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해서 안 괜찮아.

01
추석, 서울은 물난리였고, 나는 서울에 없었다. 대신 동거묘들의 안부가 걱정이었다. 잘 살고 있을까?

자연재해도 계급이라고 중얼거렸다. 누구나 알고 있는 얘기다. 폭우의 피해는 반지하에 사는 이들, 상대적으로 가난한 동네 사람들에게 일어났다. 광화문의 배수시설 운운하며 자연재해다, 인재다 논쟁인다. 하지만 배수시설 운운하지 않아도 이미 인재다. 살고 있는 지역, 주거공간의 조건이 계급인 사회에서 이것이 인재가 아니면 뭐가 인재겠는가.

02
가판대에서 정기구독하는 주간지에서 읽은 오래 전 기사. 그 주간지는 복지를 주요 의제로 삼고, 꾸준히 보도하고 있다. 아울러 복지운동을 하는 이들과 대담을 싣기도 했다(몇 달 전 기사다). 복지운동을 한다는 그들은, 예전엔 가족이 복지의 일부를 담당했지만 지금은 가족이 복지를 담당하지 않으니 국가와 제도가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했던가…

“이는 당시만 해도 시장과 가정이 나름대로 복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우선 시장은 일자리를 제공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할머니가 아이를 키우고, 병에 걸린 노인을 며느리가 간호하는 등 가족 내에서 보육·보건 서비스가 제공되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지 않았나. 시장은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가족은 개인화되었다.” http://goo.gl/edJR

속터지는 소리다.

최근엔 복지 확대를 진보를 자처하는 곳의 의제로 삼는 듯하다. 하지만 복지가 정말 진보의 의제일까? 만약 진보의 의제라면, 그 진보를 자처하는 곳에서 가정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하고 의심스럽다. 복지 의제가 만약 다시 한 번 여성 범주에 속하는 이를 억압하고,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비규범적인 존재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면, 이럴 때 복지란 내게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진보를 자처하는 곳의 진보와 내가 상상하는 진보(하지만 난 ‘진보’란 말을 안 좋아한다는..)가 다를 때, ‘다른’ 정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03
확실히 이번 정권의 최대 공적은 특권층, 기득권층의 특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 이전 정권에선 고위공직에 지명할 때, 비리가 있는 사람은 배제했기에 그 비리가 공식적으로 드러날 수 없었다. 고위공직에 지명할 사람의 도덕성 기준이 높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설적으로 특권과 비리를 은폐하며 특권층이 특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운 격이긴 하다. 하지만 이번 정권은 어지간한 비리는 신경도 안 쓰고 지명하다보니, 그동안 은폐된 특권과 비리가 드러났다. 이런 건, 이번 정권이 아니면 결코 못 할 일이다. 이 정권의 최대 업적이라면, 비리척결은 못 해도 비리와 특권 폭로는 했음을 꼽아야 한다. 이번 정권을 겪으며 교훈을 얻었다면, 기득권층이말로 MB 같은 인물에 반대표를 던져야 한다. 아니, 처음부터 MB 같은 인물이 후보에도 못 나오게 해야 한다. 그게 특권층, 기득권층이 사는 길이다.
😛
(갑갑한 건, 현 정권과는 다르다는 국민의정부나 참여정부도 특권층이나 기득권층의 비리와 특권을 제대로 못 다뤘다는 것.)

로이 루이스. 『나는 왜 아버지를 잡아먹었나』: 진화/진보, 부친살해욕망

로이 루이스. 『나는 왜 아버지를 잡아먹었나』. 김석희 옮김. 정신세계사 출판.

01
엥겔스는 100년도 더 전에 가족과 국가의 기원을 밝히려고 애쓴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수렵생활, 주로 과일을 채집해서 먹는 생활에서 목축과 농경으로 생산양식이 변한 것을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로 불렀다. 생산양식의 변화로 남성이 여성을 소유하고, 여성을 이성애 핵가족 제도에 종속시켰다나 뭐라나.

엥겔스 논의는 다양하게 비판받고 있다. 채식주의 맥락에선, ‘엥겔스의 논의는 육식이 채식보다 우월하다는 가치판단에 따른 것이다’로 일갈할 수 있다. 과일이나 곡류를 수집하는 생활에서 가축을 기르고 고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구조를 ‘진보’로 가정하는 것 자체가 채식과 육식에 대한 위계를 드러낸다. 여기에 여성의 성역할과 남성의 성역할을 이미 결정된 것으로 가정하는 건, 한술 더 뜨는 셈이지. 엥겔스의 논의는 그가 살았던 시대가 음식, 여성-남성의 성역할 관계, 젠더와 같은 이슈를 해석하는 방법이 어땠는지를 알려주는 증거로서 유용할 뿐이다.

로이 루이스의 책 『나는 왜 아버지를 잡아먹었나』는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시대는 홍적세. 즉 빙하기로서 20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를 아우르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등장인물들은 홍적세가 끝날 즈음을 살고 있는 이들. 등장인물들은 조금이라도 ‘인류의 진보와 진화’를 앞당기려 애쓰고 있다. 이 소설은, 미하일 일리인의 『인간의 역사』처럼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서 어땠을 거라고 기술하고 있느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역사책들, 역사 소설들은 현재의 입장에서 그들의 행동들이 어떻게 인류 진화/진보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로이 루이스의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류가 어떤 식으로 진보/진화할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소위 진보/진화라는 걸 조금이라도 앞당기려고 애쓴다. 심지어 자신들이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이미 알고 있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잘 모르겠어. 내 생각에는 홍적세 중기쯤이 아닐까 싶다. 벌써 홍적세 후기에 이르렀다고는 생각지 않아. 그렇게 생각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어니스트야, 네 꼬락서니를 보고 네가 하는 말을 들으면 도무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구나.” (91)

“활이야.” 아버지는 짤막하게 말했다. “아직 활이 등장할 시대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나는 이걸 시도할 수밖에 없었어.” (228)


다른 여타의 책들이 등장인물들이 현재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면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알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자 이 책의 장르를 무척 흥미롭게 만드는 지점이다. 그렇다고 등장인물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 것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그냥 직관적으로 안다. 읽고 있노라면 뻔뻔한 느낌이라기 보단 능청스럽다. 그래서 재밌다. 심지어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이제까지는 그랬을지라도, 앞으로는 아니다. 지금 바로 여기서 족외혼이 시작되는 것이다.” (116)


마치 족외혼이 특정 누군가의 시도에 의해,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족외혼뿐만 아니라 불, 창, 동굴벽화 등등 많은 것들에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의 이름이 있다. 이 소설은 1950년대 나왔는데, 당시의 유럽 식민주의 인식을 반영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는 다소 모호하다. 주요등장인물 집단을 우월하고 더 진보한 존재로, 여타의 집단을 열등하게 말하는 장면은 유럽 우월주의를 반영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헷갈린다.

02
이 책이 흥미로운 건, 제목도 한 몫 한다. “나는 왜 아버지를 잡아먹었나”란 구절을 읽으며 프로이트의 부친살해 욕망,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근친‘상간’ 욕망과 금기 등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이것이 이 책의 주요 모티브기도 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긴장 관계 속에서 ‘진화/진보’를 모색하고, 그 과정에서 ‘여성’은 언제나 조력자거나 주변부다. 물론 ‘여성’이 무력한 타자로만 등장하는 건 아니란 점은 분명히 해야겠지만, 한계는 분명하다.

근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다른’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임 대통령과 현재 대통령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아닐까? 아버지를 죽여야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관계. 부친살해에 성공해야만 비로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아들, 그런데도 계속해서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 아들. 실질적인 살해건 상징적인 살해건 살해야 말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최선이란 믿음. 찌질해도 이렇게 찌질할 수 있을까 싶다. 현 정부와 직전 정부 중 누가 더 잘났고 못났고의 문제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친살해 욕망과 아들의 죄의식,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반복하는 구조를 말하고 싶은 거다. 이제 그만 이런 구조의 고리를 끊을 때도 되지 않았나? 이걸 끊지 않으면 어제와 같은 일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영화] 더 퀸: 파병하는 ‘진보’와 “아들”이라는 성역할

[더 퀸] 2007.02.20. 20:20, 아트레온 9관 11층 G-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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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할인이 대학생까지를 의미한다면 더 이상 학생할인을 하지 않았다. 뭔가 찔렸다. 판매하는 분은 학생증 있으면 달라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지난 일 년 동안 대학생증을 내밀고 할인을 받았는데, 더 이상은 그럴 수가 없었다. 흑흑흑. 천원~~!!! ㅠ_ㅠ

스포일러가 없는 리뷰가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무엇을 스포일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01
이 영화가 다이애나란 사람의 사건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영화가 시작하는 초반, 이 사건과 관련한 정보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 영화의 토대를 이루는 사건, 혹은 다이애나의 죽음과 관련한 얘기들 중에 루인이 아는 것은 없었다. 1997년이면 루인은 십대였고, 배철수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엘튼 존의 노래가 몇 주간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정도만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 어떤 정보를 떠올리려고 해도, 떠올릴 내용이 없었다. 그러다, 왜 굳이 이 영화의 내용을 실제 있었던 사건과 결부시키려고 하는지 되물었다. 이 영화를 말 그대로 하나의 허구로 간주하면 안 되나. 영국과 프랑스란 나라, 영국의 여왕과 군주제의 존재, 다이애나의 죽음 등을 모두 영화에서 창조한 영화적 허구로 간주하고 본다면 더 재밌을 것 같았다. (일테면 “궁”이라는 드라마처럼.) 이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사건으로.

그리고 깨달았다. 이 영화를 어떤 맥락과 분리시켜서 영화적인 허구로만 접근하는 순간,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꽤나 불친절하거나 엉성하다는 걸. 영화 속에서, 다이애나의 죽음에 전 세계가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루인은 그 죽음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상당한 간극을 가지고 출발하는데, 이 영화를 읽는 사람은 이 영화의 토대를 이루는 사건을 알 거라고, 영국왕실의 맥락들을 알 거라고 가정하고 그런 가정 아래 사건을 전개하지만, 이런 맥락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하나의 허구일 뿐이고(이럴 때, 영국왕실과 군주제 뿐 아니라 영국이라는 나라 자체도 허구가 된다) 그럴 때 이 영화는 꽤나 재미없게 다가온다.

그래서 이런 전제에 슬쩍 화가 났다. (물론 이런 “화가 남”은 루인에게도 향해야 하는데,) 마치 자신들이 하는 말의 맥락을 당연히 알 거라는 전제가 가지는 오만함 때문이다. 그 오만함은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가 가지는 오만함이고.

02
이 영화의 맥락을 영화적 허구로만 가정하지 않고 루인의 접하고 있는 현실에 토대를 두고 읽는다면, 토니 블레어가 “진보” 정당이라는 사실에 당황했다. 루인이 알고 있는 토니 블레어는 미국의 이라크침략전쟁에 파병한, 파병을 주장한 사람, “부시의 친구” 혹은 조지 마이클이 “부시의 개”[이런 묘사는 반드시 블레어라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개에 대한 모독이다]로 묘사한 뮤직 비디오 속의 모습과 같은 것들이다.

처음으로 총리로 당선될 당시엔 “진보”였을 지 몰라도, 루인이 접하기 시작한 지금의 모습에선, 잘 모르겠다. 저항으로서의 전쟁이 아니라 침략으로서의 전쟁에 참여하는 걸 “진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선입견으로 이 영화를 접할 때, 두드러지게 다가오는 모습은 인기를 위해 어떻게 연설문을 기획하고 언론을 이용하는가 하는 장면들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의 당수이자 “가장 진보적인 인물”이라고 평가 받는 블레어가 집에선 음식준비를 하지 않고 부인이 음식을 차려주길 기다리는 모습이다. 무엇이 “진보”인가, 라는 진부하지만 언제나 유효한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질 수밖에 없다.

03
이 영화의 재미는 전혀 다른 곳에서 발생한다. 여왕 역을 맡은 헬렌 미렌의 연기는 그것만으로도 볼만 한데, 헬렌 미렌의 연기가 이 영화를 끝까지 읽을 수 있게 한 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연기력에 덧붙여, 이 영화의 재미는 여왕과 총리의 관계에 있다.

영화 중간 즈음에 가면, 블레어의 부인은 블레어에게 블레어의 죽은 엄마와 관련한 얘기를 한다. 여왕과 동년배이고 성격도 비슷하다고. 그래서 여왕을 감싸도 도느냐고.

여왕과 총리인 둘의 관계는 어느 순간 더 이상 여왕과 총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블레어 부인의 말처럼, 하지만 블레어 부인의 말과는 달리 토니 블레어는 여왕을 엄마처럼 여겨서 지지하거나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여왕과 엄마를 동일시 한 것이다. 여왕과 총리 사이의 긴장관계 혹은 적대관계는 어느 순간 총리가 여왕을 지키려는 관계로 바뀌는데, 이 장면에서 블레어의 역할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성역할을 떠오르게 한다. 싸움터에 나가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 엄마와 누나/동생을 지키거라”는 말을 할 때,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는 서구의 아들역할. 블레어의 역할은 어느 순간 이렇게 바뀌고, 여왕을 부르는 호칭 맘(Mom)은 어느 순간 엄마를 부르는 호칭 맘(mom)의 뉘앙스로 바뀐다. 영화 말미에 여왕을 알현하는 장면에서 블레어의 모습은 엄마에게 칭찬 받고 싶어서 설레어 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여왕과 총리의 관계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로 바뀐다. 어떤 경우에도 군주제를 폐지할 수는 없다는 블레어의 말이, 군주제 자체가 아니라 엄마-여왕(Mom)을 (또 한 번) 잃고 싶지 않다는 바람으로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왜 이 지점에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단어를 떠올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