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쓰기에서… : 스톤월 항쟁Stonewall Riot 관련 메모

ㄱ. 증언에 따르면 한 부치가 호송차량에 강제로 끌려가던 중, 강력하게 경찰에 저항했고 이것이 항쟁을 촉발했다.

ㄴ. 주변에 있던 아프리칸-아메리칸과 라틴계 퀴어들(드랙, 퀸 등)은 경찰이 자신의 ‘자매’인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현장에 개입하여 저항했고 이것이 항쟁을 촉발했다.
ㄱ과 ㄴ은 미국 퀴어의 역사를 회고하며 증언한 내용이다. ㄱ은 스톤월 항쟁이 촉발한 배경을 증언한 내용이다. ㄴ은? 역시 스톤월 항쟁이 촉발한 배경을 증언한 내용이다. 둘 중 하나만 진실이란 뜻은 아니다. 둘 다 (부분적)진실일 것이다. 어떤 부분적 진실을 선택하느냐가 논쟁이다. 또 다른 증언에 따르면, 이렇게 저항이 촉발하는 와중에 트랜스젠더인 실비아 리베라가 경찰에게 맥주병을 던졌고 경찰이 리베라를 경찰봉으로 찌르면서 항쟁이 본격화되었다고 한다.
어차피 모두 증언이고 해석이다. 중요한 것은 스톤월 항쟁이 백인 중심인 동성애자 운동의 기원으로 소환되었다는 점이다. 스톤월 항쟁은 동성애자만의 항쟁도 아니었고, 백인만의 항쟁도 아니었다. 그 항쟁에 많은 비백인이 있었고, 트랜스젠더 혹은 트랜스섹슈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들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항쟁이 끝난 후 스톤월 항쟁은 (백인)동성애자 운동의 기원 서사가 되었다.
이런 서사는 이전에 발생한 여러 사건을 은폐했다. 1950년대 일어났던 쿠퍼스 도넛 가게 항쟁, 듀이스 항쟁, 1966년에 일어났던 컴튼 카페테리아 항쟁 역시 저항 운동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특히 컴튼 카페테리아 항쟁은 트랜스젠더와 비백인의 연대, 십대와 비십대의 연대를 이뤘다. 컴튼 항쟁 이후 샌프란시스코 사회는 트랜스젠더를 시민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성과지만 묻혔다.
스톤월 항쟁 이후 동성애자해방전선이 만들어졌다. 이 단체는 스톤월 항쟁의 정신을 이어받지만 백인 동성애자 남성 중심이었다. 비/백인-트랜스젠더 등은 이 단체에서 배제를 경험했고 결국 별도의 단체를 설립했다. 그리고 스톤월 항쟁은 백인 동성애자(특히 게이 남성) 운동의 기원으로 소환되었다. 이후 역사는 마치 동성애자가 시민권운동에, 해방운동에 앞장 섰다는 식으로 회자되고 트랜스젠더 운동은 1990년대에나 등장하는 식으로 기술된다. 물론 트랜스젠더 운동 역시, 백인의 경험에서 기술하느냐 비백인의 경험에서 기술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이태원 트랜스젠더 역사를 찾으면서, 늦어도 1960년대 중반부터 트랜스젠더가 마을 유지로 살았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고민하도록 한다.(그 시절의 개인에게 트랜스젠더란 범주를 명명할 수 있는가,라는 논쟁은 별개로 하자.) 한국에서 퀴어의 역사는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까? 과거의 흔적을 찾다보면, 한국 트랜스젠더 운동 혹은 이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하리수 씨의 방송 등장은 어쩌면 너무 늦은 사건이란 고민을 한다. 좀 더 일찍 나왔다면 어땠을까? 한국 퀴어의 역사는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오래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이란 얘기다. 뭐, 뻔한 얘기기도 하다.
+
그나저나 하리수 아카이브를 만들어야 했는데… 으흑…

트랜스젠더 기록: 이태원 사진기록, 신문 기사

원문 출처: http://goo.gl/w7bhs
이 글은 원문을 확장한 것. 🙂
01

지난 금요일 외출을 겸해서 이태원에 있는 트랜스젠더 클럽/바 입구와 간판 사진을 찍으로 돌아다녔다. 내가 파악하고 있는 트랜스젠더바는 14개다. 이태원 소방소 근처에 대부분이 모여있고 몇 개는 좀 멀리 떨어져 있다.
 

근데 어느 기사에서 15개를 언급하여… 나머지 한 개는 어딨지? 정말 15개냐, 아님 대략 15개 정도를 15개라고 확정해서 말한 것이냐… 흠… 아니면 내가 하나라고 추정한 곳에 두 개가 있울 수도 있다. 작년 어느 시간까지는 한 건물에 두 갠가 세 개가 있기도 했는데 지금은 좀 애매한 상태다.

이태원 지역 트랜스젠더 바/클럽의 사진을 찍는 작업은 작년부터 벼르던 일이다. 더 정확하게는 이곳에 이사 오면서부터 벼르던 일이었다. 그걸 이제야 시작했다. 일단은 처음이니 스케치하듯 찍었다. 소소한 기록용으로 쓰기엔 무난하지만 제대로 사용하기엔 부족하다. 하지만 내가 전문 사진작가도 아니니 기록을 꾸준히 남기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문제는… 내가 사진 찍는 일을 무척 귀찮아하는 인간이라 얼마나 꾸준히 할지가 관건이로구나.. 으하하. ;;;
02
목요일에 트랜스젠더 부부의 사고 소식이 났다. 관련기사: http://goo.gl/VLhHq
‘mtf/트랜스여성’과 ‘ftm/트랜스남성’이 결혼했고, 이혼을 앞두고 남편 트랜스남성이 아내 트랜스여성을 살해했다고…
관련 기사를 검토하다가 재밌지만 익숙한 사실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기사가 mtf/트랜스여성은 트랜스젠더라고 표시하지고 있다. mtf/트랜스여성이 여성이며 아내란 점을 부인하거나 의심하는 기사는 거의 없다. 반면 ftm/트랜스남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선 난감해한다. 어떤 기사는 가슴을 절제한 여성이라고 표현하고, 여장남자, 혹은 남성 호르몬이 많이 나오는 여성이라고 쓴 기사도 있다. 하리수 씨가 등장한지 10년도 더 지난 지금 한국사회에서 mtf/트랜스여성은 낯설기만한 존재는 아닌 듯하다. 하지만 ftm/트랜스남성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낯설고 어색하며 당혹스러운 존재다. 적어도 주류 언론이 재현하는 모습에선 그렇다. 그래서 어떤 기사에선 “트랜스젠더 살해”란 제목을 뽑기도 했다. 가해자는 트랜스젠더가 아니며 피해자만이 트랜스젠더라는 듯. 기사를 검토하며 한국 사회에서 mtf/트랜스여성과 ftm/랜스남성을 대하고 이해하는 인식의 차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관련 기사를 어렷 확인하면서 이 둘의 관계를 트랜스젠더로 규정해도 괜찮을까,라는 고민을 했다. ftm/트랜스남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함을 드러내는 기사는 이 부부관계를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로 설명하기도 했다. 트랜스여성은 여성, 트랜스남성은 레즈비언 부치로 설명하는 식이다. 내가 처음 접한 기사에선 트랜스여성과 트랜스남성 부부로 설명했기에 나는 이 범주로 사건에 접근했다. 하지만 다른 기사를 여럿 비교 검토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이성애-트랜스젠더 부부로 설명하기 힘들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두 사람의 관계를 이성애 관계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레즈비언 관계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기사를 비교하는 방식으로는 둘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 기껏해야 추정할 뿐이다. 살아 있는 남편에게 직접 묻지 않는 한 이 둘의 범주는 몇 가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도 남편이 해석하는 가능성일 뿐, 고인이 된 아내가 해석하는 범주는 확인할 길이 없다.
범주 해석과 별도로, 관련 기사를 검토하며 mtf/트랜스여성과 ftm/트랜스남성의 위상 차이를 새삼 깨달아 기분이 묘하다. 2006년부터 활동판 언저리에서 밍기적거리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물론 이건 나만의 깨달음은 아니다. 소위 “대중”(나 역시 대중의 일부다)이라고 불리는 영역에선 트랜스여성이 트랜스젠더의 전부다. 소위 활동판이나 학제라고 불리는 영역에선 트랜스남성이 트랜스젠더의 전부다. 물론 이런 단순한 감상은 과장이다. 하지만 과장만은 아니다. 2011년 지금도 신문사에서 트랜스젠더 특집을 다룬다고 하면 트랜스여성만 다룬다. 트랜스남성을 다루는 경우는 드물다. 반면 여성학을 중심으로 이런 저런 학술적 논의 자리, 내가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는 활동판에서 다루는 트랜스젠더는 트랜스남성이 대부분이다. 물론 트랜스여성만 다루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그 논의 대부분이 트랜스젠더의 (이상)심리를 다루는 식이다. 그런 논문은 의미있는 논의가 아니라 무시할 뿐이다. 흥미로운 글 중 mtf/트랜스여성에 초점을 맞춘 경우는 거의 없다. 이 간극은 언제나 재밌는데 미디어에서 재현하고 ‘대중’이 널리 인식하는 트랜스젠더는 mtf/트랜스여성이 전부인데 의미 있는 학제 논의는 ftm/트랜스남성이 전부라니..(아, 이건 내가 속한 분과의 문제인가.. 흐흐.;; )
아무려나…
고인에게는 애도를… 부디 다음 생은 원하는 삶이길…
가해자에겐 위법행위에 대한 처벌만 있길.. 다른 혐오는 없길…(이것이 가장 무섭다.)

최근 읽은 책, 논문 잡담

01

메모: 이태원 원고를 수정하려고 읽은 논문의 핵심은 이주와 젠더-섹슈얼리티 범주의 교차다. 이주와 젠더-섹슈얼리티 경험은 별개가 아니라 언제나 함께 일어난다는 것. 예전에도 흥미롭게 읽었지만 다시 읽어도 흥미롭다.
02
잡상: 1950년대 한국문단의 세계주의와 관련한 논문을 읽었다. 한국도 미국처럼 민주주의 사회가 되고 보편적 휴머니즘을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작품을 쓰면 세계적 문학을 생산할 수 있다는 1950년대의 인식이 흥미롭다. 아니, 이런 인식이 노벨문학상에 목매는 요즘 분위기와 다르지 않아 좀 웃겼다. 아울러 1950년대 한국문단에서 얘기하는 세계문학의 대표주자는 미국이었는데, 그래서 한국에 소개되는 문학의 팔 할은 미국에서 출간된 작품인가? 미국문학작품이 세계적인 것인지, 한국에 미국문학작품만 소개하고 있는 것인지, 미국문학작품이 세계적인 것이 아니라 미국이 국제질서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문학작품의 비중도 커지는 것인지… -_-;;
03
잡상: 대략 8년 전엔 유미리 작품을 꽤나 열심히 읽었다. 어떤 코드가 나와 맞았다. 책을 방출하기 위해 유미리 책을 다시 읽는데 참 힘들었다. 너무 불편해서. 작가에게 젠더 감수성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젠더 감수성이라곤 없지만 괜찮은 작품도 여럿 있다. 하지만 지배규범적 남성의 성적 욕망을 위로하고 보살피는 작품을 읽는 일은 참으로 괴롭다. 근데 이런 책을 방출해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나의 감상일 뿐!
04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양이 만화, [쿠루네코] 5권이 나왔다! 하지만 내가 산 책이 파본(인쇄가 잘못되었다). 교환을 요청했는데 해당 서점에 있는 책이 모두 파본. 출판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쇄를 상당히 찍었을 텐데 만약 1쇄가 모두 파본이라면… 출판사에 애도를…
05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시리즈가 출간되었다. 초등학생 시절 상당히 재밌게 읽은 바 있어 끌린다. 물론 한 권 밖에 안 읽어 전체적으로 어떨지 잘 몰라 걱정. 그래서 선뜻 사서 읽을 엄두가 안 난다. 어디서 빌려서라도 읽고 싶은데 빌려 읽을 곳이 없네… 아쉽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