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쳤는데 성공? + 트랜스페미니즘 모색

01
며칠 전 2010년 결산 글을 쓰면서, 여이연 홈피를 링크(http://goo.gl/VQv4g)했다. 글이 실린 이번 호 소개글 겸 머리말이 있어서였다. 특집 주제는 이곳에 오는 분도 관심이 많을 듯해서 뻔뻔하게 링크했지만, 내용은 나중에 확인했다. 글을 읽고 재밌더라. “이러한 의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담고 있는 글”로 나의 글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말 즈음 원고청탁을 받았다. 그때 기획의도는 대충 1990년대 이후 성정치 맥락에서, 앞으로는 어떤 이슈를 어떤 문제의식으로 고민하면 좋을지를 나누는 지면을 마련한다고 했다. 답장에도 적었지만, 정확하게 내가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 아울러 기획의도가 정확하게 와닿지 않았다. 무엇을 하려는 걸까? 뭔가 알 것 같긴 한데, 정확하게 잡히지 않는 상태였다.
내가 둔한 탓도 있거니와, 기획의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탓하는 건 아니다. 이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많은 경우, 기획의도는 시작할 때가 아니라 끝날 즈음 명확해진다. 처음부터 기획의도를 매우 명징하게 설명하긴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무슨 글을 쓰면 좋을까요,라고 다시 물었고 답을 들었다. 꽤나 명확한 내용이라 그 요청대로 글을 구상하다, 막판에 글의 방향을 틀었다. 하하. 지난 글(https://www.runtoruin.com/1738) ㄴ에도 적었듯, 지금 시점에서 해야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깨달았달까. 그래서 글을 쓰며 많이 걱정했다. ‘괜찮을까? 나 혼자 엉뚱한 글을 쓰는 것은 아닐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나의 글을 소개한 구절을 읽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사고쳤는데 그게 성공한 격이랄까? 크크. 암튼 여/성이론 측에 누를 끼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02
여/성이론에 실은 글은 트랜스페미니즘을 모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아직 미흡하지만 나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어서, 나 혼자 좋았던 부분이 있다. 물론 내가 읽지 않은 어느 누군가가 이미 다 했던 말이겠지만. ㅠㅠ
지배규범은 소위 규범적이라고 믿는 이들의 행동을 설명하지 않는다. 비규범적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지배규범을 실천하는 이는 규범적이라고 믿는 이들이 아니라 비규범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 뭐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미디어에서 떠드는 남성성 규범과 소위 아저씨라고 불리는 이들이 실천하는 남성성 규범의 간극을 떠올리면 어렵지 않은 얘기다. 아울러 젠더가 정말 문화적 구성과정이라면, 트랜스젠더 이론과 페미니즘 이론이 젠더 정치로서 어떻게 접점을 모색할 수 있는지를 살피고 있다. 무려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ㅠㅠ
나의 입장에선 뻔한 얘긴데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읽을는지…

[인권오름] 먹는다는 것은 외모를 해석하는 것, 젠더를 실천하는 것: 채식, 외모, 그리고 트랜스/젠더

인권오름 원고 세 번째~

오랜 시간 제 블로그에 오신 분이라면 익숙한 얘기예요. 흐. 인권오름 원고를 쓰겠다고 했을 때부터 저 혼자 의도한 것이기도 하고요. 다만 흩어져 있던 얘기를 좀 더 읽기 쉽게 다듬긴 했어요. ;;; 어떤 의미에선 완전 새 원고지만, 소재나 주장은 워낙 익숙하고 진부해서, 예전 원고 재활용한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요.. 아하하. ㅠ_ㅠ 사실 제가 쓰는 모든 원고가 제겐 워낙 진부한 내용이라 늘 걱정합니다. ‘아, 이 정도 논의는 이미 세상에 널리고 또 널렸는데… 이미 다 아는 얘기를 또 하는 건데 꼭 해야 할까?’라고. 흑흑흑.

암튼… 삽화가 참 발랄하게 들었가지만… 흠… 뭔가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 드네요.. 나쁘진 않지만 썩 유쾌한 기분도 아니랄까요..  -_-;; 흐흐.

“먹는다는 것은 외모를 해석하는 것, 젠더를 실천하는 것: 채식, 외모, 그리고 트랜스/젠더”
인권오름에서 읽기: http://goo.gl/56g2
웹페이지 버전으로 읽기: http://goo.gl/V9oO

그냥 여기서 읽기..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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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_그냥 여기서 읽기|닫기| *지난 번 글( http://goo.gl/fSPH )에 이어서 읽으면 편해요. 🙂

#삽화, 하나
단골로 가는 가게. 그곳에서 주로 먹는 메뉴를 주문할 때면 늘 마요네즈를 빼달라고 했다. 채식을 하며, 계란을 비롯한 유제품도 먹지 않기에 음식을 주문할 때마다 별도의 요청이 많다. 그 가게는 나름 단골이었고 직원은 내가 마요네즈를 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골이었기에 친하다고 느낀 걸까? 음식을 포장하면서 직원이 내게 물었다. “남자 분이 다이어트 하는 것도 아니고 마요네즈는 왜 빼세요?”

#삽화, 둘
가끔 들러 밥을 먹는 식당. 나물 반찬이 잘 나오는 가게지만 계란 반찬이 꼭 딸려 나온다. 먹지 않는 반찬을 받는 건 낭비기에, 매번 거절한다. 역시 몇 번 갔더니 내가 익숙하다고 판단한 걸까? 주인은 “계란도 없고, 반찬이 없어 어떻게 한 대..”라고 걱정했다. 식탁엔 나물 반찬만도 상당했다. 빠진 것은 육식의 한 형태인 계란 뿐이었다. 계란이 빠진 나의 식탁은 반찬이 없는 것일까? 주인은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더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계란을 잘 먹던데…”

음식을 섭취하는 일은 단순히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는 행위가 아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를 실천하는 일이다. 나의 경험에서 채식은 이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실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간섭한다. 혹자는 한국이 나물 반찬이 많기에 그나마 채식을 하기 편할 거라고 말한다. 물론 나물 반찬이 많긴 하다. 나물 반찬에 젓갈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과는 별도로, 나물 반찬이 많다고 해서 채식이 편한 건 아니다. 타인의 행동이 ‘나’와 다르면 간섭하고 훈수 둘 수 있고 때때로 교정해야 한다는 오지랖이 일상인 사회라, 채식을 비롯한 ‘다른’ 행동은 늘 피곤함과 고단함을 동반한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약 내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으로 보이는 외모였다면 어땠을까? 첫 번째 삽화의 점원은 내가 다이어트한다고 단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의 실천은 채식이 아니라 다이어트로 치환된다. 다이어트가 여성에게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다이어트의 정치학은 부각되어도 채식의 정치학은 희석된다(이 두 정치학이 경합한다는 건 아니다). 두 번째 삽화의 주인이라면, 다이어트하냐고 물었을까? 적어도 “요즘 젊은이들은 계란을 잘 먹던데…”와 같은 말은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비슷하게, 음식을 배식하는 식당에서 여성의 밥과 남성의 밥의 양이 다를 때가 많다. 음식 섭취와 채식은 외모를 통해 해석하는 젠더에 따라 달라진다. 즉, 채식을 한다는 것,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젠더 규범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고민한다. 트랜스젠더이며, 남성은 아니지만 남성으로 곧잘 통하는 나의 외모로 나는 늘 고민한다. 내가 만약 호르몬 투여를 상당 기간 진행해서, 여성으로 통하는 외모였거나 여성인지 남성인지 헷갈리는 외모였다면? 그랬다면 점원이나 가게 주인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세상엔 여성과 남성만 존재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트랜스젠더란 존재가 있긴 하지만, 일상에서 만날 순 없다고 여긴다. 트랜스젠더는 여전히 관계 맺기의 기본 토대가 아니다. 아울러 트랜스젠더라면 호르몬 투여를 하고 수술도 하여, 여성이나 남성으로 통하는데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즉, 의료적 조치를 ‘아직’ 안 했거나, 의료적 조치를 선택하지 않는 트랜스젠더를 상상하지 않는다. 만약 세상에 여성과 남성만 존재한다고 여기는 사회가 아니라서 상대의 외모로 젠더를 판단하지 않는 사회라면? 그런 세상에서 나의 행동은 어떤 다른 문화양식과 젠더 규범으로 해석될까? “남자 분이 다이어트 하는 것도 아니고 … “와 같은 말은 어떻게 변할까? 채식과 음식을 먹는 일은 젠더 규범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리고 상대의 음식 습관을 관찰하는 일은 상대의 외모를 관찰하는 일이다. 젠더 판단은 거의 언제나 관찰하는 이의 경험(상상력의 한계)에 바탕을 두고 상대의 외모로 결정된다. 결국 외모에 맞춰 개개인의 젠더를 단정하고, 이렇게 단정한 젠더에 맞춰 식습관을 달리 대한다는 점에서, 채식이나 음을 먹는 일은 내게 트랜스젠더 이슈기도 하다. 트랜스젠더 이슈는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상대를 겉모습으로 피상적인 판단을 하며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단정하는 그 찰나는, 그 단정이 옳건 그르건, 트랜스젠더 이슈를 조우하는 찰나기도 하다.

그나저나 난 밥 먹다 말고 무슨 생각이 이리도 많담…_M#]

***

웹 페이지 버전과 인권오름 버전은 딱 한 줄이 다릅니다. 상단에 건 링크가 빠졌는데, 인권오름에선 필자의 원고를 하단에 모아주니
필요가 없네요. 흐. ;;; 근데 이게 자동으로 모아주는 게 아니라 편집자가 수작업하는 거 같아요…
본문도 조금 다를까요?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는… 아하하. ;; 아무려나 판본이 다양하다는 건 재밌는 일이지요. 😛

트랜스젠더, DSM-V, GID에서 GI로..

1973년, 동성애가 정신병 진단 편람(DSM)에서 빠졌습니다. 그후 동성애는 정신병으로 진단되지 않(았)을까요? 1980년 트랜스섹슈얼/트랜스젠더를 정신병리화하려는 기획으로, 젠더 정체성 장애 혹은 성 주체성 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GID)가 DSM-III에 포함되었습니다. 1994년, DSM-IV에도 포함되었고요. 이것은 통상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을 정신병으로 진단하기 위한 것으로, 동성애와는 무관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아닙니다. GID는 여성이지만 여성답지 않거나, 남성이지만 남성답지 않은 이들을 모두 관리하려는 기획으로, “문화시민 동성애자”를 제외한 모든 변태를 포괄합니다.

그럼 DSM-IV는 GID를 어떻게 설명할까요? 자세한 내용은 http://goo.gl/jxoY서 확인하시고, 개략적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A. A strong and persistent cross-gender identification (not merely a desire for any perceived cultural advantages of being the other sex).
강하고 지속적인 교차-젠더 동일시(단지 다른 섹스의 문화적 이득을 위한 욕망은 아님)

B. Persistent discomfort with his or her sex or sense of inappropriateness in the gender role of that sex.
그 혹은 그녀의 섹스와 지속적인 불편함 혹은 그 섹스의 젠더 역할에서 부적절하다는 감정

“교차-젠더”, “다른 섹스”라고 번역했지만, 사실상 여성 아니면 남성만을 가정하기에 반대의 성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DSM-IV의 정의는 지정받은 섹스-젠더가 당연한 데 그것에 불편함을 느낀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사회문화적인 맥락을 은폐하고 개인이 문제라고 여깁니다. GID가 논쟁인 건, 비단 이런 정의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DSM-IV에 속한다는 것 자체가, 정신병리화의 징표이기에 이것 자체에 문제제기하는 입장이 상당합니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개인을 이분법에 구겨 넣으려는 사회적 인식이 문제라면서요. 물론 이 논쟁엔 계급과 인종 등의 이슈가 얽히면서 좀 더 복잡하고 의료보험적용 문제로 개개인의 위치에 따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긴 합니다.

이런 논쟁과는 별도로, 새로운 개정안인 DSM-V( http://goo.gl/0nL6 )는 새롭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은 개정안이며 확정안은 아닙니다만…

일단 명칭이 GID(Gender Identity Disorder)에서 GI(Gender Incongruence, 젠더 불일치)로 바뀌었습니다. Disorder(장애, 무질서)에서 Incongruence(불일치, 부조화)로 수위가 변했습니다. 정신병 진단 편람에 포함되니 병리화는 하지만, 표현 방식은 바꿨달까요? 아울러 GI를 정의하는 방식도 변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http://goo.gl/MDumhttp://goo.gl/fkCX 참고)

Gender Incongruence (in Adolescents or Adults)
(청소년이나 성인의) 젠더 불일치

A. A marked incongruence between one’s experienced/expressed gender and assigned gender, of at least 6 months duration, as manifested by 2* or more of the following indicators:
최소한 6개월 동안, 두 명 이상의 지정 받은 사람이 인정하며, 자신이 경험하는/표현하는 젠더와 지정받은 젠더 간의 현저한 불일치.

1. a marked incongruence between one’s experienced/expressed gender and primary and/or secondary sex characteristics (or, in young adolescents, the anticipated secondary sex characteristics)
자신이 경험하는/표현하는 젠더와 일차 그리고/혹은 이차 성징(혹은 어린이의 경우 예상되는 이차 성징) 간의 현저한 불일치

2. a strong desire to be rid of one’s primary and/or secondary sex characteristics because of a marked incongruence with one’s experienced/expressed gender (or, in young adolescents, a desire to prevent the development of the anticipated secondary sex characteristics)
자신이 경험하는/표현하는 젠더와의 현저한 불일치로 자신의 일차 그리고/혹은 이차 성징을 피하려는 강한 욕망(혹은, 어린이의 경우, 예상되는 이차 성징의 발달을 예방하려는 욕망)

3. a strong desire for the primary and/or secondary sex characteristics of the other gender
다른 젠더의 일차 그리고/혹은 이차 성징에 강한 욕망

4. a strong desire to be of the other gender (or some alternative gender different from one’s assigned gender)
다른 젠더(혹은 자신의 지정된 젠더와 다른 어떤 대안적 젠더)이고자 하는 강한 욕망

5. a strong desire to be treated as the other gender (or some alternative gender different from one’s assigned gender)
다른 젠더(혹은 자신의 지정된 젠더와 다른 어떤 대안적 젠더)로 다뤄지길 바라는 강한 욕망

6. a strong conviction that one has the typical feelings and reactions of the other gender (or some alternative gender different from one’s assigned gender)
자신이 다른 젠더(혹은 자신의 지정된 젠더와 다른 어떤 대안적 젠더)의 전형적인 감정과 반응을 가진다는 강한 인식

놀란 부분은 두 곳. “개인의 섹스”가 아니라 “지정받은 젠더assigned gender”로 바꾸고, 지정받은 젠더가 “경험하는/표현하는 젠더experienced/expressed gender”와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느끼기에 따라선 매우 놀라운 변화입니다. 충분히 만족스럽진 않아도, 협상에서 수긍할 수도 있는 안이고요. 아울러 “다른 섹스other sex”에서 “다른 젠더other gender”로 표현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대안적 젠더alternative gender”를 추가했네요. 젠더를 둘로 제한하지 않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둘로 제한하지만, 둘 중 하나로만 제한되지 않는 다른 어떤 가능성을 열어두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건 최종안이 나오면 확인할 수 있겠죠(사실 이미 관련 논의가 상당히 나왔겠지만 영어를 잘 못 해서.. ;ㅅ; ). 개정안이 어떤 식의 효과를 가져올지는, 전문을 꼼꼼하게 읽고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해야 하고요. 아무려나 이렇게라도 바뀔 수 있었던 건, 결국 운동의 성과겠죠. 확실한 건 아니지만 DSM을 개정안을 작성할 때 트랜스젠더 활동가들이 참가했다고 들었고요.

사실 이번 개정안에 약간은 구경꾼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은 너무도 다르니까요. DSM이 한국에 상당한 영향을 주긴 하지만, 의료제도부터 일상생활까지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