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기: 트랜스젠더는 꼭 수술까지 해야 할까요?

가끔 이메일로 트랜스젠더와 관련해서 인터뷰를 요청 받거나, 간단한 질문을 받곤 합니다. 그때마다 답장을 보내곤 하는데요. 그러다보니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는 경우가 생기더라고요. 아울러 이메일을 보낸 분만 읽기엔 아쉽기도 하고요. 제가 쓴 내용이 좋아서가 아니라(!!) 글을 쓰는 동안 들인 품이 아깝달까요. 하하 ;; 그래서 앞으로는 관련 내용을 정리해서 이곳에 올릴까 합니다. 올리는 주기는 없습니다. 이메일이 오면 그때마다 정리해서 올릴 수도 있고 귀찮으면 한두 번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

이 글 혹은 이 시리즈의 독자는 이제 처음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 이슈나 퀴어 이슈에 관심을 가진 이들입니다. 그러니 내용은 최대한 단순하게 정리했습니다. 내용이 단순하니 문제가 되는 부분이 상당하지만 어쩌겠어요. 😛 이 시리즈(?)에 실릴 글의 상당 부분은 다른 단체에서 발간한 자료집에도 비슷한 내용이 많으니 꼭 함께 읽으시길 바랍니다. 🙂

기본 용어는 KSCRC사전을 참고하세요. 🙂 출판물로는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에 실린 용어정리가 있고, 다른 여러 단체에서 발간한 다양한 자료집도 있습니다.

모든 관련 기록물은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www.queerarchive.org)을 참고하세요. 🙂



질문:
내가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이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고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는 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성전환 수술까지 해야 하는 걸까요?


답변:
일단 트랜스젠더/비트랜스젠더라는 젠더정체성과 동성애/양성애/이성애라는 식으로 구분하는 성적지향/성정체성 개념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을 경우,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수술을 이성애자되기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성적지향은 내가 누구를, 어떤 젠더를 좋아하는가를 핵심으로 해요. 이를테면, 나는 나를 여자로 인식하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상대방이 여성이면 레즈비언/여성동성애자, 좋아하는 상대방이 남성이면 이성애자, 여성과 남성 어느 한쪽만 배타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닌 경우엔 양성애자로 구분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런 식의 간단한 구분이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선 그냥 넘어 갈게요. 하하. ;; )

반면 젠더정체성은 나 자신의 성별(젠더), 즉 흔히 말하는 여성이나 남성 중 어느 쪽으로 생각하는가와 관련 있는 거죠. (물론 젠더가 여성이나 남성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둘만 가정하고 설명하겠습니다.) 나를 여성 젠더로 인식한다면 나의 젠더정체성은 여성일테고, 남성 젠더로 인식한다면 남성이겠죠. 그래서 성적지향이 상대와 나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개념이라면, 젠더정체성은 나 자신의 성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관련 있는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쉬울 듯합니다.

성적지향과 젠더정체성의 관계는, 성적지향이 자신의 젠더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나의 성별, 상대방의 성별을 확정한 다음에야 통상적인 성적지향을 얘기할 수 있죠. 여성으로서 여성을 좋아한다는 말은, 즉 나의 젠더정체성이 여성이고 상대의 젠더정체성이 여성이라고 확정한 다음 우리 둘의 젠더정체성은 동일하다고 가정할 때, 동성이란 개념이 가능한거죠. 이렇듯 성적지향은 젠더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랄까요.

거칠게 설명했는데, 대충 이렇게 이해하면 성적지향과 젠더정체성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다소 다른 개념입니다. 즉 내가 남자 혹은 여자란 것과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 건 다른 이슈인 셈입니다. 성적지향과 젠더정체성을 구분한다면, 성전환 수술은 젠더정체성 이슈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수술이 ‘이성애자 되기’는 아니란 거죠. 🙂 언젠가 기회가 되면(과연?) 정리하겠지만, 트랜스젠더의 성전환수술을 이성애자되기로 이해한다면, 레즈비언인 트랜스여성, 게이인 트랜스남성, 바이인 트랜스젠더를 설명하기 힘들고요.

(논의를 더 진행하면 이런 구분 자체도 문제가 되긴 하지만 여기선 생략할게요. 더 자세한 논의는 … 부끄럽지만 루인 “범주명명과 경계지대”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를 참고하세요. ;;; )


그 다음의 논쟁점은 흔히 얘기하기를 “나는 내가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다”는 식의 표현입니다. 그럼요. 저 역시, 어떤 의미에서, 제가 어떤 젠더인지 크게 개의치 않아요. 하하. 🙂 문제의 핵심은 그럼에도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나를 구분하고 그 구분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남성이 아닌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를 남성으로 구분하고 남자답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식으로요. 아울러 남성처럼 생긴 사람이 자신을 여성으로 설명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이상하게 바라볼 가능성이 크고, 남성처럼 생긴 사람이 여성일 거라고 여기고 여성으로 대하는 주변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암튼 갈등의 많은 지점은 여기서 발생하기도 합니다. 물론 스스로 바라는 몸의 형태가 있긴 하지만 이런 형태는 한 사회의 지배규범과 크게 다르진 않겠죠. 인기 연예인의 몸이 규범적인 몸이 될 때, 많은 이들이 그 연예인을 닮고 싶어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듯. 혹은 실질적인 노력은 하지 않아도 그런 규범으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듯. 수술 자체의 논의는 좀 다르게 가져가야 할 부분이 있긴 하지만, 우선은 이 정도로 설명할까요? (슬쩍 얼버무리고 도망치는 분위기!!) 관련해서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충 정리하겠습니다. 논쟁적이지만 음미할 만한 구절이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내[트랜스젠더]가 젠더시스템을 위반한다고 말하는데 내가 젠더시스템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이분법이 나를 위반합니다.”
-리키 앤 윌킨스(Riki Ann Wilchins).

케슬러와 맥켄나의 『젠더』: 1970년대 젠더 이론을 추적하기

Kessler, Suzanne J. and Wendy McKenna. Gender: An Ethnomethodological Approach. Chicago &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관련 글
『젠더』: 상대방의 젠더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들
두 영혼의 사람들(버다치), 젠더를 이해하는 다른 방식

원래 계획이라면 지난 달에 다 읽었어야 했다. 중간에 여러 일이 있었지만, 이런 이유는 모두 핑계다. 정말 열심히 읽었다면 열흘이나 늦을 리가 없으니, 그냥 게을러서 늦었다.

책 한 권을 읽고 세 편 정도의 관련 글을 쓴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닐 테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하고 싶은 말이 생기고 쓰고 싶은 글이 생긴다면 ‘좋은 책’이지 않을까? 즉, 어떤 형태로건 독자의 몸을 움직이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책’인 건 분명하다. 다 읽었는데도 할 말이 없고 몸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시간 낭비에 가까우니까. 그렇다면 케슬러와 맥켄나의 책은 어떨까? 세 가지로 구분해서 얘기할 수 있을 거 같다.

페미니즘이건 트랜스젠더이론이건 퀴어이론이건 뭐건 간에, 내게 1970년대는 초기에 해당한다. 이론과 논의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번창했다기 보다는 싹이 트기 시작하는 시기랄까. 좀 더 구체적으로 쓰면, 1950년대 중반 ‘젠더역할’이란 용어를 의학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며 ‘섹스역할’과 구분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 즈음 트랜스젠더 개인(Virginia Charles Prince)과 의학에서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섹스와 젠더 구분을 1960~1970년대 페미니즘에서 적극 받아들였고, 젠더는 페미니즘 논의의 중심이 된다. (논의하는 사람에 따라 1930년대의 마가렛 미드를 섹스-젠더 구분의 시발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나는 1970년대까지의 섹스-젠더 구분 논의는 상당히 단순했다고 이해했다. 앤 오클리(Ann Oakley) 식으로, 섹스는 용기처럼 변하지 않지만 젠더는 용기에 담는 내용물처럼 변할 수 있다는 정도랄까? 혹은 성전환수술의 토대를 닦은 존 머니(John Money)나 로버트 스톨러(Robert Stoller)처럼 섹스가 변할 순 있지만, 지정한 젠더를 강화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정도?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1970년대까지는 섹스-젠더를 분명하게 구분할 뿐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란 이분법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기란 인상이 강했다. 이것이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변한다는 게 내 앎의 전부였다. 그래서일까? 1979년에 처음 나온 케슬러와 맥켄나의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들은 시종일관 이분법을 당연하게 가정하는 이론들을 꼼꼼하게 비판하며 이분법을 가정하지 않는 이론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 책은 내가 알고 있던 1970년대 미국 젠더 논의의 지평을 넓혀줬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흥분했고, 마지막 결론을 기대했다.

한편, 이 책은 당시의 범주인 트랜스섹슈얼을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기로 결정한 이유기도 하다. 트랜스섹슈얼을 다루지 않는 젠더 이론이었다면 나중에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젠더 이론을 다루는 동시에 트랜스섹슈얼의 경험도 다루고 있어 예정보다 일찍 읽었다. 다루는 정도도 한 챕터가 아니라 책 전반에 걸쳐 언급하고, 한 챕터에선 집중해서 분석한다. 그리고 트랜스섹슈얼을 다루는 장면에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케슬러와 맥켄나는 두 영혼의 사람(버다치)은 젠더 이분법을 위반하거나 이분법에 부합하지 않지만 트랜스섹슈얼은 이분법을 강화한다고 비판한다. 성전환수술은 트랜스섹슈얼들이 이분법을 내면화하고 강화하는 실천의 하나란 것이 저자들의 주장 중 하나다. 이런 큰 주장때문에, 수술을 바라지 않고, 자신을 ‘여성’이나 ’남성’이 아니라 트랜스섹슈얼로 설명하는 이들의 경험은 잠깐 언급하고 넘어간다. 다른 부분에선 매우 영민한 저자들이 트랜스섹슈얼을 분석할 땐 왜 이렇게 막힌 걸까 싶어 안타까웠다. 이분법을 강화하느냐 하지 않느냐란 논쟁은 소모적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이분법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를 읽기 전 나는 무척 기대했다. 제목도 “Toward a Theory of Gender”(젠더 이론을 향하여)로, 이분법의 한계에 갖히지 않는 새로운 젠더 이론을 제시할 거란 기대를 부풀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 기대는 금물. 간단하게 요약하면, 젠더를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해서 접근하면 차이는 당연할 수밖에 없기에 이런 구분 자체를 질문하고 이분법을 몸에 익히는 과정 자체를 질문하는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  끝. ㅡ_ㅡ;; 1970년대 후반엔 상당히 새롭웠겠지만, 그리고 지금의 어떤 사람들에겐 이 정도의 논의만으로도 신선할 거 같다(젠더는 양성평등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상당하니까). 하지만 나 혹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들에겐 무척 진부할 따름이다. 아니, 내용이 진부한 게 아니라 나의 기대가 너무 컸는지도 모른다. 난 케슬러와 맥켄나가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읽고 싶었지, 문제제기를 읽고 싶었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논문 한 편으로 써도 충분할 주장을 도대체 왜 책 한 권 분량으로 쓴 거냐고!!”라고 구시렁거렸다. 흐흐.

이 책을 읽던 초기엔 이 책이 무척 흥미진진했다. 다 읽고 나니 어쩐지 허탈하다. ;;;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1970년대 젠더 논의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책이란 점이다. 아울러 버틀러와 같은 이의 주장이 뜬금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활발하게 진행한 이론적 논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어 즐거웠다. 젠더 이론을 다루는 수업이라면 이 책을 읽어도 괜찮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