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퀴어 + 성매매”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에서 흥미로운 강좌를 열었습니다. 퀴어와 성매매 이슈를 다룬 강좌죠. 매우 중요한 이슈임에도 한국 사회에선 거의 논의가 안 되고 있는데 이룸에서 몇 년 전부터 관련 논의를 준비했고 이번에 강좌를 기획했네요. 저도 기대가 매우 크답니다. … 기대만 크고 싶은 강좌도 하나 있고요..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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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룸 대중강좌가 열립니다
: 이룸은 보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성매매 담론을 확장하려 합니다. 이룸 절대강좌에서는 놓치지 말아야 할 논쟁지점이면서도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주제들을 다루면서 (반)성매매 운동의 구체적 과제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범접할 수 있는 성스러움
2013 이룸절대강좌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퀴어 + 성매매



그동안 성산업 안에서의 성판매자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여성의 인권 확보와 직결되어왔던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성별 정체성을 떠나 성매매 시장을 유지하고 있는 내부의 위계와 그러한 산업을 형성하는 집단의 구조에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룸에서는 성산업의 위계 구조에서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모든 집단에도 관심을 가진다. 여성이 종사하는 성매매 뿐 아니라 또다른 소수자 성매매 관련 강좌를 기획한 이유다.
어느 집단에서든 성매매시장을 생성하고 유지시키는 성적 권력의 위계 양상이 있다. 그 대상과 충족의 방식을 살펴보면, 공통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각각의 성매매에서 안전하지 못하거나 계급적 하위에 속해 있는 이들은 누구인지, 그들의 어려움은 무엇인지, 각자의 집단에서 같은 지위를 가진 이들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발견하고 드러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퀴어와 성매매. 너무도 특별해 보이는 두 가지 주제가 현장에서는 어떻게 만나는가, 인권으로는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당사자에게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고 ‘복합적인 차별 경험 많음’으로 인식되기도 하는 이러한 결합구도에 대해 들여다보자.

2013년 5월 20일~6월 24일(매주 월) 저녁 7시 ~ 9시 30분
– 수강료 : 각 강 1만 5천원, 이룸후원회원 1만원, 전강 6만원
– 장소 : 여성플라자 세미나실2(정원 40명), 아트컬리지5(정원 48명)
– 이후 후속세미나와 실태조사를 거쳐 포럼을 기획하고자 합니다. 함께할 분을 찾습니다.


1강 5/20(월) 여성플라자 세미나실2
성매매 현장에서 담론이란 : (반)성매매 담론 확장하기와 당사자의 목소리 조명하기
신박진영 | 대구여성인권센터-성매매피해지원상담소 힘내

2강 5/27(월) 여성플라자 아트컬리지5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숭배와 혐오 : 성판매여성에 대한 형벌로서의 혐오범죄
정희진 | 여성학 강사, <페미니즘의 도전>

3강 6/3(월) 여성플라자 아트컬리지5
비정상인들의 계보학 : 매춘여성, LGBT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배제의 형태
박차민정 | 숙명여대 강사, 퀴어락운영위원

4강 6/10(월) 여성플라자 아트컬리지5
법제화의 논리를 넘어 : 여성주의가 만들어 가야하는 성매매 담론
원미혜 | 여성학자, 막달레나-용감한여성연구소

5강 6/17(월) 여성플라자 아트컬리지5
특정하게 소비되는 젠더의 지위 : TG 여성의 성판매 경험에서 드러나는 성매매의 공통된 함의 
루인 |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6강 6/24(월) 여성플라자 아트컬리지5
공포의 정치 거부하기 : 성소수자/성판매 여성의 차별경험의 공통점과 삶의 권리
한채윤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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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301-0020-2497-61 반성매매인권행동이룸)

반성매매인권행동[이룸]성매매피해지원상담소[이룸]
02.953.6280 http://www.e-loom.org 담당 :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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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감정, 애도

감정과 관련해서, 수업 시간에 쓴 쪽글입니다. 2012년 11월 8일에 작성했습니다.
네, 짐작하시겠지만 한무지의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쓴 쪽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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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완벽하게 퀴어다. 그리고 나는 피곤하다.”라고 말했다. 비록 자신을 “완벽하게 퀴어”라고 말할 수 있는 점이 매력적이긴 해도 내가 끌린 지점은 “나는 피곤하다”이다. 강의와 같은 자리에서 나는 트랜스젠더로, 퀴어로 살아가는 삶의 긍정적 힘을 더 많이 얘기하지만 내가 더 많이 고민하는 지점은 그것과 늘 공존하는 어떤 고단함이다. 그리고 시간을 회절하며, 과거 퀴어한 인물의 부정적 감정에 더 공감한다. 이를테면 매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트랜스젠더 텍스트로 읽는 나는, 이름 없는 피조물의 고통스런 감정에 더 많이 움직인다. 그렇다면 퀴어 운동에서 부정적 감정은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가.
현재 퀴어 운동의 정치적 수단은 (여전히) 폭력 피해를 입증하는 방식이다. 차별 경험을 통해서만 퀴어의 적법한 시민권을 요구할 수 있다. 그래서 통계적 수치 혹은 피해를 수집한 자료집이 필요하다. 언론이나 학부생이 요청하는 인터뷰에서 주로 하는 질문 역시 마찬가지다. 관련 인터뷰는 늘 피해 경험, 퀴어로 살아가는 삶의 어려움을 묻는다. 인터뷰어에게 제목으로 뽑을 만한 피해 경험을 알려준다면 그 인터뷰는 ‘성공적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성공인가?
많은 퀴어 활동가와 이론가는, 정치적 수단과는 별개로 고통과 차별 피해를 전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성애규범성을 되묻는 방식으로 운동과 논의를 전개한다. 트랜스젠더나 퀴어는 질문거리로 구성되지만 이성애는 그렇지 않은 인식체계를 문제 삼는다. 이성애 자체를 탐문하는 것이다. 폭력 피해라는 것이 일상을 규율하는 형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지기에 통계로, 사례로 뽑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트랜스젠더 범주는 그냥 인간의 범주고, 트랜스젠더 범주는 (‘인간’이 아니라)트랜스젠더 범주인 동시에 쉽게 발화할 수 없는 범주란 점을 통계적 차별 경험으로 어떻게 포착할 수 있겠는가. ‘고통’과 ‘차별 피해 경험’은 그냥 일상이다. 일상이어서 직면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혹은 그럼에도인지 아니면 그 모두여서인지, 축제 형식의 자리엔 많은 사람이 함께 하지만 추모 형식의 자리엔 전자에 비해 매우 적은 사람이 참여한다. 그리고 우리는 동료의 죽음을 드물지 않게 접한다.
함께 활동했던 동료가 세상을 떠났다. 그 죽음을 기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의 삶을 퀴어나 트랜스젠더로만 환원하지 않으면서, 그의 삶을 활동가의 역사로만 수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공적 사건으로 만들 것인가. 다른 말로 그의 죽음을 운동의 소재가 아니라 죽음 그리고 상실 그 자체로 직면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슬프게도 차별 사례는 있어도 차별에 따른 감정, 혹은 상실에 따른 감정을 설명할 언어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히더 러브의 질문처럼, 질문의 방향을 바꾸는 전략이 매우 중요함에도 이것으로 충분한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퀴어의 쾌락 혹은 즐거움조차 충분히 논의하기 힘든 한국 상황에서 퀴어로 살아가며 겪는 부정적 감정은 차별 피해 사례로만 환원되기에 이를 말하기가 참 곤란하지만 그럼에도 부정적 감정 역시 더 많이 말해야 한다. 그리하여 부정적 감정을 말하는 더 많은 방식을 찾아야 한다.
부정적 감정을 삶의 일부로, 아울러 과거와 현재를 조우하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히더 러브의 논의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트랜스젠더로 혹은 퀴어로 살며 겪는 많은 부정적 감정을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현재 내 삶과 범주를 구성하는 일부로 설명하는 것은 ‘차별피해자’로 존재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부정적 감정, 부정적 경험(사라 아메드 식으로는 아픔)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자원으로 동원되고 그리하여 극복 서사를 통해서만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런 서사에서 부정적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이 감정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부정적 감정은 마주해야 하는 감정이 아니라 회피하고 서둘러 극복하여 없애야 할 감정일 뿐이다. 하지만 과거의 강등에서 현재나 미래의 긍정으로 전회는 과거를 과거로 해석할 수 없게 하고 현재와 공존하는 과거의 잔존을 보기 어렵게 한다(19). 시간과 경험은 단선적이기보다 우발적이며 다선적으로 구성된다고 해서 과거와 현재가 단절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감정의 아카이브”(4)란 표현처럼 과거는 현재의 몸을 구성하는 일부다.
다른 한편, 부정적 감정은 진단이란 용어를 만나며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12-4). 많은 감정과 아픔은 사회적 인식 체계에서 누락된다는 점에서 사회에서 소통하고 통용할 수 있는 감정으로 구성되지 못 한다. 퀴어의 부정적 감정은 매우 자주 ‘개인의 피해의식’으로 구성된다. 사회적 인식 체계에서 포착되지 못 한 감정은 개인의 착오지 ‘감정’이 못 된다. 그래서 감정을 진단하는 것, 부정적 감정을 읽는 것은 ‘피해의식’을 사회구조에 맥락화하는 작업이며 그것에 실체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이 사회의 구조를 진단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부정적 감정은 이 사회의 다양한 규범성을 드러내고 또 진단한다.
버틀러의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완벽하게 퀴어라는 것과 피곤함은 모순이 아니다. 이것은 언제나 동시적 감정이다. 수치심이 자부심으로, 자부심이 수치심으로 전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28), 수치심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 자부심을 외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불안을 느끼며 머뭇거리기도 한다.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은 대립하는 감정이 아니라 언제나 공존한다. 이것은 대립쌍으로 공존하는 것도 아니다. 퀴어는 혐오의 대상이(었)고 우리는 혹은 ‘나’만은 그렇지 않길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27).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거의 동시에 느끼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폭력 피해를 퀴어의 유일한 경험 혹은 대표 경험으로 재현하지 않으면서, 부정적 감정을 폭력 피해로 수렴하지 않으면서 이 경험을 애기할 수 있는 더 많은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트랜스젠더, 퀴어, 페미니즘: 트랜스페미니즘 혹은 트랜스젠더 페미니즘

어디에 저를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트랜스젠더 연구활동가”입니다. 요즘은 “트랜스젠더/퀴어 연구활동가”란 표현도 쓰고 있습니다. 가장 적게 쓰는 혹은 거의 쓰지 않은 표현은 “페미니스트”입니다. 만약 어떤 정치적 입장, 혹은 제 인식론의 배경을 몇 개의 단어로 요약해야 한다면 “트랜스젠더/퀴어/페미니즘 연구활동가”가 가장 정확할 듯합니다. 저는 트랜스젠더며 퀴어고 또한 페미니스트니까요. 그럼에도 제가 가장 많이 쓰는 용어는 “트랜스젠더”입니다.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 연구활동가는 너무너무너무 적으니까요. 트랜스젠더 이슈로 가끔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는 사람은 있지만, 트랜스젠더 이슈에 천착해서 연구활동을 하는 사람은 너무너무 적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저를 “트랜스젠더”로, “트랜스젠더 연구활동가”로 소개하려 합니다. 미디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활동하고 있는 트랜스젠더를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싶은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제가 저를 “트랜스젠더 연구활동가”라고 소개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운동이라고 믿습니다(착각은 자유니까요 크크 ;; ).

최근 들어 “트랜스젠더/퀴어 연구활동가”라는 표현도 자주 쓰고 있습니다. 퀴어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 너무도 낯설기 때문에 이를 환기하고 싶은 바람도 있지만 트랜스젠더 이슈는 또한 퀴어 이슈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바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두 번째 바람엔 문제가 있습니다. 트랜스젠더 이슈가 또한 퀴어 이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면, 저는 “트랜스젠더/퀴어/페미니즘 연구활동가”라고 표시해야 합니다. 제겐 트랜스젠더 이슈와 퀴어 이슈, 페미니즘 이슈가 별개가 아니니까요. 제게 이 셋은 그냥 제가 동시에 겪는 일입니다. 동시에 고민하는 일이고요. 그래서 제가 “트랜스젠더 연구활동가”라고 적는다면, 그 말엔 “트랜스젠더/퀴어/페미니즘 연구활동가”란 의미가 함축해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트랜스젠더 이슈로 쓰는 모든 글은 트랜스페미니즘 혹은 트랜스젠더 페미니즘을 모색하기 위한 과정의 산물입니다. 비록 부제에 “트랜스페미니즘”을 표시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러합니다.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페미니즘은 제 인식론의 토대였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때때로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쓴다고 해서, 그것이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트랜스젠더를 기준 삼아 이루어진 페미니즘에 문제제기하는 것이자 페미니즘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인 거죠. 트랜스젠더 혹은 퀴어를 배제하는, 논하고 싶어하지 않는 페미니즘에 도전하고, 제가 배운 페미니즘을 실천하려는 것이죠. 그냥 그 뿐입니다. 별다른 것 아닙니다. 그리고 이 별다른 것 아닌 일을 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