중얼거린다. 하지만 이런 영화를 좋아한다. 물론 부분적으로만 기억한다는 전제 하에.

03
지금 상황이 고통스럽다면 그건 현재 상황 자체가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어서라고 자주 중얼거린다. 그래서 “구원”은 “잘 될 거야”란 말과 같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현재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라고, 고통을 고통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라고 고민한다.

영화관으로 가는 길에 “종교적 믿음과 정치”와 관련한 어떤 이야기를 떠올렸다. 몇몇 페미니스트들, 여성학선생님들이 이젠 종교에 귀의하기 시작했다는 얘기. 이 얘기를 전해준 누군가는, 종교를 믿기 시작하면 정치는 이제 끝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 말에 동의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 얘기가 떠올랐던 건 우연일까 싶을 정도로 영화와 묘하게 닮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영화를 구원과 관련한 내용으로 읽지는 않았다. 내용은 읽지 않고 제목만 대충 봤던 관련 기사들의 상당수가 “구원” 혹은 “종교” 운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가?

종교만 놓고 봐도, 이 영화에서 기독교(?, 혹은 천주교?)란 종교 자체는 의미가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불교였어도 무방하리라. 다만 어떤 종교냐에 따라 행동과 세세한 부분은 달라지겠지만, 큰 줄거리는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루인에게 이 영화는 자기 서사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란 질문으로 다가왔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이신애는, 고통스럽게 경련하다 우연히 본 부흥회 현수막을 통해 종교에 귀의한다. 그전까지, 하나님이 어딨느냐고, 눈에 보이는 것도 믿지 않는다고 말한 이신애는 이제 연애를 하는 것처럼 설레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몰랐던 시절을 부끄럽게 얘기하며 ‘새로운 사람’으로 환생했다고 얘기한다. 그렇게 종교를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말하는 전형적인 서사로 자신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교회 사람들과 있을 땐 이렇게 자신을 얘기하지만 혼자 있을 땐, 여전히 고통스러워한다. 교회 사람들과 있을 때 한 얘기는 거짓이고 혼자 있을 때의 고통이 진실이란 말이 아니라, 둘 다 진실이다. 종교에 귀의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행복하다는 말은, 자신의 현재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모색하는 행동이며, 어떻게든 현재 상황을 다른 식으로 방향 전환하려는 노력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종교에 몰두하는 순간의 망각[집중은 동시에 망각이자 외면이니까]이 주는 행복은, 바로 그 행복의 크기만큼 망각의 고통을 준비하고 있다.

종교를 통해 서사를 재구성하려고 하지만, 종교적인 언어[반드시 종교일 필요는 없다고 느낀다, 심리상담소에 갔을 수도 있고 정신분석을 받을 수도 있었다]로 현재 상황을 전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아니 종교적인 언어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배신당했을 때, 그때의 무너짐. 영화를 읽는 내내, 이신애가(혹은 루인이)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계속 불안했다. 울음에 체한 것 마냥, 울지 못한 상태로, 울음이 몸에 축적되어 가는 상태로 그렇게 지낼 때, 결말은 뻔하다. 적어도 루인에겐 그랬다. 붉은 꽃 피어나는 장면이 나왔을 때, 온 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결국 이렇게 되는 구나, 싶었다.

04
이 영화를 읽으며 기묘한 경험을 했다. 영화 초반부터 이신애와 동일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행동에서만 튕겨난 것이 아니라 이신애가 대사를 할 때에도 종종 동일시에 실패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일까? 대사가 나올 때면 이신애보다는 이신애와 같이 있는 밀양사람들 혹은 종찬(송강호 분)에 더 쉽게 밀착하고 있었다.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너무도 밀착하고 있는 모습. 이신애가 혼자 있고, 혼잣말을 할 때면 상관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얘기 할 때면 거의 항상 그랬다.

이 영화에서 죽은 준을 제외하면, 서울지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이신애가 유일하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밀양이라는 공간에서 이신애의 상황을 설명하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밀양지역어는, 영화 초반에 종찬이 설명하듯, 부산지역어와 거의 같다. 자동차를 수리하러 온 종찬의 첫 말투를 들었을 때, 루인은 온 몸이 간지러워지는 걸 느꼈는데, 그 말투는 루인이 19년 동안 매일같이 사용한, 그리고 지금도 부산에 가면 너무도 익숙하게 듣는 그 말투였다. 몸이 기억하는 말, 몸이 너무도 익숙하게 사용하는 말, 지금도 혈연가족과 전화를 할 때면 툭툭 튀어나오곤 하는 그 말투.

부산지역어를 사용하는 영화는 많은 편이다. 하지만 루인이 읽은 적지 않은 영화들 중에서, 여러 지역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특히나 [밀양]처럼 서울지역어와 부산/밀양지역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영화는 더욱더. 바로 이 지점에서 동일시와 튕겨남을 동시에 경험했다. 일테면 [미녀는 괴로워]에서 루인이 동일시한 한나는 서울지역어를 사용하지만, 영화 속 다른 인물들도 한나와 비슷한 말투를 사용하기에 딱히 튕겨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밀양]은 완전히 달랐다. 이신애와 동일시하는데도, 대사를 할 때면, 종찬이나 다른 밀양사람들에게 더 익숙함을 느꼈다.

그래서 찾아보니 송강호의 고향이 김해란다. 부산 바로 옆에 있는. 이건 상당히 재밌는 일인데, 루인이 더 익숙하게 느낀 말투는 비전문배우들(즉 밀양에서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밀양말투가 아니라 전문배우인 송강호의 말투였다. 영화를 읽었다면 눈치 챈 분도 있겠지만, 소위 부산말투라고 여기는 부산지역어를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한 사람들은 밀양사람들이 아니라 송강호였고. 김해출신의 송강호는 서울에서 연극이나 영화를 찍으며 몇 년 이상을 지냈을 테고, 그렇게 지내며 부산지역어를 사용할 일이 있으면, 부산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더 부산지역어스럽게 말투를 사용하기 마련이다. 지금 부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부산지역어스러운” 말투. 그리하여 지금 부산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특성화시킨 송강호 식의 부산지역어가 “더 진짜”같은. (“특성화”시키고 “과장”해야지만 “진짜”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루인 역시 몇 년을 서울에서 살며 부산지역어를 특정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기는 마찬가지고.

사실 루인이 만나는 범위에서, 송강호/종찬이 사용한 말투 정도의 억양을 요즘의 부산에서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송강호/종찬이 사용한 말투는 루인이 ‘부산사람들은 이러이러한 억양을 사용하지’, 라고 기억하는 바로 그 특성을 부각하고 있고, 그래서 감정적으로 동일시를 못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밀접하다고 느낀 건지도 모른다.

+ 혹은 송강호는 송강호가 기억하는 혹은 특성화하는 방식의 부산지역어를 사용하는데 반해, 밀양사람들은 영화에서 일부러 서울지역어 혹은 서울말투를 사용하려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영화라는 매체이기 때문에 감독이나 스탭들이 “자연스럽게” 말하길 요구했겠지만, 정작 카메라 앞에서 그러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다보니 송강호가 “더 부산지역어스럽고” 밀양에 살고 있는 사람은 “덜” 그런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도… 다른 한편으론, 서울지역에서 부산지역어를 들었기에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고.

05
기말논문이 텍스트분석인데, 이 영화로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관두기로 했다. 텍스트로 분석하려면 못해도 대여섯 번은 읽어야 할 텐데 그렇게까지 읽을 엄두가 안 난다.

근데, 소위 영화평론가라고 부르는 사람들 상당수가 이 영화를 상찬하지 못해 안달인 느낌인데, 그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비록 이 글에서 쓰진 않았지만 불편한 지점도 적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