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나, 그리고 얽히고설킨 순간

어제 수업에 쓴 쪽글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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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0.화. 15:00- 수업쪽글.
시간, 나, 그리고 얽히고설킨 순간
-루인
집에 놀러온 지인이 물었다. “지금 몇 시예요? 집에 시계가 없네요.” 자취하며 많은 것 없이도 불편하지 않게 살지만 고집스럽게 두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 달력이 없고 시계가 없다. 종일 집에 있는 날이면, 해가 중천이거나 배가 고플 때 점심을 먹는다. 문득 쓸쓸하면 오후 세 시즈음이다. 몸이 찌뿌드드하면 저녁이다. 시계가 없다고 구체적 시간을 알 수 없는 건 아니다. 핸드폰이 있다. 시간을 알 수 있는 기기는 일부러 켜야만 확인할 수 있는 핸드폰으로 충분하다. 시간 감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시선을 돌릴 때마다 눈에 걸리는 시계시간의 표식을 집에 두고 싶지 않을 뿐이다. 시계시간의 흐름과 내가 생활하는 방식의 흐름의 속도가 같지 않으니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시계시간에 맞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집에 있을 때마저 몸이 피곤한 방식으로 지내고 싶지는 않다.
물론 나는 시간 강박적이다. 약속시간에 늦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아 약속 시간에 1-2분이라도 늦는 일이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고 아르바이트엔 지각한 적 없다. 늦기보단 늘 일찍 도착해서 적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곤 한다. 시간을 어기면 안 된다는 나의 강박은 나의 늦음이 상대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믿음과 상대에게 괜한 낭비를 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다. 시간이 예의가 되는 찰나이자 재화가 되는 찰나다. 이 찰나를 매일 매순간 겪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 편하지 않다. 아니, 피곤하다. 주 5일, 아침마다 알바하러 출근하고 저녁 5시에 퇴근하고, 나머지 시간에 수업을 준비하는 빠듯한 생활. 공부할 시간이 빠듯하니 시간 조율에 신경이 곤두서고, 그래서 시간을 아는 건 피곤한 일이다.
시간에 강박적이라고 시간의 규율에 잘 맞춰 사는 것도 아니다. 내 인생부터가 ‘에러’다. 몇 살에 무얼 해야 하고, 몇 살에 무얼 해야 하고… 20살 대학 진학까지는 대충 생애주기라는 시간을 산 것 같다. 그 이후로 틀어졌다. mtf 트랜스젠더여서 틀어진 것일 수도 있고 대학원생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다른 이유일 수도 있다. 아버지 장례식 때 많은 조문객이 내게 말했듯 퀴어이자 대학원생인 나는, 번듯한 직장도 없고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는 나는 ‘성장을 거부하는 철없는 아이’다. 태어난 년수로는 성인이지만 이성애규범적 생애주기에서 나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고 이기적이고 철없는 아이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아이의 시간과 성인의 시간을 동시에 산다. 퀴어이자 대학원생으로서 나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무언가를 기획한다. 아직 정신을 못차린 아이로서 나는 무엇도 제대로 할 줄 몰라 원가족과 그 지인에게 깊은 한숨을 야기하는 묵직하고 뜨거운 돌덩이일 뿐이다.
가정하기를, 만약 나이 마흔에 호르몬 투여를 시작한다면 나는 또 다른 시간의 동시성을 겪을 것이다. 호르몬 투여는 청소년기의 “2차 성징”과 같은 몸의 시간/경험을 야기한다. 그렇다면 나는 마흔이라는 시계시간과 호르몬이 야기하는 ‘십대 사춘기’를 동시에 겪으리라. 이미 겪었다고 얘기하는 십대의 시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혹은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겪을 것이다. 과거의 시간이 현재에 되풀이 되지만 지금 겪는 ‘과거’의 시간이 과거의 그것과 같지 않고 지금의 시간과 얽히며 그 꼴을 갖춰간다. 불혹과 ‘질풍노도’를 동시에 겪는 건지도 모른다. 시간은 흐르지만 마냥 흐르기보다 뒤엉키면서 움직인다.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 시간경험이 내 몸에 동시에 일어난다. 뜻을 분명하게 하자. 그것은 서로 다른 시간이 동시에 작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겐 분리할 수 없는 사건이 기존 시간경험에선 분리해서 설명된다는 뜻이다. 결국 내가 불화하는 건 젠더가 아니라 (어떤 규범적)시간(강박)인지도 모른다.

“다음에”라는 시간

주말마다 부산에 갔다 오고 있습니다. 이번엔 월요일에 처리할 일이 있어 오늘 돌아왔지만요…

기차를 타고, 다시 지하철, 마을버스를 타고, 다시 1km를 더 걸어야 재를 지내는 절에 갈 수 있습니다. 산길을 걸으며, 고인에겐 이렇게 할 수 있는 데 살아 있을 땐 왜 이렇게 못 했을까,란 고민을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인을 향한 애도와 예의는 챙기면서 생전엔 왜 이렇게 못 한 것일까요? 전 얼마나 많은 미래를 기대한 것일까요? 어떤 시간을 기대한 것일까요?
부산에 가기 전, 요즘 제 몸 한 켠을 내주고 있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어떤 질문에 “다음에”라고 답을 미뤘습니다. 질문을 받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에”란 시간은 과연 존재할까요? 예전부터 미래 시간을 믿지 않았지만 최근 일을 겪고 난 뒤로 미래 시간을 더욱더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왜 “다음에”라는 미래 시간을 기약한 것일까요?
관계를 예측할 수 없는 미래까지 유지하고 싶다는 바람의 표현일까요? 혹은 이 대답을 할 때까지는, 그 이상일 수도 있지만, 최소한 대답을 할 시간까지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바람을 표현한 것일까요? 혹은 현재를 유예하는 것일까요? 현재 시간을 늘이고 또 늘여서 더 길게 만들고 싶다는 바람일까요?
“다음에”라는 시간은 어떤 욕망 혹은 바람을 내포한 대답일까요? 미래라는 시간은 참 의미가 없는데 말이죠. 전 얼마나 더 많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까요? 그저 현재만,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 달리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말이죠.
“다음에”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금 슬펐고, 미안했습니다.

여러 개의 문이 한 번에 열리는 시간: 나방, 고종석, 교장, 글쓰는 공간, 시간

01
어느 선생님께서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대로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죠. 술자리를 비롯하여 일상에서 성폭력을 빈번하게 행하면서도 진보연 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 행동하는대로 혹은 몸 가는대로 생각하기엔 너무 고통스러워서 생각대로 행동하고 싶은 건지도 모릅니다. 몸 가는대로 생각하고, 그렇게 마음을 놓아보내면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에 차마 몸 가는대로 할 수 없는 거죠. 하지만 또 알고 있죠. 결국 몸 가는대로 간다는 걸. 결국 삶이란 불을 너무 사랑하여 불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 같은 것일까요? 제 몸이 까맣게 타버린다는 걸 알면서도 날아드는 그런 ….

02
고종석 씨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문장에 반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엔 불편한 구절이 적잖아요. 뭐, 어차피 문장을 읽으려고 책을 샀지, 내용을 읽으려고 산 건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잠들기 위해 누워선 몇 쪽을 읽는데 문장이 너무 좋아 잠드는 게 아쉬울 때가 많아요. 그래서 하루에 세 꼭지 정도만 읽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물론 부작용도 있습니다. 그의 문장을 읽고 나면 저의 문장이 너무 비루하여 어떻게 수습할 수 없는 감정에 빠진다는 거죠. ;ㅅ;

03
얼마 전 어느 고등학교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내세워 이슈가 되었죠. 교장은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주려고 했다나 어쨌다나. 요즘 전 그 교장이 특이할 것 없는, 매우 흔한 모습이라고 중얼거립니다. 학생 성적이 학교 평균에 안 좋은 영향을 주니 전학 가라는 교장, 두발이 교칙에 맞지 않다고 학생에게 욕을 하는 교장, 학교 발전 기금이란 명목의 돈을 안 냈다고 학생을 괴롭히는 교장  …. 따지고 보면 제가 경험한 교장들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내세운 교장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물론 모든 교장이 그렇진 않습니다. 일제교사 대신 체험학습을 신청한 학생들을 허가해줬다고 처벌을 받았지만 계속해서 체험학습을 허가하겠다는 교장도 있으니까요. 교장은 모두 나쁘다는 식의 일반론을 펼치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언론을 타는 부정적인 교장이 특이한 경우가 아니란 말을 하고 싶은 거겠죠. 제 글에서 결론이 생뚱맞은 것 역시 특이할 것 없다는 거 아시죠? ;;;

04
가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상하죠? 여타의 인쇄매체나 출판물보다 이곳, [Run To 루인]이란 블로그가 제게 더 큰 책임감을 요구합니다. 당연한 말이긴 하죠. 제가 직접 꾸려가는 곳이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에선 하기 힘든 말, 상당히 조심하는 말을 다른 매체에 기고하는 글에선 거리낌 없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매체 대부분은 이곳을 찾는 분의 수보다 더 많은 이들이 구독하는 매체인데도 그렇습니다. 이곳이 제겐 애증인 공간일 수도 있다는 의미일까요? 아, 애증의 공간은 맞아요. 하지만 이곳에선 종종 구체적인 표현을 할 수 없어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제가 글을 쓰는 공간이 이곳만이 아니란 점이죠. 네, 제가 글을 쓸 곳이 이곳 뿐이었다면 제 삶의 일부는 흔적을 남기지 못 하고, 제 몸 깊은 곳에 침잠하고 용해하여 형태를 못 가졌을 지도 모릅니다. 특정 시간에 기록해야만 의미가 있는 형태를 못 가져 예기치 않은 순간에 엉뚱한 모습으로 튀어나왔겠죠. 다행입니다. 이곳이 제가 흔적을 남길 유일한 공간이 아니어서.

아무려나 제 몸은, 제 몸의 일부는 여러 공간으로 흩어지고 하나로 통합할 수 없는 상태로 부유합니다. 거울에 비친 제 몸엔 꿰맨 자리와 땜질한 자리가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미쳐 꿰매지 못 한, 땜질하지 못 한 제 흔적들이, 제 몸의 일부들이 언제나 제 방에 둥실둥실, 저 허공 어딘가에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이 풍경. 아름다운 풍경.

05
하나의 일이 끝나고 있는 시간입니다. 전 결국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팔자도, 쉴 수 있는 팔자도 아니란 걸 깨닫고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제가 인복이 많다는 걸,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애쓰면 결국 저와 같은 혹은 비슷한 일을 하고 싶거나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