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셜록 홈즈

[셜록 홈즈] 2009.12.27.일. 10:20. 아트레온 5관 7층 E-5.

영화가 끝나고, 출구로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얘길 들었다. 워낙 목소리가 커서 듣지 않을 수 없었다. ㅡ_ㅡ;; 내용인 즉, 사람들이 깔깔 웃는데, 도대체 왜 웃는지 모르겠다, 유머코드가 다른 건가 싶다는 말. 두 분에겐 죄송. 하지만 깔깔 웃었던 인물 중 한 명이 나였다. 제목만으론 긴장감 넘치는 추리소설을 바탕으로 한 추리영화(서스펜스 스릴러 어쩌구 저쩌구 하는 영화?)일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건과 추리가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내게 이 영화는 낄낄 웃으면서 즐길 수 있는 일종의 코믹물이었다.

원래 이 영화엔 관심이 없었다. 추리소설로서 셜록 홈즈 시리즈에 별 관심이 없어서. 어릴 때 셜록 홈즈 시리즈를 몇 권 읽으면서, 별다른 감흥을 못 느꼈기에 지금도 읽지 않고 있다. 그 시절 나는 루팡 시리즈를 좋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하하. 이 영화에 관심이 생긴 건, 토요일에 지구인 님의 얘기를 들으면서다. 이글루스 이오공감에 오른 어느 글이 한바탕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 얘기를 해주셨다. 영화 [셜록 홈즈]를 “호모영화”로 표현하면서 발생한 논란이었다. 호모란 용어가 문제를 일으켰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퀴어 영화로, 게이 관계로도 해석할 수 있는 영화라니, 어찌 안 볼 수 있겠는가!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재밌다. 하지만 내게 이 영화는 추리영화가 아니다. 일본에선 추리, 환상, 미스터리와 같은 장르소설을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영화는 딱 엔터테인먼트 영화다. 부담없이 즐길 수 있고, 조조에 통신사 할인 가격이면 돈이 아깝지도 않은 영화. 추리가 등장하지만 굳이 추리 어쩌고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즐길 수 있는 영화.

사실 추리영화로 부르길 망설이는 이유 중 하나는, 결국 주인공만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추리가 과연 추리일까, 싶어서다. 소설에서건 영화에서건,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는 건 결국 작가와 주인공 뿐이다. 비록 독자와 관객이 대충 예측은 할 수 있다고 해도, 정보의 불균형은 상당하다. 뭔가 암시를 주긴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영화에서 등장하는 쥐꼬리가 무슨 의미인지, 뼈 조각이 무엇인지 사건의 전말을 주인공이 설명하기 전까진 결코 알려주지 않는데, 이게 무슨 추리람. 주인공은 추리를 하겠지만, 독자가 할 수 있는 추리의 정보는 매우 적으니 추리를 하는데 무리가 있다. 그러니 이제 독자와 관객이 할 일은 얼마나 재밌게 즐길 수 있는가가 관건.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충분히 재밌다. 굳이 추리를 할 필요도 없다. 추리는 주인공이 할 테니까. 나는 그것의 타당성을 검증하고, 엔터테인먼트란 장르 명칭답게 충분히 즐길 수 있는지만 확인하면 그만.

이 영화를 읽는 내내 깔깔 웃었는데, 그건 홈즈와 왓슨의 관계 때문이다. 왓슨 없으면 사실상 아무 것도 못 하는 홈즈와 홈즈를 떠나고 싶어하지만 결코 떠나지 않는 왓슨의 관계는 확실히 현대적 범주용어로 동성애 관계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1900년 전후로 등장한 소설에서 남성들 간의 관계는 대체로 이러했다. 우정과 애정 사이에서 매우 미묘했다. 그러니 이들 관계를 꼭 게이관계로 단정할 필요도 없다. (물론 영화가 2009년도에 나왔다는 점에서 1900년 전후의 소설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둘의 관계는 미묘하게 재밌다. 일테면 왓슨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홈즈와 다시 만났을 때, 홈즈는 왓슨에게 다시 만나서 기쁘다는 말을 한다. 이 말, 뉘앙스가 매우 미묘하다. 설레는 고백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멋진 부분은 따로 있다.

왓슨은 홈즈와 동행하다 결국 일시 감금된다. 구금시설에서 왓슨은 홈즈에게, 밤새 지난 7개월 간의 일을 메모한 일기를 다시 읽고는 자신이 미쳤다(확실한 건 아닌데, disturb인가 disorder인가 하는 용어를 사용한다, 확실한 건 아니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이 매우 의미심장했다. 1800년대 후반, 1900년대 초반 유럽에서 동성애 관계는 일종의 정신병, 질병이었다. homosexuality란 용어는 정신병 진단범주로 등장했다. 물론 다른 많은 것들도 정신병이었다. 합리적 이성이라고 불리는 상상에서나 가능한 행동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정신병이었다. 의사와 탐정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 과학적 이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 시기에 스스로를 정신병으로 부르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합리적 이성이라는 말 자체가 ‘정신병’과 같은 집착, 광기의 산물이란 의미일 수도 있고(‘이성적이여야 한다’는 집착), 비록 ‘합리적 이성’을 상징하는 둘이라고 해도 둘은 정신병으로 불리는 관계란 의미일 수도 있다. 뭐, 다른 의미일 수도 있지만. 정신병이란 표현은 홈즈에게 집착하거나 홈즈에게서 벗어나지 못 하는 왓슨 자신의 행동만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둘의 관계와 둘 모두를 설명하는 단서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영화, 뻔한 안전장치를 사용한다. 왓슨에겐 메리, 홈즈에겐 아이린이 있다. 메리와 아이린은 왓슨과 홈즈가 이성애자라고 안심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둘의 관계가 더 의심스럽다. 뻔한 안전장치가 관계를 더 미묘하게 만들어버렸다. 이성애 규범에 따라 이성애자란 가면을 써야 하는 게이관계거나, 바이거나. 뭐, 대충 그렇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인물은 홈즈. 홈즈가 주인공이라서가 아니다. 홈즈가 할 줄 아는 건, 이성의 결정체라고 불리는 추리 밖에 없어서다. 심지어 자신보다 덩치가 더 큰 사람과의 시합에서도 이성적인 계산과 판단으로 승리한다. 정신은 육체를 이긴다? 하지만 홈즈는 왓슨과 같은 파트너, 자신의 일상을 보살펴 줄 사람이 없으면 거의 아무 것도 못한다. 방 구석에 콕 박혀, 방에서 총이나 쏘고 파리를 잡아 황당한(그래서 은근히 매력적인!! 흐흐) 실험이나 할 뿐이다. 그런데도 그걸 정당하게 말하고, 마치 대단한 것처럼 얘기한다. 이것은 합리적 이성이란 방패막을 사용하는 근대 남성성의 전형 아니던가? 홈즈의 모습은 근대적 남성성의 이상과 실상을 매우 잘 요약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아이린! 극중 인물 중에서 가장 멋있다. +_+

속상했던 관계는 메리와 왓슨. 왓슨은 홈즈와 메리 사이에서 계속 갈등한다. 영화에선 등장하지 않지만, 이 과정에서 메리는 속이 까맣게 탔겠지? 그런데도 끝까지 밝은 모습을 연기하는 메리의 태도는 당대 여성성 규범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왓슨은, 비록 홈즈와의 관계에선 홈즈를 보살피는 역할을 하지만 메리와의 관계에선 메리의 보살핌 혹은 이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홈즈와 별로 다르지 않다. 거칠게 말하면 왓슨이야 말로 ‘점잖은 가부장’의 전형 아니던가?

암튼, 암튼. 영화는 부담없이 꽤나 재밌었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도 나오지만, 2편도 나오겠지? 노골적으로 암시했으니까. 하하.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2009.11.22.일. 12:10. 아트레온 9관 11층 G-10

지난 토요일 쓴 것처럼, 영화관에 갔습니다. 이 영화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 할 말이 없습니다. ㅠ_ㅠ 오락영화로서 재밌습니다. 문제는 그냥 가볍게 즐길 수 없는 영화란 거죠. 일테면 [디스트릭트 9]은 가벼운 오락영화로도 재밌지만, 정치적인 해석에서도 꽤나 유쾌합니다. 그런데 [바스터즈]는 오락영화로 재밌는데, 정치적인 해석에선 꽤나 불편합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제목의 영화가 있었던 거 같은데, 비교할 바 아니긴 하고요. 영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도대체 왜 저런 제목을 선택한 건지 알 수 없는 영화라면, [바스타즈]는 시종일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입니다. 그리고 매우 잘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정치학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데 있는 거죠.

나치군을 처단하려는 미국 군대 “바스타즈”는 프랑스 지역 나치군을 전멸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누구 한 명 살려두지 않죠. 하지만 예외로 살려 둘 땐 이마에 나치표식을 새깁니다. 바로 이 부분이 불편함의 핵심이죠. 이마에 나치표식을 새기는 건, 나치가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혹은 변태)에게 표식을 새긴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울려 트랜스젠더 관련 기사마다 빠지지 않고 달리는 댓글, “트랜스젠더들은 이마에 표시를 새겨서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트랜스젠더인 걸 모르고 연애를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와 다르지 않은 정치학이고요.

감독은 아마, 신우파가 득세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지배질서로 자리하고 있는 이 시대에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표시 남기기라면, 그건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처럼 변할 수 있는 힘을 전면 부정하고 개인을 특정 시기에 고착시킬 뿐이란 점에서 동의하기 힘들어요. 과거를 반성하는 건 당연하지만, 한국의 친일파와 같은 행각은 매우 곤란하지만, 하지만 그것이 몸에 낙인을 새기고 전시하는 방식이라면 … 글쎄요. 선뜻 동의하기 힘듭니다. 이런 방식은 결국, 한 사회의 비규범적인 존재들을 낙인 찍는 방식으로 재생산될 테니까요.

아무려나, 이 영화, 잘 만든 영화이긴 합니다. 영화 초반이 후반보다 더 재밌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요. 흐흐.

[영화] 디스트릭트 9: 이방인, 사랑

[디스트릭트 9] 2009.11.07. 토. 09:40. 아트레온 5관 7층 D-5

01
형식과 내용에 있어, 상당히 만족스러운 영화다. [렛 미 인]이나 [레이첼 결혼하다]와 같은 영화가 있어, [디스트릭트 9]을 올해 최고로 꼽을 순 없지만, 그래도 매우 잘 만들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비규범적인 존재나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를 다룬 영화라고 설명한 듯하여 내가 다시 한 번 말을 보탤 필요는 없을 듯. 짧게만 언급하면, 영화 초반에 “외국인도 아니고 외계인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이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몇 주 전 [시사인]  커버스토리에서 대한민국 평균의 인식을 다뤘다. 그때 나온 질문 중 “자식이 외국인과 결혼한다면?”과 “자식이나 친구가 동성애자라면?”이 있었다. 5명의 대답을 요약하면, ‘외국인은 괜찮아도 동성애자는 안 돼!’ 였다. [디스트릭트 9]에 대입하면 동성애자는 외계인인 걸까?

한국사회에서 ‘이방/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외계인(“프론”)에게 감정이입하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주인공의 몸 변형 과정은 화학적 거세와 성전환 과정을 연상케 한다. 혹은 유전자 변형 식품을 향한 납득하기 힘든 공포를 연상케도 한다. 영화 전체는 철거, 이주, 계급, 인종 등의 이슈를 노골적으로 연상케 한다. 만약 한국 감독이 한국에서 만들었다면, 이 영화는 현재의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삼은 풍자와 블랙코미디로 분석되었을 터. 극장 상영 자체가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어느 기사에서, 이 영화가 남아공의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삼았다고 한다.



02
#이제부터 스포일러 있음!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바커스는 외계 유동액으로 유전자 변이를 일으켜 몸이 서서히 외계인으로 변해간다. 바커스가 일하는 곳인 MNU는 일종의 국제기구이자 세계 2대 군수업체다. MNU가 노리는 건, 외계인들의 무기. 하지만 외계인들의 무기는 모두 외계인의 DNA에만 반응하고 작동하기에 지구의 인간들은 사용할 수가 없다. 근데 유전자 변이를 일으킨 바커스가 외계인의 무기를 작동시킬 수 있자, 이 기회를 놓칠 MNU가 아니다. MNU는 바커스의 몸을 생체실험용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간신히(혹은 당연히?) 도망친 바커스는 외계인 거주지 디스트릭트 9에 숨어들고 그곳에서 크리스토퍼를 만난다. 크리스토퍼는 아마도 외계 비행선 조종사인 듯. 암튼 크리스토퍼는 바커스에게, 유동액에 따른 유전자 변이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해주고, 당장이라도 고쳐줄 것처럼 말한다. 문제는 어떤 기회로(영화에 잘 나옴;;) 자신의 동료들이 생체실험 대상이자 해부학 대상으로 사용됨을 알고선, 분노하여 바커스 치료보다 고향으로 돌아가 군대를 끌고 오는 일을 우선하겠다고 말한다. 고향에 갔다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온 3년 뒤에 바커스를 치료해주겠다고 말하는 것. 하지만 바커스는 사랑하는 자신의 아내를 당장 만나야 하기에 고향 크리스토퍼가 고향 가지 전에 먼제 치료부터 해달라고 요구하는데.

뭐, 예상할 수 있듯, 고난을 함께 겪은 이들의 ‘우정’으로 3년 뒤에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크리스토퍼는 고향으로 간다(이 ‘우정’은 이 영화에서 가장 생뚱맞고 재미없었던 부분 중 하나, 난 적어도 이 영화라면 다르게 이야기를 풀어갈 줄 알았다). 그리고 지구에 남은 바커스. 3년 뒤에 크리스토퍼가 돌아올지 돌아오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바커스는 외계인과 같은 외모로 변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거주지역 디스트릭트 10에 머무는데.

#스포일러 끝.

03
난 영화 마지막 부분에 주목했다.

자신의 의지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그저 3년이란 확신할 수 없는 약속만 믿고 기다려야 하는 바커스의 삶이 사랑의 형벌 혹은 사랑이라는 유형(流刑)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갈 수도 없고, 찾아갈 수도 없는 상태. 서로를 사랑하는 상황이지만, 바커스의 아내 사라는 바커스의 생사 여부 자체를 모르고, 바커스는 결코 사라에게 다가갈 수 없다. 외계인의 몸으로 변한 바커스는 새 이주지역, 하지만 사실상 구금지역 디스트릭스 10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곳을 벗어난다는 건, 언제든 지구인들의 구타와 폭력, 혹은 거주지 이탈에 따른 위반 행위로 즉결 처분도 가능한 위험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행여나 다른 사람 몰래 바커스가 사라를 찾아간다고 해도 그것은 위험하다.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이 사람에게 다가갔을 때, 괴물의 외모만으로 사람들이 경악하고 악마로 취급했던 것처럼, 사라 역시 그러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바커스의 변한 외모는 사라가 전혀 모르는 바커스다. 사라의 맥락에서 외계인 형상의 바커스는 바커스가 아니다. 그러니 차라리 3년이란 막연한 세월을 견디는 수밖에. 마지막 통화에서 서로 기다리겠다고,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사랑의 약속은 언제나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같이 한 다짐이어도, 어느 한 쪽이 깰 가능성이 너무 크단 점에서 사랑의 약속은 일방적인 다짐이다.

“나를 기다려 주세요” “우리 꼭 다시 만나”란 말은 창살 없는 감옥이자, 자기 스스로에게 구형하는 무기징역의 형벌이다. 스스로 그 구형을 거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지 않는 이상 평생 갇혀 지낼 수밖에 없는, 언어의 감옥. 바커스는 바로 이런 감옥에 갇혀 지내고 있다. 그가 풀려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3년 뒤 크리스토퍼가 돌아와서 바커스를 치료하는 것. 하지만 이것은 바커스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막연한 기다림이다. 이 기다림은 평생 지속될 수도 있다. 영원한 이별일 수도 있고, 기간 한정 이별일 수도 있는 불안정한 상황.

그리고 3년이면 사랑이 변하고, 또 변할 수도 있는 시간이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실한 기약 없는 상황에서,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3년이란 세월은 사랑의 감정을 유지할 수도 있겠지만, 얼마든지 사랑이 끝날 수도 있는 시간이다. 헤어지는 과정 자체가 워낙 극적이라 그 감정을 유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사랑의 감정을 냉동보관한 건지, 극적인 상황 자체를 기억하는 건지 확실하지 않다. 무엇보다 바커스와 사라는 서로 너무 다른 상황에 있다. 사라는 바커스의 생사여부를 모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연애와 사랑이 가능한 곳에 머물고 있다. 외계인 혐오증이 있는 바커스는 외계인의 몸으로 변한 상태에서 사라만 그리워하며 외계인 거주지역에 머물러 있다. 바커스는 사라를 죽을 때까지 그리워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사라도 그럴까? 3년 뒤 크로스토퍼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그때도 사라는 바커스를 기다릴 수 있을까? 그리고 바커스는 어떤 감정으로 사라를 기다릴까? 그때도 여전히 사랑이라는 말로 감정을 포장한다면, 어떤 모습의 사랑일까?

이 불우한 사랑의 끝은 어떤 모습일까? 이루고 싶어도, 서로가 서로를 바라고 있어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결말은 어떤 모습일까?

… 나는 이런 상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