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1980년대, 1990년대 잡지들 중 몇 가지를 뒤적이고 있어요. 찾는 자료가 있으나 검색으론 찾을 수 없으니 하나하나 뒤지는 수밖에요. 덕분에 무척 재밌는 기사들을 발견하죠. 그럴 때마다 좋아하고 놀라고, 새삼스럽고 그래요.
01
가장 즐거웠던 순간 중 하나는 1997년에 정희진 선생님이 쓴 글을 발견했을 때죠. 아마 선생님도 잊고 계실 글이지 않을까요? 아닐 수도 있지만요. 지역주의-남아선호사상-국가균형발전-젠더-‘남성’권력을 키워드로 쓴 글이에요. 그때도 선생님의 글은 날카롭고 매력적이죠.
그런가하면 1990년대 중반에 나온 동성애 관련 기사도 발견했죠. 동성애인권운동을 시작하고 1~2년 정도 지난 1995년에 나온 글이니 무척 반가웠어요. 96년 즈음엔 동성결혼을 언급한 기사도 있더군요. 이런 흔적 찾기는 역사를 다시 상상하는 원동력이라 즐겁죠. 이런 기사가 우연히 하나만 실렸다면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반복해서 등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죠. 기존의 역사를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 소중한 기록물이 되니까요.
1998년도 기사엔 마이크로소프트(MS)가 한국시장 점유율 100%를 노린다는 기사도 있더군요. 오오, 놀라워라. 현재 100%는 아니어도 99% 정도는 된다고 하니, 성공한 걸까요?
02
1980년대부터 등장한 르포, 기사, 세태비평집엔 “양키 고 홈”을 외치는 글들이 자주 등장해요. 갖은 욕설과 혐오로 미군철수, 때때로 “미군근절”을 주장하죠. 사람을 근절하자고 하니 섬뜩한데 이런 표현은 한두 명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울러 미군과 미국 때문에 한국 문화가 타락한다며 걱정하는 기사와 책도 상당합니다. 1980년대부터 등장하는 민족주의 운동권의 전형이죠. 재밌는 건 백인과 흑인을 대하는 방식이 상당히 다릅니다. 백인보다 흑인을 비하하는 표현이 더 자주 등장하고, 더 쉽게 등장해요. 어떤 글에선 “백인도 아니고 심지어 흑인과 연애를”이라고 개탄합니다.
전 이런 혐오발화가 한국의 민족성을 만들려는 운동권 진영과 군사정권의 무/의식적 기획이라고 판단합니다. 순수한, 때 묻지 않은, 동방예의지국인 한국 이미지를 만들어 내려는 기획이죠. 확실한 기록물을 찾은 건 아니지만, “백의민족”이란 언설도 이즈음 등장하지 않았을까요? 용어 자체는 그전부터 있었다 해도 1980년대 들어 “백의민족”이란 표현이 의미를 가졌을 듯합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이런 논리에서 “여성의 순결”은 토대며, ‘여성의 가치’를 판단하는데 ‘순결’ 여부는 핵심이죠. 얽히고설켰어요. 그래서 민족의 순결을 걱정하시는 이들 상당수는 기지촌에서 발생한 폭력과 범죄에 침묵하거나 “미군철수”를 주장할 도구로만 활용합니다.
아울러 이런 분위기에서 애국주의는 운동권의 핵심 같습니다. 결코 한국을 비난해선 안 되는 분위기죠. 1990년대 초반 진보언론을 자처하는 잡지에선 한국 남성들이 군대에 가지 않으려 한다며 개탄합니다. 한국은 절대로 지켜야 할 대상이며, 애국주의, 민족주의와 같은 가치는 논의 자체가 불가능한 절대가치로 등장합니다. 물론 이 시기에도 민족주의, 집단주의를 비판하는 글들이 꽤 있지만, 주목받진 않아요. 그들 상당수가 페미니스트들이라 더 그렇고요.
2PM 사태를 접하며, 옛날 기사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니, 옛날 기사를 읽으며 2009년도 잡지를 읽고 있는 건가 헷갈려 잡지 발행 시기를 확인했습니다. 제2의 유승준 사태죠. 아울러 전 이 사건이 성폭력피해경험자에게 ‘순결’, ‘진정성’ 여부부터 따지는 논리와 동일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여성’의 몸으로 민족의 순결을 재현하고 표현하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순결’과 민족의 순수성은 동일합니다. 재범이란 이는 이를 위반한 거죠. 그나마 그가 ‘남성’으로 통하는 몸/외형이기에 이 정도에서 그친 거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 상상하지 않으렵니다. 너무 끔찍하거든요.
한국의 언론 자유는 ‘김일성만세’에서 출발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지적한 김수영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상당히 위축되었다며 2MB를 원인으로 꼽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요? 굳이 원인을 찾자면, 2MB 때문에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거나 없는 게 아니라 집단주의 때문이죠.
안타깝고 화날 따름이에요.
[태그:] 성폭력
트랜스젠더, 성폭력, 그리고 정체성 구성
요즘 정신이 없긴 없나보다. 며칠 전엔 받은 걸 안 받았다고 해서 상대방을 당황하게 했고, 어제는 얼추 일주일 전부터 가겠다고 다짐하고 계획을 세운 공연에 못 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다. 정말 가고 싶었는데… ㅠ_ㅠ
이제 열흘 정도 지난 것 같다. 그때 이후로, 컴퓨터 앞에 앉으면 어김없이 하는 검색어가 있고, 수시로 논문 검색 사이트에서 관련 검색을 하지만, 마땅한 자료를 못 찾고 있다. 자신을 대신할 만한 어떤 글을 찾고 있는데 딱히 몸에 드는 글을 못 찾고 있달까. 그날, 그 전화를 받는 순간, 떠오른 “루인”이라고 불리는 이의 13년 전 경험이나 7년 전 경험을 설명하려고 애쓰면서.
아마 여성학 수업을 듣고,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서 관심이 가장 많이 쏟은 분야는 성폭력이었다. 의도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수업시간에 발표를 하게 되면 선택하는 주제는 성폭력이었고, 기말시험으로 레포트를 제출할 때에도 주제는 성폭력이었다. 무언가를 설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면서도 모른 척 했거나, 정말 모르면서 아는 척 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려나 뭔가를 설명하고 싶었지만, 당시 읽은 자료의 상당수가, 당시 들은 수업의 상당수가 얘기하는 논의들로는 “루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의 경험을 설명할 수 없었던 건 분명했다. 하긴, 그 시절엔 설명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도대체 무얼 고민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지경이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얼추 2년 전부터 트랜스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그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고민의 방향을 모색하면서, 어떤 주제엔 집중했고 어떤 주제는 잊곤 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읽은 글의 상당수는 젠더이론이었고, 혐오범죄와 관련한 글일 때도 여러 혐오 범죄 중 하나로(일종의 사례로), 성폭력이나 구타 등을 얘기했지, 이런 폭력들이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이런 경험들과 트랜스 정체성이 어떤 식으로 상호 작용하는지에 대한 글은 읽은 적이 거의 없었다. 물론 자신이 트랜스라는 걸 말한 후 경험하는 혐오범죄로서 성폭력을 언급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긴 하지만, 거의 모든 글이 성폭력을 혐오범죄의 하나로*만* 다루는 경향들이 있다. 하지만 성폭력 경험을, 트랜스들이, 맥락이 다른 mtf/트랜스여성이나 ftm/트랜스남성들이 그저 혐오범죄로*만* 경험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갑갑했다.
지금까지 읽은 글들을 떠올리고, 새롭게 자료를 검색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폭력은 혐오범죄의 범주로만 설명하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희망을 걸었던, 홀리 데버의 [FTM]이란 책도, 거의 700페이지에 달해 FTM정체성 구성을 이야기 하지만, 성폭력과 관련해서 자세히 다루는 것 같지 않고(확실한 건 아님). 그러니까, 흔히 말하듯, 어릴 때 성폭력 경험이 트랜스젠더가 ‘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주제가 아니라, 트랜스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는 과정에서, 트랜스로 정체화하고 살아하는 과정에서(그래서 호르몬이나 수술을 했을 수도 있고 안 했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경험하는 성폭력은 정체성 구성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 하는 고민이다. 비단 혐오범죄로서의 성폭력 뿐 아니라, 혐오범죄가 아닌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들도. (혐오범죄를 강조하다보니 혐오가 아닌 맥락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은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생긴 걸까.)
거의 처음인 거 같다. 어떤 고민을 시작할 때, 관련 문헌부터 이렇게 악착같이 찾기 시작한 건. 보통은, 어떤 고민을 시작하면 루인의 생애를 통해 한참을 고민한 후에야 문헌을 찾았는데. 이미 관련 논의를 조금이나마 읽었거나, 과거부터 했기 때문일까, 아님 당장 문헌부터 찾을 정도로 뭔가를 갈구하는 걸까. 그래서 한편으론 막막하고 먹먹하다. 흔히 얘기하는 “페미니즘 얘기하는 성폭력 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맥락들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