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썩은 냉장고 03

일주일의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그의 흔적을 신경쓰지 않았다. 여행에 따른 피로로 지쳤고 며칠 동안 잠에서 깨지도 않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배가 고팠고 밥을 사먹기 위해 외출했다. 지친 상태에선 음식을 할 기운이 없었다. 간단하게 배만 채우면 그만이었다.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다. 열대야로 밤에도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고 낮잠을 자도 피곤했다. 무더위는 잠을 불렀고 잠은 또 다시 잠을 불렀다. 나는 계속 잠을 잤고 배가 고플 땐 근처 식당에서 밥을 사먹었다. 지독한 더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는 것과 식당에서 밥을 사먹는 것 뿐이었다. 그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 감각은 등줄기와 목덜미, 가슴께를 기어가는 무더운 개미 걸음에 집중해 있었다. 이 개미만 다 없애면 참 좋을 텐데…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더위를 피할 방법은 가만히 있는 것 뿐이었고 샤워를 해도 그때 뿐이었다. 늘 비몽사몽한 상태였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내가 밥을 먹고 있는 건지 어떤 건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그렇게 그가 내게 온지 석달 정도 되었을 때, 더위도 한풀 꺾였을 때, 그제야 나는 생각이 났다는 듯 냉장고를 열었다. 여행을 떠나던 날 지었던 밥과 같이 먹으려고 만들었던 반찬, 냉파스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냉장고엔 생각보다 많이 썩은 그의 몸뚱아리가 곱게 놓여 있었다. 보온상태였던 전기밥솥 속 그의 머리는 잘 익다 못 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아아… 이걸 어떻게 다 치우지…
(끝)

그 여름, 썩은 냉장고 02

우리는 절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특별히 친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끔 만났고 만나면 별 말 없었다. 많은 시간, 침묵을 공유했다. 침묵을 공유할 수 있어 만났는지도 모른다. 침묵을 공유하기 위해 만난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사는지, 잘 몰랐다. 간헐적으로 한두 마디를 나누는 것으로 서로의 일상을 짐작할 뿐이었다.
침묵을 공유했기에 약속을 잡아 만나지도 않았다. 그저 우연히 만나면 합석했고, 각자의 침묵 속으로, 혹은 각자의 일에 몰두했다. 그러다 별다른 인사 없이 누군가 먼저 일어나기도 했고, 내키면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어떤 날은 한두 시간 함께 걷기도 했다. 그가 나의 집을 안 것도 그때였다. 말없이 같이 걷다가 나는 집으로 왔고 그도 함께 했다. 그가 세 번째 왔을 때 처음으로 그에게 냉파스타를 대접했다. 그는 묵묵히 먹었고 맛있다거나 맛없다거나와 같은 얘기는 없었다. 그저 내가 음식을 준비할 때면, 가끔 냉파스타를 먹자고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때 그는 이민을 간다고 했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야 할 필요도 못 느꼈다. 침묵을 공유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이 아쉽기는 해도, 침묵을 반드시 공유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아울러 함께 있어야만 침묵을 공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 방식을 통해 침묵을 공유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가 이민간다는 얘기에, 나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비행기를 타던 날 공항에 나가지도 않았다. 이제 만날 수 없으면 그것으로 족했고, 만난다면 또 그것으로 족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몇 년에 한 번 입국해서 내 집에 머물렀다. 짧으면 열흘, 길면 서너 달 정도를 머물다 갔다. 특별히 무슨 일을 하지도 않았고 어딘가로 외출하지도 않았다. 그냥 머물렀다. 약속이라도 한듯 생필품은 그가 채워넣었고 나는 그가 있는 걸 신경쓰지 않았다. 달라진 건 그저 이인분의 음식을 하는 것 뿐이었다. 그는 존재감 없이 머물렀다. 그러다 돌아가야겠다고 결정을 하면, 별다른 말 없이 떠나곤 했다.
그것도 사오 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그가 사오 년 동안 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가 내게 왔을 때야 깨달았다. 그가 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오 년 동안 연락이 없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 했을 거다. 그리고 내가 많이 지쳤을 때 그가 내게 온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다. 사는 방식에 지쳤거나 퍼지기 시작할 때, 어떻게 알았는지 그는 나를 찾아왔고 며칠, 혹은 몇달 동안 내게 머물렀다. 그가 함께 있다고 해서 특별히 더 힘이 나거나 하진 않았다.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침묵을 공유할 직접적 대상이 있다는 것 외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떠날 때면 조금은 기운을 차리곤 했다. 그가 떠나서 기운을 차린 건지, 기운을 차릴 즈음 그가 떠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여름, 썩은 냉장고 01

냉장고 문을 열자 석 달 정도 썩은 얼굴 없는 그의 시체가 나왔다. 얼굴은 전기밥솥 안에 있었다.
내가 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건 석달 전이었다. 얼추 십 년 전 그는 남미 지역으로 이민을 갔다. 이후 가끔씩 나를 만나러 입국했지만 그것도 몇 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오랜 만에 입국한 그는 가장 먼저 나를 찾았다. 밤새 원고를 마감하고 이제 막 잠들려던 이른 아침이었고 오랜 만에 여행을 떠날 계획이던 날 아침이었다. 그는 몇 년 만에 내 집을 찾은 손님이기도 했다. 내가 어디 사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고 연락도 드물었다. 애써 나를 찾지 않았고 나 역시 애써 그 몇 명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연락을 할 만큼의 애정이 없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어디선가 공사를 하는 소리거나 피곤해서 헛소리가 들리는 줄 알았다. 문을 열자 그는 전날 나가서 밤새 일하고 돌아온 사람처럼 들어와선 침대 한 곳에 쓰러지듯 누웠다. 우리는 말없이 잠들었다. 지독한 더위에 잠에서 깨어났다.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예정했던 시간을 몇 시간 남겨두고 있었다. 그는 뜬 눈으로 누워 있었고 우리는 말없이 더위에 지쳐가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뒀지만 바람은 불지 않았고 무더운 열기만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지쳐갔고 무언가를 먹기 위해 움직일 힘도, 얘기를 나눌 의욕도 없었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무더운 침묵만 방안을 떠돌았다.
더이상 지체할 수 없는 시간이 되어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역시 나를 따라 일어났다. 우리는 냉장고에 넣어둔 미지근한 물을 나눠 마셨다. 샤워를 하고 여행용 가방을 꺼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나는, 얼마나 머물 거냐고 물었다. 서너 달 정도 머물 예정이란 그의 말에, 같이 여행을 갈지 기다리고 있을지, 되물었다. 그는 침묵했다. 딱히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일주일이면 돌아올 여행이었고, 이제 막 입국한 그였다. 대충 짐을 꾸리고서야 무언가 먹을 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고 간단한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말없이 내 행동을 지켜보던 그는 냉(冷)파스타가 먹고 싶다고 했다. 전기밥솥을 힐끔 쳐다본 나는 잠깐 망설였다. 무더위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한여름의 습한 공기가 몸에서 꿈틀거렸다. 다시 한 번 전기밥솥을 쳐다본 다음, 파스타를 만들기 시작했다.
냉파스타는, 그가 나를 찾을 때면 종종 먹던 음식이었다. 특별히 맛있는 음식이 아닌데도, 이민가서 가장 많이 생각나는 음식이 내가 만든 냉파스타라고 했다. 무더위가 개미처럼 목덜미를 기어가는 걸 느끼며, 나는 냉파스타를 만들었다. 면을 삶고 버섯과 마늘, 고추를 볶고… 열기가 얼굴에 닿을 때마다 기어다니는 무더운 개미가 늘어났다. 한 마리, 두 마리, 서른 마리.. 그리고…
다 만든 냉파스타를 그와 나눠먹었다. 양 조절에 실패해서 남은 파스타는 냉장고에 넣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그가 곧 먹을 테니까. 설거지를 끝내고 나는 말없이 여행가방을 챙겨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