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시간

01

젠더가 나의 전공이지만.. ‘젠더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깔끔한 답변을 단박에 낼 수 있었던 시기는 학부시절 여성학 과목을 처음 들었던 그 학기 뿐이었다. 2004년 봄이었나.. 그땐 섹스와 젠더, 섹슈얼리티를 자신만만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지금은 젠더 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누군가 갑자기 묻는다면 나는 분명 얼버무리면서, 더듬거리면서 말을 못 할 것 같다.
아마 앞으로도 꽤나 오랫동안 ‘젠더’가 무엇인지 모르리라. 그런데도 젠더가 전공이라며 관련 지식을 팔아가며 먹고 살겠지. 웃긴 일이다.
02
퀴어에 오렴되지 않아 순수하고 깨끗했던 그 시절(푸훗) 열심히 팬질했던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몇 분 있다. 그 분의 강의를 듣고 글을 읽으며 공부하는 법, 사유하는 법을 배웠다. 물론 그 가르침에도 난 여전히 공부할 줄 모르고, 사유할 줄 모른다. 암튼… 그 선생님들의 언어에 열광했고, 그 언어를 내것인양 열심히 따라했다. 그 언어면 많은 것을, 아니 내 삶의 일부는 설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젠더 개념이 어려워질 수록, 그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으며 슬픔을 느낀다. 완벽한 것만 같던 언어에서, 쾌락을 주었던 언어에서, 매우 큰 힘을 주었던 언어에서 빈틈을 봤기 때문이다. 강의를 듣거나 글을 읽으며, 빈틈이 너무도 선명하고 때론 불편해서 난감할 때도 많다.
이 빈틈. 빈틈을 매우는 것이, 혹은 다른 설명 방식이나 언어를 찾는 것이 내가 할 일이지만, 슬픈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그 분들이 앎을 탐하는 그 열정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03
좋아하는 이론가의 글을 찾아 읽으면서, 지도교수가 공부하는 방식/태도를 보면서, 멈추지 않은 그 자세가 부럽다. 존경한다는 말이 더 적합할 수도 있겠지만 난 부러움과 질투를 느낀다. 나도 그들처럼 그런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 지금도 혹은 벌써부터 게으르고 태만한 나를 보노라면 ‘난 글렀다’란 말이 절로 나온다.
04
한편.
작년 말이나 올 초에 출간되어야 할 책이 있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로 나올 예정인 “성의 정치, 성의 권리”. 근데 출판사에서 연락이 없다. 작년 여름, 10월 즈음까지 수정한 원고를 보내주면 될 것 같다는 연락이 왔는데, 그 이후로 연락이 없다. 총서를 포기한 것일까 아님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선인세를 이미 받았으니 책이 안 나와도 내가 손해는 아니지만.. 흐흐. 저자가 잠수를 타는 것도 아니고 출판사에서 잠수를 타다니… 물론 난 아직 원고를 다 안 고쳤다. ;;; 그래서 더 걱정이다. 미칠 듯이 바쁜 시기에 갑자기 수정한 원고를 달라고 하면 어떡하나 해서…
이런 태도를 보노라면, 나란 인간, 누가 관리를 해야만 움직이는 인간. ;ㅅ;
05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는데, 페미니즘과 퀴어이론 공부를 시작한 것이 8년 전 일이구나.. 그런데 나 왜 이렇게 무식한 것이냐. 어디가서 학생이라고 말하기가 정말 부끄러운 수준이다.

[남성성과 젠더] 관련 잡담

의외로 많은 분들이 책 [남성성과 젠더]를 사줬다. 어제 KSCRC 후원 겸 북콘서트 자리에서. 물론 북콘서트에서 책을 사겠다고 준비하고 왔겠지만, 그래도 후원콘서트장인데 책이라니… 크크. 나의 예상과 달리 많은 분이 책을 샀다. 그 중 몇 분은 콘서트에 참가한 필자에게 싸인을 받기도 했다. 덩달아 나도 싸인을 몇 번 했다.(사실 책 판매 담당이 나라서… 쿨럭.. ;; )
책은 이미 지난 주에 다 읽었다. 리뷰를 쓸까 말까 고민이다. 내가 공동으로 참여한 책이라 리뷰를 쓰기 참 멋쩍달까. 내가 참여하지 않은 책이라면 부담없이 리뷰할텐데…
아무려나 한 번 쭉 읽은 느낌은 대체로 좋다.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쉬움의 팔 할은 내 글에서 비롯하고. 그럼에도 ‘좋다’는 느낌이 든 이유는 이 책이 네 가지 주제를 아우를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즉, 젠더 이슈에 관한 책, 남성성에 관한 책, 퀴어이론에 관한 책, 트랜스젠더 이론에 관한 책으로 읽기에 좋다는 판단을 했다. 다른 말로, 젠더-남성성-퀴어-트랜스젠더 이론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중첩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혹은 트랜스젠더 이론을 다룬 책 혹은 트랜스젠더 이슈와 관련해서 읽을 만한 책이 거의 없는 한국 상황에서 이 책은 조금이나마 갈증을 달랠 수 있다. 젠더이론 혹은 페미니즘/여성학 입문서를 읽고 나서 다음 단계로 읽기에도 좋다. 번역서가 아닌 한국어로 쓴 책 중에서 퀴어이론서로 권할 만한 책이 매우 드문데, 권할 만한 책이 생겼다는 점에서도 좋다.
[남성성과 젠더]의 아쉬움이나 비판지점을 지적하려면 너무 많다. 그럼에도 조금 후한 점수를 주기로 했다. 어쨌거나 뭔가 하나 생겼다는 게 중요하니까.
… 책은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팔고 있습니다… 크. ;;;
+
덧붙이면…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를 냈을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그땐 책을 낸다는 것이 어떤 건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냥 낸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었다. 지금이라고 책을 낸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아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모르겠다. 그럼에도 뭔가 다른 느낌이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여름이나 가을 초에 또 다른 책이 한 권(역시나 공저) 나올 예정인데 그땐 또 어떤 느낌일까?

[남성성과 젠더] 출간

물론 아직 실물은 못 봤지만;;; 책이 나왔습니다. 대학 교재를 제외하면 세 번째 책이라는 점이 낯설어요.
제목: 남성성과 젠더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3)
저자: 권김현영, 나영정, 루인, 엄기호, 정희진, 한채윤
교보문고: http://goo.gl/oFCWf (책 소개글에 저자소개도 실려 있어서.. 저의 소개가 가장 재미없어요.. ㅠㅠ )
만족스러운 글은 아닙니다. 목차를 확인하니 제 글이 가장 재미없을 듯하고요. ;ㅅ; 늘 쓰고 나면 부끄러우니, 부끄럽지 않은 글은 언제 쓸 수 있을까요. 지금 제 실력에 공저로 책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니까요.
그래도 팬질하는 선생님들과 같은 책을 냈다는 점에 혼자 좋아하고 있습니다. 제 입장에선, 그저 운이 좋았습니다. 같은 책에 이름을 올린 다른 선생님께 누를 끼치지만 않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편집하느라 만날 야근하며 고생하신 편집장 선생님께 특별한 고마움을 전해요.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목차::
1. 정희진 | 편재(遍在)하는 남성성, 편재(偏在)하는 남성성
1) 메타 젠더: 성차에서 분석 범주로, 분석 범주에서 인식론으로
2) ‘양성평등’ 담론의 남성 중심성
3) 지배적 남성성 논의의 역사
4) 복수적 남성성과 남성성의 임의적 구성
5) 신자유주의 시대의 젠더와 계급: 여성의 지위 향상과 무관한 가부장제의 ‘쇠퇴’
6) 다중적 젠더: 남성 연대와 남성들 간의 차이
2. 권김현영 | 남장여자/남자/남자인간의 의미와 남성성 연구 방법
1) 규범적 젠더 문법의 회로 바깥에서
성차를 생산하는 젠더 문법
2) 남장여자, 여자의 눈에 비친 남자의 의미
근대 전환기, ‘여화위남’이라는 상상력
여화위남, 남장의 세 가지 층위
신여성의 남장 시비
3) 남자 되기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식민지 남자들의 처지
제국의 남성에 대한 ‘사랑’
제국-남자와의 동일시 열망으로서의 내선결혼
좌절된 이성애와 경성 모던보이들의 영혼결혼식
4) 성적 차이로서의 남성 주체와 남성성 연구 방법
근대의 문맥과 규범적 젠더 문법
남성이라는 성적 차이의 위치
젠더 연구로서의 남성성 연구
남성을 차이화하기
3. 루인 | 의료 기술 기획과 근대적 남성성의 발명
1) 근대 외과 의학의 발달과 남성성 규범 형성
2) 외부 성기로 증명하는 남성 신체
3) ‘국민’ 관리 제도와 근대적 남성성
4) 가장 생물학적인
4. 나영정 | 남성/비남성의 경계에서: 성전환남성의 남성성
1) 들어가며: 페니스 ‘없는’ 남성?
2) 성전환남성과 남성성 연구가 만난다면?
3) 몸의 이행과 남성성
잘못 태어난 몸? 마이크로 페니스!
호르몬과 성전환수술을 통한 삶의 가능성과 제약
4) ‘남성-비남성-여성’ 사이의 거리
5) 어떤 남성이 될 것인가: 양가적인 주체화
남성 되기를 위한 ‘재사회화’
‘어머’에서 해방! 삐딱한 남자 되기
6) 나가며: 젠더의 다른 사용 방법을 향해
5. 한채윤 | 레즈비언의 남성성: 공존, 반전, 경쟁, 갈등하는 젠더
1) 소녀는 어떻게 레즈비언이 되었는가
2) 젠더의 위반인가, 젠더의 강화인가
레즈비언의 남성성, 혐오하거나 선망하거나
부치/펨 이분법의 반전
3) 부치와 FTM: 남성성의 원본은 없다
불충분한 여장 vs 충분한 남장
부치와 트랜스남성의 남성성
젠더는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다
4) 페니스의 바느질: 섹스와 젠더,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봉합
젠더에 구속된 섹슈얼리티
젠더에 대한 사유를 넓히기
5) 무엇이 다른지가 아니라 무엇이 만들어지는지를 보자
6. 엄기호 | 신자유주의 이후, 새로운 남성성의 가능성/불가능성
1) 이 ‘남루한’ 남성들은 누구인가
2) 남성의 위기, 노동에서 추방되고 국민권을 박탈당하다
3) 평등의 문 앞에서 엎어지다: 찌질이라는 속물
4) 평등? 나 혼자 즐기련다: 동물이 된 우아한 초식남
5) 평등! 남녀 간의 평등 말고 남성들 간의 평등: 괴물로 진화하는 사이버 마초
6) 찌질이: 속물, 동물 그리고 괴물을 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