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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한 통 받고선 오늘 오전에 회의를 하나 잡았다. 가까운 곳이지만 가까이 산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회의를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후, 밥을 먹고 나니 시간이 애매하다. 아카이브 일을 하러 가려니, 도착해서 후치를 꺼내면 알바를 하러 갈 준비를 해야 할 거 같았다. 그래서 그냥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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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牝에 있는 물건들 중, 몇 가지를 제외하면 모두 10살은 먹은 거 같다. 玄牝에 있을 때마다 애용하는 음악재생기는 1997년 겨울에 산 거다. 카세트테이프 두 개를 재생할 수 있는 제품으로, 당시 가격은 무려 88,000원. 만 원 정도를 더 주면 반복재생 기능이 있는 제품을 살 수 있었지만, 만 원이 없었다. 그래서 A면이 다 돌아가면 테이프를 꺼내서 B면으로 바꿔야 한다. 얼추 12살인 이 기기. 재밌게도, 음악을 들을 때면 테이프를 재생할 때가 가장 정감있다. 뭔가 포근하다. 이제는 CD로, 아니 CD에서 mp3를 추출해서 mp3p로 듣는 일상이지만, 테이프로 음악을 들을 때면 선명한 느낌은 없어도 따뜻한 느낌은 있다. 이건 모두 추억, 향수 때문이겠지.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감쌀테니, 이건 순전히 나의 추억, 기억, 경험때문이다. 가끔은 길에서 mp3p말고 테이프 재생기를 가지고 다니면 어떨까 하는 감상에 빠지기도 한다. 하하;;
근데 내겐 무려 20년은 된 거 같은 기기가 있다. ‘아하’라고 불렸던 휴대용 테이프 재생기. 처음부터 내건 아니었고, 다른 사람이 사용하던 걸 물려받았다. 테이프를 들으려면 소리가 늘어져서 힘들지만, 라디오를 듣는덴 지장이 없다. 이런 제품을 모르는 사람에게 보여주면 골동품 취급할까? 신기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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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오래되기로는 지금 내가 사는 집, 玄牝이 가장 오래되었을 테다. 어쩌면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자려고 누워 있노라면 천장이, 벽이 앓는 소리도 들린다. 아침엔 벽이, 천장이 찌익, 찌직, 쿠웅, 하는 소리를 들으며 깨어나기도 한다. 설마 자고 있는 사이에 무너지는 일은 없겠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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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동네가 유서 깊지 않겠는가. 지금 내가 사는 동네만 역사와 이야기가 가득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내겐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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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한 단체는 이제 형태를 바꿀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런 얘기는 나중에,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쓰기로 하자.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지금은 묻어두기로 하자. 기록은 다 남아 있을 테니까.
아울러 나는 이제 그 단체 소속으로 나를 소개하는 일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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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회의는 그 단체에서 하고 싶었지만 못 했던 활동과 관련있다. 회의는 올해 사업으로 어떤 일을 기획하고 있는데 같이 회의를 했으면 한다는 거였다. 즉,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데 같이 얘기를 나눴으면 한다고 해서 잡은 회의였다. 프로포절만 선정되면 정말 잘 할 단체고, 나 역시 어떻게든 같이 하겠다고 말하겠지?
기쁜 일이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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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가 바랐던 형태로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걸까? 그런데 내가 바란 형태란 건 어떤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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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과 이태원 지역을 중심으로 트랜스젠더의 역사를 홅으면,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가 구분되었던 적은 없는 듯하다. 한 동네 주민으로 살며 서로 돕고 싸우고 친목모임을 꾸리고 욕도 하면서… 그냥 세상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 이곳에도 있(었)다. 이런 역사, 그리고 현재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소위 말하는 정체성이라는 건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정체성이라는 범주 구분이 개인의 경험과 개인들 간의 친밀감을 단절내는 건 아닐는지. 저 사람과 이 사람은 다르다는 식의 구분짓기, 범주를 나눠 설명하는 방식이 결국 ‘경험’과 ‘공동체’를 논쟁과 싸움의 장으로 만드는 건 아닐는지. 간단하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정체성이라는 범주가, 집착할 수록 폭력적으로 변하는 건 확실한지도 모른다.
(오프라인으로도 만나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렇게 말한다음, “아님 말고”라는 말을 덧붙일 거란 걸 알겠지?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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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건, 그런데 결국 따뜻했거나 아팠거나 어쨌거나 추억으로 각색된다는 의미겠지. 1997년 말에 산 기기도 용산과 이태원의 역사도 모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각색하는 이야기들이다. 어떤 식으로 각색할 것인가? 관건은 이것이지만, 이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아무려나 올해의 나는 또 어떤 일을 하려고 아둥바둥할까? 생활비가 나오는 일, 생활비 정도는 아니지만 공과금에 보탤 수는 있는 정도의 활동비를 주는 일, 이런저런 돈을 주진 않아도 내가 좋아서 일단 하고 보는 일… 아니다. 결국 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들이다. 그리고 상대방은 언제나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려고 애써서 고마울 뿐이고. 위태롭지만, 위태롭다고 광고를 하니 그냥 죽으란 법은 없는지 주변에서도 챙겨준다.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이다.
올해는 또 어떻게 살아갈까?
[태그:] 이태원
무서운 집값: 이사는 물 건너 가는 것인가? ㅠ_ㅠ
방값을 알아 볼 겸, 다른 일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어제 이태원에 갔습니다.
부동산에 가서 그냥 집값을 물었는데요.
평당 오천만 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싼 곳이 평당 이천만 원이라고 합니다. … 허억.
전 제 집의 보증금이면 집 한 평은 살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런데 한 평도 못 사는 군요. 흑흑.
시세를 확인하니 기본 보증금에 월세가 대충 나오죠. 만약 10평인 방을 구한다면 전세로 못해도 이천만 원에서 칠, 팔천만 원이 필요하고 월세로 구한다면 음… 그냥 계산하지 않으렵니다. ㅠ_ㅠ
이태원에서 살기로 한 계획은 포기해야 하는 걸까요? 흑흑.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영화는 감독의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일 뿐인가?
[이태원 살인사건] 2009.09.28.월. 18:10. 아트레온 5관 7층 E-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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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영화제인 SeLFF의 자막 작업으로 읽은 거 말고, 가장 최근 영화관에 간 건 … 무려 3월 15일. 허억. 바쁘다는 핑계로, 학회 일이 있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기도 했거니와 주말에 영화관을 가지 않으니 이런 사태가 발생했네요. 흑. ㅠ_ㅠ
이 영화는 어떻게든 극장에 가고 싶었습니다. 이태원을 배경으로 한다니까요. 물론 어느 기사에서 얼핏, 이태원UN 클럽에서 촬영한 것 외엔 모두 세트장에서 촬영했다는 정보는 이미 읽었어요. 영화의 실질적인 배경이 이태원은 아닌 거죠. 하지만 이 영화는 이태원이 주제어, 핵심어더군요. 암튼, 제목에 끌려 영화관에 갔습니다. 매우 오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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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는 소설의 반은 장르소설이다. 판타지건, 추리소설이건 뭐건. 그 중에서도 추리소설은 꽤나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소재가 살인사건인 추리소설을 읽을 때면 언제나 불쾌함을 떨칠 수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죽은 이는 언제나 대상으로만 남겨지기 때문이다. 작가가 어떻게든 죽은 이를 삶을 영위한 생명으로 다루려고 애써도 어쩔 수가 없다. 살인으로 죽은 이는 언제나 피사체로 묘사될 뿐이다. 이것이 불편해서 불만이었다. 혹시 [옥스포드 살인방정식]을 읽은 분 계시는지? 이 소설은 올해 읽은 소설 중 최고에 속한다. 인간에게 애정을 품는 척하지만, 이 소설은 오직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만 관심이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부분은 이 지점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과 관련 있는 이가 아니면, 등장 인물 중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작가는 매우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른다. (혹시나 앞으로 읽을 분을 위해 여기까지만 쓰지만, 읽었다면 무슨 뜻인지 알 듯.)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죽은 이의 역사는 사건 해결이라는 측면에서만 중요하다. 그 외의 역사는 필요없다. 이 장면은 죽은 이의 애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상처의 무게는 무시된다. 헤집어서 어떻게든 증거를 잡으려고 애쓴다. 물론 한 마디 한다, “많이 힘드시겠지만 …”이라고. 이것 뿐이다. 죽은 이 역시 이 과정에서만 등장한다. 그러고 나면 언제나 사건을 증거하는 피사체로 등장한다. 죽은 이의 몸은 주한미군의 폭력, 주한미군과 관련 있는 한미행정협정(SOFA)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한 증거로만 등장한다. 죽은 이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은 말이 없다. 법정의 방청석에서 구경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직접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들은 억울한 한국, 한미행정협정의 부당함으로 인해 피해만 당하는 한국의 상징이 된다. 사건이 발생한 후 경찰은 애인은 조사해도 혈연가족은 조사하지 않는다. 이미 다 조사한 것처럼 다른 형사가 대신 설명할 뿐, 혈연가족을 조사하는 장면은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애인만 조사한다. 당연하다. 혈연가족은 한국의 억울함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상당히 매력적인 정치학을 펼칠 수 있음에도 매우 평이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아니 평이한 게 아니라 상당히 문제가 많은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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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다 알고 있는 걸까? 이 영화의 주요 공간은 법정과 경찰 취조실이다. 영화 제목에 굳이 이태원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이 영화의 제목을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미국국적소지자 살인사건” 정도려나? 그럼에도 이태원을 제목에 사용한 건 이유가 있다.
감독은 이태원을 주한미군 지역, 미국국적소지자, ‘외국인’들의 공간, 혹은 “점령지”의 상징으로 이해한다. 안타깝다. 이태원을 주한미군의 점령지이자, 한국의 피식민 상태의 상징으로 파악하는 건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운동권문학에서 주로 사용한 방식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시가 끔찍할 수 있습니다. 미리 경고합니다.*
혹시 밤 두 시나 세 시경 異胎院에 가보았나
불야성이 어떤 곳인지
치외법권이 어떤 것인지
산발한 반 토막 꿈 어지럽게 흩어지고
이 지상 가장 점잖은 척 음흉한 나라
희고 검은 씨앗, 누워 받는 곳
異胎院, 식민지 일번지 혹시 가보았나
-고광헌 「異胎院」(1985) 중에서.
이태원의 공식 한자 표기는 梨泰院인데 고광헌이 異胎院이란 한자 표기를 사용한 건 이태원의 역사때문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거치며 조정은 일본남성의 아이를 가진 비구니와 여성들을 조선남성의 아이를 가진 여성들과 구분하기 위해 따로 모여 살게 했는데, 그 지역이 현재 이태원이다. 異胎院은, 한자를 통해 알 수 있듯, ‘외국인의 아이를 밴 자궁’이란 뜻이다. 1980년대 중반 즈음부터 반미운동을 펼친 이들은 바로 이를 이용해서 한국이 미군의 점령지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異胎院이란 표기를 사용했다.
2009년의 극장가에 걸린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에서 이태원을 이해하는 입장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자체만 놓고 보면 이태원을 영화 제목으로 걸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태원을 영화 제목으로 걸었다는 건, 이태원을 한미관계의 상징으로 이해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영화에서 이태원은 매우 단순한 공간으로 나타난다. 그저 미국국적의 사람들이 한국인을 살해했지만 한미행정협정으로 살인죄에 따른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의 상징일 뿐이다. 영화에서 이태원은 사람이 사는 동네가 아니다. 유흥가이자 한미행정협정의 보호를 받는 미국인의 특권을 상징할 뿐이다.
그래서다. 영화관에 있는 내내 괴로웠다. 영화가 끝나고 나선 더 괴로웠고.
(괴로워 하는 나 자신이 가증스럽기도 하고.)
03
영화는 매우 중요한 이슈를 가지고 있지만 이 역시 매우 짧게 언급하고 끝난다. 다름 아니라 인종정치, 아니 혈연정치다.
영화에서 살인범으로 지목된 이는 두 명. 한 명은 한국인 아버지를 둔 미국국적의 알렉스다. 다른 한 명은 멕시코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미국국적의 피어스다. 피어스는 그나마 어머니의 국적이 언급되지만 알렉스는 어머니의 국적이 언급도 안 될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감독의 인종정치에서, 더 정확하게는 혈연정치에서 아버지가 한국인이면 어머니의 국적과 인종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일까? 알 수 없다. 영화를 읽는 내내 궁금했다. 도대체 알렉스의 어머니의 국적과 인종은 무엇일까? 하지만 오직 아버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알렉스의 아버지만 나온다. 결국 아버지들의 싸움이다. 멕시코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피어스의 부재하는 아버지와 한국인 아버지의 피를 받은 알렉스의 끊임없이 등장하는 (힘 있는)아버지의 대립일 뿐이다. 이것은 죽인 이게서도 마찬가지다. 죽은 이를 설명하는 몇 안 되는 내용 중엔 3대 독자란 말도 있다. 이 말에 감독의 의도가 분명하게 담겨 있다.
영화 초반에 피어스를 본 박대식 검사는 “미국인이 왜 저래?” 인가 “한국인이 왜 저래?”인가, 암튼 얼굴 모습으로 인종을 구분한다. 그때 검사 옆에 있던 이가 멕시코인 미군과 기지촌에서 일한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라고 설명한다. 외모로 인종과 국적을 구분하는 것도 매우 논쟁적인 이슈지만, 나의 관심은 조금 달랐다. 만약 피어스의 아버지가 백인미국남성이었다면, 난 좀 의심했을 것이다. 1980년 전후는 그런 시기였기 때문이다. 기지촌 ‘성노동자’가 백인미국남성과 결혼할 가능성은 매우 적은 시기였다. 1950년대부터 시작한 국제아(혹은 ‘혼혈아’로도 불리는) 이슈는 이태원과 기지촌에서 매우 중요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국적에 따라 미국에 가서 살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한국에서 산다면 그 차별이 극심해서 이태원이나 기지촌을 떠날 수 없었다고 한다.
피어스는 미국국적에 미군이니 그나마 다행이었던 걸까? 별로 그렇지도 않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상, 비록 한미행정협정으로 상당한 특권을 누린다고 해도, 국제아란 지위는 미국국적보다 중요하다. 미군은 피어스가 한국인과 멕시코인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알렉스의 돈 많은 아버지와 변호사 집단은 알렉스가 한국혈통이란 이유로(직접 언급하진 않지만, 영화 내내 노골적이다) 피어스를 범인으로 몬다. 그럼 간단하니까. 하지만 영화는 이 이슈를 외면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형사 중 한 명이 미군의 인종차별 태도를 언급하긴 한다. 하지만 한국인이 국제아와 외국인을 차별하는 태도는 싹 무시한다. 박대식 검사가 피어스 편을 드는 것 같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박대식은 범인을 가리는 게 중요할 뿐이니까(이 태도만은 그나마 괜찮다). 그래서 마치 인종차별은 한국에 없다는 듯, 혹은 피어스는 미국국적이니 국제아라도 한국에선 차별을 받지 않을 거란 듯.
여기서 나는 괴로웠다. 피어스와 알렉스 둘 중 한 명, 혹은 둘 모두가 살인범이어도 미국국적 소지자고 그 중 한 명은 돈 많은 아버지를 둔 덕분에 큰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런데 이 과정을 혈연과 아버지의 싸움으로 바꾸고, 한국인은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하는 감독의 태도에도 화가 났다. 죽은 이의 가족은 슬픔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로 동원될 뿐이란 점음 너무 불편했다. 메시지를 위해 사건을 이용했다는 느낌 밖에 안 든다. 그래서 영화관에 있는 내내, 영화가 끝나서도 괴로웠다. 주한미군의 폭력 문제, 한미행정협정의 부당함을 알리는 방법이 정녕 이것 밖에 없었던 걸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좀 더 성찰하고 더 복잡하게 고민할 수는 없었던 걸까? 이런 식의 인식론에 문제제기하고 있는 페미니즘은 그에게 무의미한 걸까? 정말 묻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