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홍보] 페미니스트 젠더 이론과 정치학에 대한 재고: 여자/트랜스(female/trans) 남성성 논쟁을 중심으로

제가 팬질하고 있는(!) 지혜 선생님께서 여자/트랜스 남성성으로 발표를 하신다고 하여 이렇게 홍보합니다!
많은 분들이 참여하고 토론하셨으면 좋겠어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발표 요약문에 나와 있고요.
페미니즘 논의에서 남성성, 특히 여자 남성성과 트랜스 남성성이 어떻게 논의되었는지를 정치하게 다루고 있어요. 트랜스젠더 이론, 페미니즘 이론, 레즈비언 이론, 퀴어 이론의 교차점을 고민하는 분이 듣는다면 더욱 흥미롭겠지만 관련 논의 중 어느 하나라도 관심 있다면 강추합니다! 후후.
제목: 페미니스트 젠더 이론과 정치학에 대한 재고: 여자/트랜스(female/trans) 남성성 논쟁을 중심으로
발표자: 지혜
일시: 2012년 10월 12일 금요일 오후 2시
장소: 연세대학교 논지당 세미나실
===발표 요약===
             페미니스트 젠더 이론과 정치학에 대한 재고: 여자/트랜스(female/trans) 남성성 논쟁을 중심으로
                                                                   지혜(문화학 협동과정 강사)
페미니즘의 젠더 사회구성론은 젠더가 선천적인 특질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임을 규명했지만, 섹스(fe/maleness)를 ‘생물학’의 영역으로, 젠더를 ‘사회화’의 영역으로 이분함으로써 섹스가 젠더를 확정한다는 논리에 정초한다. 여자/트랜스(female/trans) 남성성 이슈는 페미니스트 젠더 사회구성론의 한계와 딜레마를 숙고함으로써 페미니스트 섹스/젠더 이론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는 핵심 의제라고 할 수 있다. 여자/트랜스 남성성은 ‘여성임’(femaleness)과 페미니스트 정체(치)성과의 관계 설정, ‘여성’의 공통 기반으로서 젠더 동일성, ‘남자임’(maleness)―남성성―남성 지배에 대한 일원론적 이해를 균열시키면서 페미니스트 이론의 이원 젠더 패러다임에 비판적인 질문들을 제기한다. 본 연구는 1970년대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즘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여자/트랜스 남성성과 페미니즘 사이의 긴장과 갈등의 역사를 비평적으로 개괄함으로써, 페미니스트 섹스/젠더 이론의 교착 지점들을 문제화한다. 한편, 페미니즘과 여자/트랜스 남성성의 주요 의제들―남성 동일시(male-identification), 내면화된 여성혐오, 남성 특권의 추구, 반(anti) 페미니즘 혐의 등―을 고찰하는 것은 공인된 ‘주류’역사에 대한 재조명과 가려진 역사의 재발굴을 수반한다. 따라서 연구자는 여자/트랜스 남성성 이슈를 페미니즘과 다른 젠더 담론들 사이의 제휴나 페미니즘‘들’의 내부적 차이가 어떻게 축약되고 삭제되어왔는지를 탐문하는 역사 텍스트로 접근한다.  
본 연구는 여자/트랜스 남성성 논쟁에 내재하는 젠더, 인종, 계급, 세대 정치학의 상호교차에 주목하면서 페미니즘과 대립이 발생하는 지점들을 면밀하게 분석한다. 먼저 1970년대 레즈비언-페미니즘의 부치(butch)혐오를 살펴보고, 페미니스트 이상(ideal)으로 표방되었던 양성성(androgyny) 추구의 계급적, 인종적 기반을 조사한다. 이어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다양성을 고려하면서, 남성성과 남성 동일시 비판에 연루되는 젠더 본질주의의 양상들을 논증한다. 마지막으로, 트랜스남성에 대한 남성 특권 논쟁을 중심으로 트랜스혐오 페미니스트들의 문제적 가정들을 지적한다. 궁극적으로, 부치/ftm(female to male)트랜스 페미니즘의 실존과 의미를 가시화함으로써 페미니즘과 여자/트랜스 남성성의 관계에 대한 지배담론을 재구성하고 페미니스트 젠더 정치학의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기고-인권오름] [나와 당신의 거리] 너무 먼 것처럼 느낄 뿐이다

눈치 챈 분도 있을 듯합니다. 요즘 제가 쓰는 글에서 어떻게든 엮으려고 애쓰는 지점은 퀴어와 장애 이슈입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작년부터 둘의 연관 관계를 모색하며 짧게라도 글에서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의 가장 큰 영향은 2009년 가을부터 시작한 장애-퀴어 세미나고요. 굳이 기원을 찾아가면 트랜스젠더 이슈와 장애 이슈의 고차점을 고민하도록 한 화장실 이슈네요.
문제는 저 자신이 아직 충분히 정리한 상황이 아니란 점입니다. 저도 단편적 아이디어와 고민으로 둘을 엮어내고 있죠. 그래서 내용이 너무 서툴고, 저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글에서 계속 언급하려고 하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 안에서 충분히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한두 줄이라도 꾸준히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고민을 정리하는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죠. 제 오랜 습관 중 하나는 고민을 속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펜과 손가락으로 한다는 것. 그래서 글을 쓰지 않을 때면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펜과 손가락이 움직이지 앟으면, 고민도 한두 문장의 단편으로 그칩니다. 크크. ;;;
암튼. 며칠 전 인권오름에 글을 하나 실었습니다. 욕심이 과해 망했지요. 엉엉. 마감 문제만 아니었으면 그냥 포기했을 법한 글입니다.
아, 그리고 이 글은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최초 기고버전. 청탁을 받고 원고 마감일까지 보낸 첫 번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전체 기획 내용을 담아서 수정해달라는 요청에 따른 수정 버전입니다. 기획 연제의 큰 주제는 “나와 당신의 거리”입니다. 전 글에서 직접 거리나 공간을 언급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거리나 공간을 느낄 수 있길 바랐죠. 하지만 이런 글은 내공이 장난이 아닌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작업!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망했죠. 크크. ㅠㅠ 그래서 거리 얘기를 분명하게 담았습니다. 아쉬운 점은 장애 이슈와 퀴어 이슈의 교차점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현재 상황에서 저의 한계입니다. 언젠간 좋아지겠죠,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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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지난 4월 7일, 비가 내렸다. 라디오에선 난리였다. 우산을 꼭 챙겨야 한다고 했다. 교육청은 교장에게 휴교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이유는 많은 이들이 짐작하는 한 가지, 방사능때문이다. 지난 3월 일본에서 지진이 나고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서 다들 방사능 ‘전문가’가 되었다. 방사능 위험을 얘기하고,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를 환기하며 불안을 가중했다.

사고 초기 가까운 거리의 일본 거주민을 걱정하던 반응은 사라졌다. 방사능의 위험만 부각되었다. 사람은 사라지고 위험만 남았다. 그 위험은 질병공포, 장애공포에서 출발했고, 질병공포와 장애공포를 촉발했다. 나의 기억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여파는 언제나 병과 장애인을 전시하는 방법으로 설명되었다. 암 발병률이 몇 % 증가한다고, 신생아 중 장애인이 몇 %라고 말하며 원전의 위험을 알렸다. 일본 원전 사고 이후, 어떤 신문에선 “기형아 낳을까 무서워요 … 둘째 포기”란 제목을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포털 메인에 실린 어느 기사는 일본을 “민폐국”으로 불렀다. 물리적 거리는 그대로인데, 공포와 위험은 그 거리를 좁혔다. 물론 사람 간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내’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땐 다 괜찮았다.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자 불안과 혐오가 터져 나왔다. 장애를 ‘비정상’과 고통으로 치환하며 규범적이고 ‘건강’한 몸에 강박적인 반응이 보편적 정서로 유통되었다. 이런 반응에 나는 나의 몸을 떠올렸다. 트랜스젠더의 몸,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의 몸, 에이즈 감염인의 몸을 향한 사회적 혐오가 떠올랐다. 사회가 ‘다르다’고 가정하는 몸을 향한 혐오와 차별이 떠올랐다.


02
몇 달 전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된 내 아들 AIDS 걸리면 SBS가 책임져라!”는 광고가 일간지에 실려 화제였다.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 ‘오염’되고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질병공포는 방사능 공포와 다르지 않다. 물론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것은 ‘망상’이라고 누군가는 구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망상’일까? 어떤 사람에겐 방사능 위험이 현실이겠지만, 내겐 광고가 구체적 현실이다.

광고를 게재했던 집단과 관련 있을 누군가는 한동안 동성애를 “반대”하는 1인시위를 했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을 찬반으로 논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의 세상에서 퀴어는 사람이 아니란 뜻일까? 나는 우연히 1인 시위를 하는 사람 앞을 지나간 적 있다. 판넬에 적혀 있는 문구를 읽으며, 약간의 분노와 실소와 어이없음과 연민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실, 분노보다는 그저 그가 불쌍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가 느끼는 근거 없는 불안, 그 불안을 퀴어에게 덤터기 씌울 수 밖에 없는 그의 취약함에 그가 조금 불쌍했다.

그 사람 앞을 지나가며 나는 연민과는 또 다른 어떤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와 나는 전혀 모르는 사이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고, 또 너무 멀었다. 내가 트랜스젠더 활동가란 사실을 안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욕을 했을까? 아님 그저 얼어붙었을까? 내게 안전하지도 않지만 위험하지도 않은 그 거리를 걸으며 나 혼자 조금 심란했다. 그가 인간의 범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지나가는 그 자리, 나만 혼자 미묘한 기류를 느꼈다. 1인시위자에게 무관심한 사람과 1인시위자가 신경쓰이는 나와 1인 시위자는 서로 다른 공간을, 현실을 겪고 있었다.


03
방사능 위험 운운하는 언설을 통해 유포하는 장애혐오, 질병혐오는 장애인을 인간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광고 구절과 1인 시위 내용은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양성애자, 에이즈 감염인을 인간 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그 현실에서 장애인이나 퀴어가 존재하지 않느냐면 그렇지 않다. 배제한 존재를 환기하며 늘 그 존재와 함께한다. 방사능 공포가 유발하는 혐오는 장애인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는다. 광고를 게재한 이들은 퀴어와 에이즈 감염인을 강박처럼 떠올리며 불안에 떤다. 타인을 배제하는 이는 자신의 규범성, 자신은 ‘정상’이라는 항변을 입증하는 근거로서 배제할 대상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배제는 그 대상이 세상에 두루 존재하도록 하며, 세상을 이루는 토대로 만든다. 불안과 배제는, 결국 이 세상을 이루는 토대가 소위 말하는 ‘정상’/규범이 아니라 배제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른 말로, 이 세상은 소위 규범적/’정상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내가 1인 시위자 앞을 지나간 것처럼, 내가 간과하고 있는 이들이 어디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간과해서 그저 없는 것처럼, 나와 너무 먼 것처럼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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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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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몸 같은 건 없다.
루인(트랜스젠더 연구활동가, runtoruin@gmail.com)

  지난 4월 7일, 비가 내렸다. 라디오에선 난리였다. 우산을 꼭 챙겨야 한다고 했다. 교육청은 교장에게 휴교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이유는 많은 이들이 짐작하는 한 가지, 방사능때문이다. 지난 3월 일본에서 지진이 나고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서 다들 방사능 ‘전문가’가 되었다. 방사능 위험을 얘기하고,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를 환기하며 불안을 가중했다. 어느 신문에선 일본을 “민폐국”으로 불렀다.

  사고 초기 가까운 거리의 일본 거주민을 걱정하던 반응은 사라졌다. 방사능의 위험만 부각되었다. 사람은 사라지고 위험만 남았다. 그 위험은 질병공포, 장애공포에서 출발했고, 질병공포와 장애공포를 촉발했다. 나의 기억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여파는 언제나 병과 장애인을 전시하는 방법으로 설명되었다. 암 발병율이 몇 % 증가한다고, 신생아 중 장애인이 몇 %라고 말하며 원전의 위험을 알렸다. 일본 원전 사고 이후, 어떤 신문에선 “기형아 낳을까 무서워요 … 둘째 포기”란 제목을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문득 오래 전 유행한 노래가 떠올랐다.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네 / 할아버지가 히로시마에 살고 계셨다네 / 내 왼손가락은 태어날 때부터 한 덩어리로 붙어있었죠 / 언제나 주머니 속에 숨어 있는 나의 왼손”(<새끼 손가락> 김승진 노래)

  ‘내’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땐 다 괜찮았다.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자 불안과 혐오가 터져 나왔다. 장애를 ‘비정상’과 고통으로 치환하며 규범적이고 ‘건강’한 몸에 강박적인 반응이 보편적 정서로 유통되었다. 이런 반응에 나는 나의 몸을 떠올렸다. 트랜스젠더의 몸,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의 몸, 에이즈 감염인의 몸을 향한 사회적 혐오가 떠올랐다.

  몇 달 전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된 내 아들 AIDS 걸리면 SBS가 책임져라!”는 광고가 일간지에 실려 화제였다.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 ‘오염’되고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질병공포는 방사능 공포와 다르지 않다. 물론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것은 ‘망상’이라고 누군가는 구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망상’일까? 어떤 사람에겐 방사능 위험이 현실이겠지만, 내겐 광고가 더 구체적 현실이다. 현실이란 각자의 입장에서 구성되니, 현실과 망상이란 구분은 불가능하다.

  방사능 위험 운운하는 언설을 통해 유포하는 장애혐오, 질병혐오는 장애인을 인간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광고 구절은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양성애자, 에이즈 감염인을 인간 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그 현실이 배제한 사람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배제한 존재를 환기하며 늘 그 존재와 조우한다. 방사능 공포가 유발하는 혐오는 장애인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는다. 광고를 게재한 이들은 퀴어와 에이즈 감염인을 강박처럼 떠올리며 불안에 떤다. 타인을 배제하는 이는 자신의 규범성, 자신은 ‘정상’이라는 항변을 입증하는 근거로서 배제할 대상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배제는 그 대상이 세상에 두루 존재하도록 하며, 세상을 이루는 토대로 만든다. 불안과 배제는, 결국 이 세상을 이루는 토대가 소위 말하는 ‘정상’/규범이 아니라 배제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른 말로, 이 세상은 소위 규범적/’정상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배제하는 대상을 ‘투명인간’으로 만든다. 규범의 불안한 토대를 타인에게 덤터기 씌운다. 이것이 지배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비규범적 존재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퀴어는 언제나 일상 생활에서 제 삶을 살아가지만, 이것이 문제될 것 없다. 퀴어의 몸은 뭔가 다르고, 규범적 이성애자의 몸만이 ‘건강’하고 ‘행복’하다는 강박이 퀴어의 삶을 고단하게 만든다. 우발적 사고만이 불안을 조성하지 않는다. 사고의 결과,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또 다른 ‘건강’ 강박이 낙인을 만들고, 몸의 위계를 만든다. 문제는 퀴어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고 또 다른 누군가도 아니다. 기준을 알 수 없고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어떤 ‘건강’ 강박, ‘규범’ 강박이 문제다. 퀴어만 아니라면, 장애인만 아니라면 ‘건강’하고 ‘행복’할 것이라는 근거없고 실체 없는 믿음이 문제다. 비장애인만, 규범적 이성애자만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 건강과 행복에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문제다.

  다시, 비가 내린다. 이번엔 어떤 비가 내릴까? 타인을 배제하는 공포가 반영된 비가 내릴까? 하지만 ‘건강’한 몸 같은 것, ‘정상’적인 몸 같은 것, 그런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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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두 개

01

구금시설과 트랜스젠더 관련 발표가 지난 금요일에 있었습니다. 나름 재밌는 자리였지만… 자리를 채운 분들 다수가.. 덜덜덜.(이하 생략)
전 “트랜스젠더와 의학적 처우”란 주제를 다뤘습니다. 근데 다른 분들의 내용이 더 재밌었다는. 그나저나 채윤 님은 원고에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멋진 말을 잘 하시는지! 역시 그 분의 내공은 장난이 아닙니다. 🙂
제 발표문은 올려뒀고, 그 중 일부만 붙이면..
사법제도가 트랜스젠더의 어떤 위법 행위를 처벌한다는 것은 비트랜스젠더의 어떤 위법 행위를 처벌하는 것과 같아야 한다. 트랜스젠더란 범주와는 상관없이 어떤 위법 행위만을 처벌하는 것이지 트랜스젠더란 젠더 범주 자체는 문제삼지 말아야 한다. 사법적 처벌은 트랜스젠더의 젠더 범주를 고통으로, 형벌의 대상으로 다뤄선 안 된다. 그럼에도 주민등록상의 젠더를 바탕으로 일방적으로 공간을 결정한다면, 이는 이중처벌일 수밖에 없다. 트랜스젠더 범주를 부정하고 남성으로 지정받았으면 남성으로, 여성으로 지정받았으면 여성으로 살 것을 사법을 통해 강요하는 것과 같다.
02
토요일엔 “페미니즘과 퀴어”란 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료집셔틀했습니다. 줄 자료집 없습니다. -_-;;
부족한 발표문에 비해 고마운 논평을 받았습니다. 특히 전체 토론 시간에 들은 논평이나 끝나고 식사자리에서 들은 논평은 많은 고민을 하도록 했습니다. 글을 전면 개작하여 다른 식으로 살리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요.
제 발표문(역시 올려뒀습니다)에선 줄곧 트랜스젠더, 퀴어 이야기만 나옵니다. 재생산 얘기는 일종의 곁가지고요.;; 근데 젠더 논의와 퀴어 논의가 없으니 대거 보강해야 한다는 논평을 따로 들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당황하고 말 논평은 아닙니다. 젠더이론과 퀴어이론에 트랜스젠더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하는 이슈죠. 트랜스젠더 이론은 젠더 이론이 아니고, 퀴어이론은 동성애이론이란 언설은 무척 많습니다. 이런 이해가 상당히 일반적이고요. 그래서 트랜스젠더 이론을 얘기하며, 이 이슈가 젠더이슈며 퀴어이슈란 점을 끊임없이 얘기해야 하죠. 제 지도교수가 논문심사를 앞두고 “트랜스젠더 이슈가 어째서 젠더/여성학이슈인지를 설명해야 할 수도 있으니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이 말을 곱씹는 일이 많네요.