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이라 본가에 왔습니다. 원래 계획이라면 설 연휴 기간에만 부산에 있을 예정이었는데 집안 사정으로 며칠 더 머물기로 했습니다. 제가 본가와 사이가 안 좋은 걸 아는 분이라면 며칠 더 머무는 게 낯설겠지요. 저도 낯설어요. 이틀 뒤에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으니까요. 그럼에도 며칠 더 머물러야 하는 상황입니다. 바쁘다면, 일이 있다면 머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지만 그럴 순 없으니까요. 이게 정의 문제인지 뒷감당의 문제인지는 애매하고요.
죽음과 삶의 경계, 혹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농담과 규범성을 고민합니다. 구체적으로 밝히면 어머니가 큰 수술을 앞두고 있어요. 상당한 악성이라 걱정이 상당해서 전화만 할 때엔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만나니 약간의 여유와 농담도 있네요. 그런 거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침울함만 머물지는 않지요. 장례식장에도 농담이 있고 웃음이 있는 걸요. 단 한 순간의 농담과 웃음이 없다면 어떻게 견디겠어요. 무거움에 질식하겠지요.
하지만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나오는 얘기는 역시나 규범적 삶입니다. 이야기의 귀결점은 결혼이고 너무 늦지 않게 결혼하라는 얘기를 하시지요. 이제는 고인인 아버지 얘기도 나와요. 어머니 왈, 널 결혼도 안 시키고 내 죽으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겠느냐고 하시죠. 제 가족에게 죽음은 언제나 이성애규범성을 실천하고 훈육하는 장입니다. 그것 아니면 할 얘기가 없는 걸까요? 할 얘기가 없는 건 제 잘못이기도 합니다. 제가 무얼하고 다니는지 말을 안 하니까요. 전 이런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그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어머니나 원가족 입장에선 답답할 테고 결국 할 얘기는 규밤적 삶에 편입이겠지요.
서로 잘 버텨야 하는 시간입니다. 저는 저대로 스트레스를 견뎌야 하고 어머니는 병과 수술을 견디고 버텨야 하지요. 뭐, 어떻게 될 거예요. 어떻게 되겠지요.
다들 설 연휴 무사히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