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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무사히 살아남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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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설과 추석은 영양보충하는 시기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기기 시작한 것이 벌써 몇 년. 그 후, 본가에서 무슨 얘기를 해도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뭐, 부모님이 저를 적당히 포기한 것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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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저를 적당히 포기한 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결혼하란 압박도 거의 없었기에 오래 전, 결혼하지 않겠노라고 말한 적 있는 데 그것이 먹힌 줄 알았습니다.
네.. 그럴 리가요.. -_-;; 부모님은 그냥 저를 부끄러워하실 뿐입니다. 저 무능한 것을 어디다 쓰냐고 생각하고 계실 뿐입니다. 크크. 저로선 이런 위치가 더 편하니, 좋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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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에 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선 볼래?”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으잉? 속으로 ‘드디어 압박이?’라며 살짝 짜증이 날 뻔 했습니다. 더 안 듣고 싫다고 했습니다. 엄마 님도 제가 거절할 걸 알고 물었더라고요. 그러면서 병원의 약국에서 일하는 약사며 집안이 상당히 좋은 곳에서 선자리가 들어왔다고 하네요. 아는 사람이 주선했다나요. 엄마 님께서 말씀하시길, 돈 벌이도 제대로 못 하고 어디 내세울 것도 없는 저것을 어떻게 선 자리에 내보내겠느냐고 주선인에게 답했는데, 주선한 사람과 상대방도 그걸 알면서 제안했다고 하더라고요. 으익.. -_-;;
이 대화를 통해 집에서 제게 결혼을 비롯한 이런저런 압박을 가하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냥 제가 부끄러우셨던 거예요. 크크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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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고 선을 한 번 볼까,라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이른바 경험치 획득 및 완전 포기하도록 만드는 작전이죠. 하지만 상대방에게 무슨 죄랍니까. 아울러 그 자리에 나가봐야 어색함과 침묵만 겹겹이 쌓일 뿐이겠지요. (하지만 상대방도 집사라면? 혹은 상대방도 레즈비언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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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한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 소식을 조금 들었습니다. 누가 결혼했다는 이야기, 누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누가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 대학 졸업과 취직 관련 얘기를 들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바뀌었네요. 네, 저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봅니다. 정신 연령은 아직 16살인데.. 억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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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엄마 님께선 박사 졸업하면 꼭 결혼하고 제대로 된 곳에 취직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엄마… 그 얘기, 제가 석사과정 입학할 때도 “석사 졸업하면..”이라고 했던 말이야..라는 말, 차마 못 했습니다. 크.
박사가 끝나면, “너 교수만 되면 꼭..”으로 자동 연장되길 바랍니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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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계약 연장과 관련하여, 금액은 그대로인데 교회에 나가는 것이 조건이라고 말하자, 부모님 모두 “돈을 더 올려주면 올려줬지 교회는 안 된다.”
아… 까먹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독실한 불교신자..라기보다는 교회만은 안 되는 불교신자. -_-;; 이 말을 듣고 떠오른 일화. 십대 시절 부모님은, 어떤 애인도 상관 없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은 안 된다고 하셨다지요.
그러고 보면, 좀 다른 이유로 저도 일부 보수 기독교 신자를 싫어하긴 합니다. 아닌가. 싫어한다기보다는 그냥 가엽게 여기나요? 혹은 그냥 안쓰럽게 여기나요? 사실 저는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그쪽에서 저의 관심을 끌려고 너무 노력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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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싫은 이유를 들라면 적어도 37가지를 나열할 수 있겠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싫은 이유는 두 개인의 관계가 집안의 안줏거리가 된다는 점입니다. 두 개인의 만남을 부모에게 ‘보고’해야 하는 것, 너무 끔찍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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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타고 오고 가며, 부산 가는 길에 글 한 편, 서울 오는 길에 논문 한 편을 읽었습니다. 아, 뿌듯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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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동안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사람 없는데, 명절이란 행사가 유지되고 있는 것도 참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